60. 바람과 불꽃 (2)
레오의 방.
푸르게 변한 포렌티아를 받아 든 덱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색이 왜 이래? 원래 이렇지 않았잖아, 상했나?”
“…헛소리 그만하고 그냥 입에 넣어라.”
“으응? 이걸 먹으라고?”
이 비싼 포렌티아를?
덱스는 이해가 안 갔다.
이 고가의 포렌티아를 먹으라는 것도 그렇지만, 솔직히 색도 영 맛이 가 보이는 것이 먹기에 꺼림칙했다.
“야, 먹지 마. 내놔!”
“가만있어 봐, 왜 줬다 뺏으려고 그래…?”
도로 뺏으려는 기색에 필사적으로 손을 빼는 덱스.
꺼림칙하지만 손에 들어온 걸 뺏기는 건 또 싫다. 먹고 죽더라도 뺏길 수는 없지!
“쓸데없는 소리만 하니까 그러는 거 아냐, 저기 봐! 무무카는 아무 소리도 안 하잖아.”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미리야를 부탁한다.”
한 손에 포렌티아를 쥐고 짐짓 비장하게 말하는 무무카.
“…너마저?”
“농담이었다.”
“제발 둘 다 그만 지랄하고 입에 넣기나 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레오가 한숨을 푹 쉬며 짜증을 내니 그제야 포렌티아를 입에 가져가는 둘.
“어어?”
“으음?”
입에 넣자마자 사라지는 듯 흡수되는 신기한 현상에 놀란 것도 잠시.
이어서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으으음!”
“레, 레오! 이게 뭐야? 무슨 마나가…?”
입속에서 솜사탕처럼 사라진 포렌티아.
그 기운이 전신에 퍼지는 듯하더니 곧 몸속에서 수맥이라도 터진 듯 마나가 솟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같은 현상을 경험한 레오는 간단하게 설명을 끝냈다.
“뭐 하냐? 마나 버릴 거야? 오러홀하고 서클에 죄다 때려 박아.”
둘은 레오가 그랬듯 바닥에 앉아 곧바로 집중했다.
망설이는 만큼 손해다. 흘러넘치는 마나를 한 톨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무무카의 오러홀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덱스의 서클이 활성화되며 고리가 두터워졌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평생에 두 번 다시 없을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산책이나 좀 가자.”
캉!
족히 몇 시간은 걸릴 작업.
레오는 둘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슈니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사람이 없을 만한 곳을 찾다가 호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일인 데다 한참 오후 강의가 진행될 시간.
넓은 호수 주변은 인기척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오랜만의 산책에 신난 슈니가 흰 털을 휘날리며 사방을 뛰어다녔다.
“저쪽으로 가자.”
캉캉거리며 레오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가는 슈니.
따로 훈련을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듣는 걸까.
조금 고민하다가 곧 관두기로 했다.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인 녀석인데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겠나.
“슈니, 이리 와 봐.”
레오가 손짓하자 슈니가 뽀르르 달려와 발치에 붙었다.
호수 인근 수풀이 적당히 우거진 곳. 가까운 곳에 인기척도 없고 제법 큰 나무도 빽빽하다.
“너도 그거 먹었지?”
캉캉!
그렇다는 듯 짖는 녀석.
“딱히 뭐라고 하려는 게 아냐. 네 힘이 얼마나 돌아왔는지 궁금해서 그래.”
캉!
짧게 한 번 짖더니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슈니.
곧이어 그 작은 몸에서 마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녀석의 기세는 소드 마스터의 검기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하면서 봄바람처럼 포근하기도 했다. 아마도 실체화되지 않는 순수에 가까운 마나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이윽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흰 늑대.
프로인 숲에서 오우거와 싸우던 그 녀석이었다.
크르릉….
팔뚝만 한 송곳니를 드러낸 거대한 흰 늑대.
녀석은 작게 목을 울리면서 조용히 레오의 앞에 엎드렸다. 당연하게도 적의는 전혀 없다.
레오가 손을 내밀어 흰 콧잔등을 쓰다듬었다.
덩치는 커졌지만 작은 녀석의 감촉과 다르지 않은 부드러움이다.
“이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건 꽤 많이 회복했다는 뜻이겠지?”
그르르릉.
손길이 기분 좋은 듯 낮고 가볍게 목을 그르렁거리는 슈니.
레오는 슈니의 몸에 손을 얹은 채 조용히 그 마나를 가늠해 보았다.
일전에 균열이 가 있던 마나핵은 이제 튼튼해 보인다. 거대한 몸체를 이루는 마나의 양과 흐름도 전보다 확연히 크고 활발했다.
정령의 속성을 가졌다는 녀석에게 적절한 단어인지 모르겠지만, 충분히 건강해 보였다.
“잘됐네.”
레오는 앞발을 모으고 고개를 옆으로 파묻은 슈니의 목덜미에 기대어 앉았다.
부드러운 털 덕분인지 고급스러운 의자에 기댄 기분이다. 서로의 마나가 자연스레 섞여 들었고 슈니로부터 흘러들어 온 기억이 아른거리듯 펼쳐지려 했다.
레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녀석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기에.
* * *
…….
울창한 숲.
무리에서 떨어진 작은 늑대가 숲을 헤매었다.
며칠이나 굶었는지 작은 발걸음에는 힘이 없다. 윤기를 잃어 푸석한 잿빛 털은 더럽고 지저분했다.
끼잉-!
지친 녀석은 어느 바위 밑에서 몸을 웅크렸다.
힘없는 작은 늑대에게 숲은 너무도 두려운 존재.
사냥은 쉽지 않다. 벌레를 잡아먹으며 겨우 목숨을 연명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달했다.
풀썩-!
흙 위에 드러나 반쯤 썩은 거대한 나무뿌리.
포식자를 피해 찾은 그 뿌리 깊숙한 곳에서, 기력이 다한 어린 늑대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뿌리에서 나타난 작은 빛의 구체.
이 나무뿌리가 숲 시초목의 수많은 뿌리 중 하나였다는 것도, 그 나무에 깃들어 있던 숲의 정령이 녀석에게 다가간 것도 순전히 우연이었다.
죽어 가던 어린 늑대는 정령의 힘을 나누어 받았다.
더러운 잿빛 털은 윤기 나는 흰색으로 변했다. 크고 강해지고 싶었던 소망이 커다란 몸과 날카로운 송곳니로 구현됐다.
[슈나베룬.]
프로인 숲의 조율자.
정령의 존재를 받아들인 어린 늑대는 새롭게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레오를 만났다.
…….
* * *
레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어느새 작아진 모습으로 고르릉거리는 슈니의 털이 석양빛에 부드러운 주황으로 물들었다.
“읏차.”
풀숲에 누워 있던 레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직이 불렀다.
“슈나베른.”
캉!
오직 숲의 정령만 알고 있는 녀석의 진명.
슈나베른.
정령의 힘을 나누어 받은 정령수.
프로인 숲의 조율자.
정령에게 이름을 나누는 행위란 무엇보다도 강력한 계약이라는 것과.
그것은 반정령이라 할 수 있는 슈나베른에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원래 알던 지식처럼 머리에 스몄다.
단추 같은 녀석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던 레오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슈니가 더 잘 어울리지 않냐?”
캉캉캉!
그 말이 맞다는 듯 폴짝폴짝 발치에서 뛰는 녀석.
“슬슬 돌아가자.”
두 사람에게 돌아갈 때였다.
* * *
새로운 소드 마스터의 탄생.
학부장 카르파가 이 사실을 보증하자마자 생도들은 서둘러 서신을 작성했다.
중앙에서 주요 정보를 취득하고 본가에 알리는 것 또한 아카데미에 입학한 목적 중 하나였으니까.
아카데미에서 시작된 수많은 서신이 동시다발적으로 제국 곳곳을 향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학부장 카르파는 수년 만에 황궁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이미 서신으로 황궁에 보고를 올렸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사안이 아니다.
당연하게도 황제를 배알하라는 답신이 도착했다.
“학부장님, 채비가 끝났습니다.”
“그래, 내려가지.”
“잘 어울리시네요.”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화려한 술이 달린 정복 차림의 카르파를 보고 이오페는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올렸다.
카르파의 입궁은 수년 만의 일이다. 아카데미의 학부장으로서 황궁을 찾을 일이 거의 없기도 했지만 그간 스스로 중앙과 거리를 두려 했기에.
이오페는 그것이 내심 아쉬웠다.
그는 지금의 안정된 제국을 있게 한 일등 공신이기에 더 존중받았으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볼 생각이네.]
그랬던 카르파는 그렇게 말했다. 그간 눈을 돌렸던 것과 똑똑히 마주 보겠다고 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오페는 기뻤다.
“크흠.”
이오페의 시선이 뻑뻑한 옷만큼이나 어색해 카르파는 헛기침했다.
1층에 대기한 마차에는 레오가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옷이 좀 끼어 보이는데요?”
“시끄럽다. 근육 때문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불편해 보이는 부분은 배가 아니라 가슴과 어깨였으니까.
예전보다 결코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어서 이오페가 마차에 올랐고.
다그닥다그닥, 가벼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애완동물을 데려가는 건가?”
카르파의 시선이 레오의 옆자리로 향했다.
진작 자리를 잡고 잠들어 있는 하얀 털뭉치 녀석, 슈니다.
“오래 자리를 비울 것 같은데 혼자 남겨 두기 좀 그래서요. 걱정 마십쇼. 황궁에 데리고 들어가진 않을 테니까요.”
“그렇군. 상관없겠지.”
혹시 뭐라고 하려나 싶었는데 카르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오히려 이오페의 시선이 자꾸 슈니 쪽으로 향했는데 딱 일레인과 같은 눈빛이었다.
“긴장되나?”
“…뭐, 조금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마음 편히 가져라. 제국에서 자네에게 호의를 가지지 않는 이는 없을 테니까. 그건 황제 폐하께서도 마찬가지다.”
“흐음….”
일단 겉으로는 말이지.
레오는 그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황제파든 후작파든 간에 모두가 겉으로는 새로운 소드 마스터의 탄생을 반길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첩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문제는 그 속내가 다들 제각각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건 뭡니까?”
레오는 발밑에 묵직한 상자를 가리켰다.
네 귀퉁이의 금속 장식과 고급스러운 문양이 음각된 상자. 한눈에 보아도 꽤 귀한 것처럼 보인다.
“글쎄?”
카르파는 전혀 모른다는 듯 관심도 두지 않았고.
“에휴….”
이오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학부장님, 몇 년 만에 폐하를 뵈러 가는데 빈손으로 가시려 했습니까?”
“…뭐 그런 것까지 준비하고 그러나. 폐하께서는 그런 격식을 따지시는 분이 아니거늘.”
“격식을 떠나서 마음입니다! 마음!”
“제국과 폐하를 향한 내 충정은 여전히 뜨겁다네. 굳이 꺼내 보이지 않아도 폐하께선 알고 계시지.”
“잔말 말고 그냥 챙겨 가십시오.”
“…그러지. 근데 안에 뭐가 들었나?”
“술입니다.”
“좋지, 역시 내 부관이야. 하하핫!”
“도대체 언젯적 부관입니까?”
이오페는 창밖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말은 안 해도 부글부글 속을 끓는 게 훤히 보인다.
강의 때는 철두철미한 모습만 보이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꽤 신선했다.
“두 분은 오래 알고 지내셨습니까?”
레오가 물었다.
두 사람이 그저 아카데미의 상하 관계로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단순히 사회적 관계에 묶인 것이 아닌, 훨씬 더 끈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오래되었다면 오래되었지. 한 20년 정도 되었나?”
“…올해로 20년째군요.”
“크… 꼬맹이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새, 생도 앞에서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울보 꼬맹이를 어엿한 검사로 만들어 놨더니 이제는 마누라인 양 종일 붙어서 잔소리만 해 대고….”
“학부장님!”
“귀청 떨어지겠다.”
빽 소리를 지른 이오페는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잔뜩 당황한 표정.
‘호오?’
그저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진 게 아니라는 것쯤은 레오도 금세 눈치챘다.
마차 안을 떠다니는 미묘한 기류.
문제는 카르파가 전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수님도 고생이 많으시네요.”
“뭐, 뭐를?”
레오의 속삭임에 화들짝 놀라 되묻는 이오페.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다.
“아니, 그냥요. 학부장님이 더럽게 눈치가 없어 보여서.”
“…쓸데없는 소리.”
이오페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리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본인도 얼굴이 붉어진 건 아는 것 같은데, 귀하고 목까지 그런 줄은 모르는 모양.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이오페가 어색한 침묵을 깨듯 말을 돌렸다.
“지금쯤 황궁도 꽤나 시끄럽겠군요.”
“언제는 시끄럽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그 말대로.
황궁 대전에 모여든 대신들은 주인공이 도착하기 전부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