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62화 (62/127)

62. 바람과 불꽃 (4)

반다이트 백작이 오러를 일으켰다.

단전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오러가 전신에 휘몰아치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것은 분명 레오가 아직 닿지 못한 경지였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단단히 압축된 오러홀과 강맹하면서도 완숙한 오러 운용.

모두가 레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일러 주는 이정표였다.

‘으읏….’

짧은 시간 들여다보았을 뿐인데도 눈이 아렸다.

높은 경지의 상대를 들여다보면 종종 발생하는 통증. 아쉬움을 삼키며 오러안을 중단했다.

화르르륵-!

백작의 검에 화염이 일었다.

반다이트 가문 대대로 구현해 온 오러 블레이드는 불꽃이다.

검을 감싸는 그 불꽃이 마치 살아 있는 용의 숨결 같다고 하여 화룡검이라는 이명을 가지기도 했다.

“오오오…!”

반다이트 백작의 오러 블레이드를 처음 목도한 일부 대신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오러로 검의 강도와 예기를 강화하는 오러 소드.

그 경지를 넘어 심상을 실체화한 검, 그것이 오러 블레이드이다.

그 때문에 새로운 소드 마스터가 완성한 심상이 무엇일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레오도 압축된 오러를 해방했다.

아카데미에서처럼 했다가는 대전 천장에 구멍이 뚫리겠지만 그간 충분히 연습했기에 제어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우우웅-!

검명과 함께 그만의 오러 블레이드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검신에 매달린 푸른 오러가 점차 창백해지며 시린 달빛으로 치환된다. 이윽고 그 빛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검을 중심으로 나선으로 회전하였다.

시릴 듯한 예기를 머금은 나선의 검풍.

그것이 레오의 오러 블레이드였다.

“훌륭하다.”

황제의 나직한 한마디.

많은 대신들도 감탄 이외에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폐하, 소신이 한 합만 어울려 보아도 되겠나이까.”

반다이트 백작이 황제에게 청했다.

당초 계획은 레오의 오러 블레이드를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눈앞에서 그의 검을 보자 무인으로서 욕심이 생겼다.

승패를 겨루고자 함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와 단 한 번이라도 검을 맞대고 싶은 욕망이 피어난 것.

“공도 어쩔 수 없군, 허락하지.”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허락된 것은 단 한 번의 합.

반다이트 백작은 검을 고쳐 잡았고 레오 또한 준비를 마쳤다.

화르륵-!

백작의 머리 위에서 시작된 불길이 레오를 향했다.

어떠한 기교도 섞이지 않은 정직한 사선 베기, 오직 위력뿐인 단순한 공격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이 검을 받아 낸 이는 없었다.

카앙-!

검이 맞부딪히며 두 사람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피어난다.

둘러싼 병사들이 방패를 세우며 버텼으나 동심원을 이루듯 번져간 충격파를 온전히 상쇄할 수 없었다.

“으아아앗-!”

대신들 몇이 굴러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있던 이 중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킨 이는 카르파 정도.

챙강-!

두 개의 검이 동시에 바스라졌다.

오러 블레이드의 힘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검의 강도가 부족했던 것.

“음.”

반다이트 백작이 옅게 미소 지었다.

그것은 재능 있는 후배에 대한 감탄이기도 했으며, 지금껏 어깨에 짊어졌던 제국 유일의 소드 마스터라는 무게감을 조금 덜어 낸 후련함이기도 했다.

오러를 모두 갈무리한 반다이트 백작과 레오가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원형으로 그들을 둘러싸던 병사들 또한 좌우로 정렬했다.

황제가 옥좌에서 일어섰다.

“나 바란 드메이르 폰 아슐렌은 오늘 이곳에서 제국의 두 번째 소드 마스터가 탄생했음을 선언하노라.”

“천년 제국에 영광이 있으라!”

“황제 폐하 만세! 천년 제국 만세!”

황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 손에는 금빛으로 장식된 검이 들렸다.

레오는 다시 한번 왼쪽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고, 그 앞에 황제가 멈춰 섰다.

“그대는 제국의 검이 되어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가.”

레오의 목적은 검은 마물로부터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다. 그 안에 제국의 안녕은 자연히 포함되리라.

“맹세합니다.”

어깨와 머리에 검이 닿는다.

레오는 조금 혼란했다. 이게 무슨 의식이지? 혹시 지금 작위라도 내리는 건가?

황궁에 불린 것이 단순한 확인 목적만은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아슐렌 제국이 대륙의 패자를 자처하고 있다고는 하나 완전한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중앙 대륙의 국경에는 보르트 왕국이 인접해 있고 그 너머에도 여러 군소 국가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소드 마스터는 그 존재 자체로 강력한 억지력이다. 당연히 보상도 따를 터.

작위를 전혀 기대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막상 닥치자 조금 흥분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대에게 남작 위를 내리겠다. 또한 바이스만을 봉토로 수여하니 천년 제국에 충성하고 영지민을 보살피는 어진 영주가 되어라.”

남작 위! 거기에 영지!

레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기에.

금전적 보상과 더불어 잘해야 준남작 정도의 작위를 기대했다. 그런데 남작이라니, 영주라니!

“고개를 들라, 바이스만 경.”

레오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입꼬리가 광대에 닿을 것 같아서.

그 이후 황제가 뭐라 말을 이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남작이라고!’

기분 째질 것 같다.

* * *

황제가 대전을 떠나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축하가 이어졌다.

“축하하네, 바이스만 남작. 졸업도 안 한 생도가 작위를 받은 건 아카데미 역사상 처음일 걸세.”

“흐흐흐… 학부장님. 한 번만 더 불러봐 주심 안 됩니까?”

“그렇게 듣기 좋은가? 나 말고도 불러 줄 사람이 줄을 섰으니 질릴 때까지 즐겨 보게. 그나저나 나는 별수 없이 며칠 붙들려 있어야 할 것 같구먼.”

“폐하와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카르파는 레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대전을 떠났다.

한 손에는 이오페가 챙겨 놓은 술 상자가 들려 있는 것을 보니 곧바로 황제의 처소에 방문하려는 모양.

“바이스만 남작.”

“백작님!”

반다이트 백작이 흐뭇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훌륭한 오러 블레이드였네.”

“검성께 칭찬을 들으니 뿌듯하네요.”

“하하핫! 검성은 무슨. 낯간지럽네.”

퍽퍽퍽!

그러면서 반다이트 백작은 레오의 등 짝을 몇 차례 때렸다.

…싫어하는 얼굴은 아닌데?

“반다이트 공, 내게도 인사를 나눌 기회를 주시겠소?”

이어서 젊었을 적 여자 꽤나 울렸을 것 같은 금발의 중년이 웃으며 다가왔다.

“아들놈이 신세를 지고 있네. 베니에르라 하네.”

“줄리앙의 아버님이시군요! 처음 뵙습니다.”

“철은 없지만 심성은 착한 녀석이니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동기끼리 서로 도와야죠. 동기 사랑 제국 사랑이라지 않습니까, 하하핫.”

“고맙네. 나중에 한번 초대하고 싶은데 응해 주겠나?”

“물론입니다.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두 백작과 짧은 대화가 끝나자 대신들의 인사가 앞다투어 이어졌다

무수한 악수의 요청.

“바이스만 남작, 반갑소.”

“바이스만 공! 나는….”

모두 호의 가득한 얼굴들.

다들 레오보다 낮은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뻣뻣하게 구는 이 하나 없었다.

당연했다. 열다섯의 어린 소드 마스터에게 이 남작 위는 그저 작은 출발점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는 정신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바이스만’이라는 성이 입에 안 붙어 영 어색하다.

바이스만, 바이스만, 바이스만…. 새로운 성을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바이스만 남작.”

한 목소리에 레오 곁에 모여 있던 귀족들이 스르륵 피하며 자리를 만든다.

갈색에 가까운 짙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다가왔다.

“제국의 재상이신 요크 각하이십니다.”

콧수염이 빙글 위로 꼬부라진 사내가 그의 옆에서 얼른 덧붙인다.

이 콧수염은 누구더라? 방금 인사한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 별로 안 중요해 보이니 신경 끄자.

“아비엘 요크입니다.”

“재상 각하, 예법에 어두워 진작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재상.

관료 체계에 대해 자세히 모르지만 그중 제일 높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젊어 보여도 이들 중 가장 직위가 높다는 뜻.

“제국의 든든한 검이자 방패로서 의무를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훤칠한 키와 부드러운 인상.

분명히 호의를 비치고 있음에도 위화감이 일어나는 미소다.

반사적으로 오러안을 사용해 살폈지만 그는 오러홀도 가지지 못한 그저 평범한 사내였다. 그럼에도 영 찜찜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그것이 재상 아비엘 요크와 첫 만남이었다.

* * *

세 개의 방패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쏜살같이 황궁을 벗어난다.

마차에는 반다이트 백작과 방금 남작 위를 받은 레오가 함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먼.”

반다이트 백작이 목까지 채워진 의복의 단추를 풀어 헤치며 숨을 내쉬었다.

카르파만큼은 아니지만 그 또한 단련된 체구.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맙네, 남작.”

“별말씀을요. 그런데 그거 진짜 적응 안 되네요.”

“하하하, 이제부터 적응하면 되지.”

마침 영지로 돌아가려는 반다이트 백작의 초대를 냉큼 수락했다.

카르파가 황제에게 붙잡히면서 이오페도 별수 없이 황궁에 남게 됐다. 자연히 레오 혼자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곤란해하던 차.

‘출석 같은 건 적당히 처리해 주겠지.’

다른 일도 아니고 황궁의 부름을 받은 일.

몇 주 후면 학기가 끝나고 두 달간 휴식기에 들어가니 그걸 생각하면 일정에 꽤 여유가 있다.

또한 반다이트 백작을 따라나선 것에는 훨씬 중요한 이유.

제국 100주년 기념식, 즉 보르트 왕국의 침공이 석 달도 안 남은 시점.

이번 초대를 구실로 반다이트령에 머물며 구체적인 대비책을 고민할 생각이었다.

“그 녀석은 늑대인가?”

백작의 시선이 레오 옆자리의 슈니를 향했다.

“우연찮게 잘 따르게 되어서요.”

“평범한 녀석 같지는 않군.”

“뭐, 그렇긴 합니다.”

레오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된 후 모든 감각에 대한 민감도가 상승했고, 그건 마나 민감도 또한 마찬가지다.

백작이라면 슈니가 가진 마나가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 쉽게 알아챌 것이다.

다행히 크게 캐물을 생각은 없는 모양.

“클라인은 어떻게 지냅니까?”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다네. 아들놈 얼굴을 본 지 오래됐군. 머리가 커지더니 영 귀여운 맛이 없어.”

그렇게 말하는 백작의 얼굴이 꽤 밝다.

저리 말해도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으니까.

“아카데미 생활은 좀 어떤가? 클라인은 통 이야기를 안 해 줘서 말일세.”

“아카데미보다는 그 녀석 이야기가 더 궁금하시죠?”

“이런, 들켰구먼.”

레오는 클라인과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입학시험에서 검을 맞댄 것, 뒤풀이로 실컷 마시고 취한 것, 함께 카미르 광산에 향한 것, 시오프 산맥에서 몬스터를 토벌한 것.

생각해 보니 클라인과 많은 것을 함께 했다 싶다.

“하하하, 녀석이 이를 갈 만하군!”

“그래요? 그 녀석이요?”

“누구보다 지기 싫어하는 녀석이니까 말일세. 자네가 좋은 자극이 되어 준 것 같아.”

백작과 대화는 즐거웠다.

사사로이 친구의 아버지라는 관계도 있지만 그보다는 용병과 군인이라는 두 사람의 결이 잘 맞은 탓이다.

“허어! 황녀님을 때려눕혔단 말인가? 자네 친구도 보통이 아니구먼.”

아니, 때려눕힌 건 아니라니까요.

“투기를 그렇게 활용할 수 있는 수인이라니. 그 친구도 꼭 만나 보고 싶네!”

“그것참 의외로군. 베니에르의 공자가 꽤나 속을 썩인다는 말을 들었네만, 철이 든 모양이야.”

자연히 덱스와 무무카의 이야기도 섞였다. 줄리앙도 간간이 등장했다.

백작은 때로는 집중하며, 때로는 폭소하기도 하면서 레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중에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다들 재미있는 녀석들이거든요.”

“하하핫! 꼭 그리해 주게.”

중간 마을에서 서신을 작성했다.

먼저 덱스에게 보내는 편지.

수도에 바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저것 부탁할 게 많다.

일단 곧 수도에 도착할 가족에 대한 것이 첫째였고, 이후에 무무카와 함께 바이스만으로 와 달라고 했다.

영지 상황을 모르니 지오르에게 돈을 좀 받아 오라는 내용까지.

지오르에게도 가족을 잘 부탁하는 서신을 따로 보냈다.

집도 구했고 당장 들어가 살 준비도 마쳤으니 새로운 생활에 적응만 좀 도와 달라는 내용.

또한 밀을 비롯한 곡물 가격이 급등할 것 같다는 언질도 잊지 않았다.

대놓고 전쟁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눈치 빠른 지오르라면 행간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으리라.

황궁을 출발한 지 열흘째, 드디어 반다이트령에 진입했다.

“여기부터 반다이트령이지. 내 영지에 온 걸 환영하네.”

병사 무리가 마차를 호위하기 위해 마중 나와 있었다.

그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기사 멜핀이다.

“멜핀 경, 그간 별일 없었는가?”

“예, 그렇습니다. 성까지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손님이 함께 왔으니 미리 기별을 넣게.”

“안녕하세요.”

레오도 창 너머 스윽 얼굴을 보였다.

멜핀도 반가운 기색을 했다.

“도련님, 소드 마스터가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는 도련님이 아니라네. 바이스만 남작이라 칭하게.”

“앗! 실례했습니다, 남작님!”

백작과 멜핀의 대화를 듣던 레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거 지금 놀리는 거죠?”

“하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아오, 간질간질해 죽겠네.”

레오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적응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멜핀의 지휘 아래 병사들은 마차를 호위하며 나아갔다.

무기를 든 자세, 걸음걸이만 봐도 절도 있는 모습. 잘 훈련된 병사들이다.

“저쪽에 산이 보이는가?”

“예, 시오프 산맥의 줄기 같네요.”

“맞네. 저 너머가 자네의 영지인 바이스만이지.”

“오호….”

“이제 생각하니 미안한 짓을 한 것 같군. 본인 영지에 가장 먼저 가 보고 싶었을 텐데.”

“아니 그걸 이제 아신 겁니까?”

“좀 봐주게, 하하핫.”

열흘 간 함께 지내면서 꽤 스스럼없이 대할 정도가 됐다.

본래 백작과 남작이라는 작위의 차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대화였지만, 백작이 레오를 자신과 대등한 이로 인정했기에 가능했다.

‘내 영지라….’

레오는 바이스만령이 있다는 쪽에 시선을 둔 채 생각에 잠겼다.

당장 가 보고 싶을 정도로 궁금했지만 지금은 전쟁 대비가 먼저다.

전쟁 발발 자체를 막는 것이 최선.

차선은 확실히 대비하여 보르트의 예봉을 꺾고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는 것.

반다이트 성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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