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64화 (64/127)

64. 바람과 불꽃 (6)

“조루냐?”

클라인의 오러 블레이드를 본 레오는 짧은 감상평을 뱉었다.

화끈하게 불타올랐다가 금방 사그라들고 만 불꽃이었기에.

“그게 무슨 뜻?”

클라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열 받는 뉘앙스의 단어였기에.

“얼굴 펴, 인마. 금방 싸… 아니, 빨리 끝난다고.”

“으음… 어쩐지 욕 같았는데….”

묘하게 자존심을 긁힌 기분인데 뭐라 정확히 화낼 수 없어 찝찝한 기분.

그 애매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레오도 픽 웃음이 났다.

‘순진한 새끼.’

클라인의 순수함은 제쳐 두고, 녀석의 오러 블레이드는 채 30초를 채우지 못했다.

아마 전력으로 불꽃을 태우면 그 절반도 버티지 못하겠지.

원인은 간단하다.

보유한 오러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클라인이 오러 연공을 한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5년 내외일 것이다. 그러니 오러 블레이드를 충분히 보일 연료가 부족한 것이 당연하다.

제아무리 날고뛰는 천재라도 시간을 이겨 낼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길게 유지 못 하는 건 너도 마찬가지 아냐?”

여전히 풀리지 않은 얼굴로 되묻는 클라인.

오러 부족이 문제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마치 본인은 아니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라니….

레오 녀석이 말보다 오러를 먼저 깨우친 돌연변이가 아닌 이상 둘의 오러는 도긴개긴이어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것이 맞다.

포렌티아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후후훗, 내 건 강력하고 아주 오래 가지. 밤새도록 써도 지치지 않는다고.”

만면의 미소를 띠는 레오.

“뭔 소리야?”

“난 너 같은 조루가 아니라고, 인마.”

레오가 허리춤을 추켜올리자 그제야 눈치챈 클라인.

허연 얼굴이 금방 제 머리카락처럼 붉어졌다.

“이, 이게 자꾸 딴소리하고 있어!”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반다이트에서 손님 대접을 어떻게 하나 한번 볼까?”

툭툭.

씩씩거리는 클라인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몸을 돌려 수련장을 빠져나가는 레오.

그 뒷모습에 자신감이 넘친다.

“왜 자꾸 말을 돌려? 그러니까 네 오러 블레이드는 더 오래 간다고?”

“당연한 걸 자꾸 물어보고 그러냐. 아주 길고 오래 갑니다~!”

“왜?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허, 그렇게 질척대는 남자는 인기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드는 레오.

“야! 제대로 말하고 가!”

빽 소리를 지르는 클라인에게 레오는 등 뒤로 손을 흔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 * *

저녁식사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클라인의 성취에 성 전체가 들떴다. 기사와 병사들은 물론 시종들까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반다이트 백작은 말할 것도 없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연신 포도주를 들이켜고는 불콰해진 얼굴로 침소로 향했다.

그리고 밤늦게 다시 찾은 수련장.

“왜 또 오자고 했는데.”

불통한 클라인의 목소리.

레오는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주섬주섬 포렌티아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먹어라. 자신감을 찾아 주는 영약이니까.”

“이게 뭔데?”

“잔말 말고 먹어.”

레오는 클라인의 입에 포렌티아를 쑤셔 넣었고.

꿀꺽.

저항할 새도 없이 받아먹은 클라인은 입속에서 녹아내린 포렌티아를 저도 모르게 삼켰다.

몸속에서 폭발하듯 솟아나는 마나.

클라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러홀에 때려 박습니다, 실시.”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한 클라인은 잽싸게 자리를 잡고 앉아 오러 연공을 시작했다.

그저 몸속에 터져 나오는 마나를 오러홀에 밀어 넣는 단순한 작업이지만, 최대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한순간도 한눈팔 수 없다.

수 시간 후.

땀에 흠뻑 젖은 클라인이 눈을 떴다.

“레오…?”

“어, 다 했냐?”

겸사겸사 옆에서 함께 연공 중이던 레오.

오러안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오러홀은 한층 크고 단단해졌다.

“내가 먹은 게 도대체 뭐야? 이런 영약은 듣도 보도 못했어.”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제국 최고 무가의 후계자인 클라인은 어려서부터 좋다는 영약을 여럿 접했다.

대부분 단기적으로 마나 감응도를 높이는 효과였을 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영약이라 해도 결국 오러 연공의 효율을 높이는 것에 그쳤다.

그런데 이건….

엄청나게 농축된 마나 그 자체를 몸속에 풀어 놓은 기분이다.

요 몇 시간 동안 쌓은 오러가 지금껏 쌓아 놓은 것의 족히 몇 배는 되었다.

“죽이지? 딱 한 번밖에 효과를 못 본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레오는 얼떨떨한 클라인의 얼굴이 재미있어 웃음이 났다.

저 느낌 아주 잘 알지. 그저 황당할 거다.

“운 좋게 구한 거다.”

“아니….”

“아, 나는 진작 먹었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클라인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엄청난 영약이라는 것도, 두 번 섭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왜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내준 거지?

“레오,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냐?”

얼굴색을 바꾼 클라인이 진지하게 물었다.

조건 없는 선물에도 그 정도가 있다. 이건 선의만으로 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돈으로도 구할 수 없는 영약, 당연히 원하는 조건이 있을 테지.

“있지. 아무렴 내가 맨입으로 줬을까.”

“…말해 봐. 값은 치를 테니까.”

클라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영약의 가치를 체감한 이상, 그 요구가 보통이 아닐 것이라 예감했다.

금전을 요구할 생각일까?

긴장됐다. 금전이라면 오히려 간단한 축이다. 어쩌면 더 까다로운… 가문이 보유한 사업권 같은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제국의 100주년 기념식이 석 달 정도 남았지?”

“…그렇지.”

“그때까지 여기 머물러라.”

레오는 얼굴에서 장난기를 거두었다.

기념식은 아카데미의 후반기 일정이 시작되고 약 한 달 후 시점. 회귀 전에는 이때 보르트 왕국의 기습적인 침공이 일어났고, 반다이트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반다이트 백작을 설득할 명분이 부족해.’

아무리 고민해도 황궁 기념식 행사에 참석할 반다이트 백작을 여기 눌러 앉힐 자신이 없었다. 보르트 침공에 대한 마땅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클라인이라면 다르다.

그저 아카데미 후반기 일정에 조금 늦게 참여하는 것 정도는 썩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해 줄 수 있지?”

“…그게 전부야?”

“어.”

시원하게 끄덕이는 레오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클라인이다.

고작 후반기 수업을 좀 땡땡이치라는 게 요구 사항이라고? 막대한 금전이나 사업권 같은 까다로운 요구까지도 상상했던 것이 허무할 정도다.

“레오, 그 이유도 말해 줄 수 있겠지?”

“그래, 하지만 네가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뭔데 그래? 최대한 믿으려 노력해 볼게. 아니 믿지 않을 수가 없잖아? 이런 영약을 주면서 농담이나 하려는 건 아닐 테니 말이야.”

진지한 클라인의 얼굴.

레오는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었다.

“기념식을 기점으로 보르트 왕국이 침공해 올 가능성이 있어.”

“…뭐라고?”

“당연히 반다이트가 지키는 국경 쪽을 넘겠지. 꽤 높은 확률이라고 생각한다. 정보 출처는 말하지 못하는 점 이해해라.”

혼란으로 물든 클라인의 눈동자.

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보도 증거도 불확실해. 하지만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면 구심점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서 백작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어. 그래서 네게 부탁하는 거다. 네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국경을 지킬 수 있어.”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요구한 내용은 그저 반다이트령에 머물러 달라는 것, 나머지는 클라인에게 맡길 뿐이다.

녀석의 성격이라면 이 말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분명 준비할 것이고 그러면 무력하게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클라인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최근 보고에도 국경에 특이한 움직임은 없었어. 보르트 왕국과 분위기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다가올 기념식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겠다며 우호를 과시하고 있지.”

반박이라기보다 상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정보를 교차 검증한다는 느낌.

“네 말대로 전쟁이 일어난다고 치자. 나와 아버지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국경을 지키는 기사와 병사들이 있어. 아무리 기습이라 해도 그들이 쉽게 패퇴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겠지.”

“무슨 말이야?”

“지금껏 숨죽이고 있던 놈들이 싸움을 건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거 아니겠냐?”

반다이트가 지키는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곧 소드 마스터에 대한 도전.

그 의미는….

“…보르트가 소드 마스터를 보유했다?”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미 미래를 경험한 레오였지만 지금 답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였다.

보르트에서 꽁꽁 숨기고 있는 존재를 미리 알고 있다 말하기도 어려웠으니.

“무슨 말인지 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

“그래, 그거면 됐어.”

레오가 일어섰다.

옆에서 졸고 있던 슈니도 벌떡 일어난다.

“늦었다. 이만 자러 간다.”

“…그래.”

방으로 돌아온 클라인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금 가치의 영약까지 내주며 하는 요구.

그것이 혹시 모를 보르트의 기습에 대비해 달라는 것이라니.

설사 전쟁이 난다 해도 가장 타격을 입는 곳은 반다이트다.

그리 생각하면 그는 순수하게 이 충고를 위해서 영약을 내준 것이다.

‘그릇이 다르구나….’

금전을 요구하면 얼마나 줘야 할까, 가문의 이권은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그따위 것을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 * *

레오는 일주일 정도 반다이트 성에 더 머물렀으며 대부분 수련장에서 클라인과 검을 주고받았다.

그간 때때로 하늘로 솟아나는 돌풍과 화염은 성 밖의 영지민을 놀라게 했다.

“아이고, 저게 다 뭐야? 하늘로 불이 올라가고 있잖아?”

“자네 아직 몰랐나? 우리 공자님이 소드 마스터가 되셨다는구먼. 저것이 그 오라 부레이도인가 하는 그거라고.”

“아니, 그러면 백작님이 검으로 불을 쏜다는 것이 참말이란 말이야?”

“참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백작님이 제국 넘버 원 아닌가!”

동요했던 영지민들도 그것이 클라인 공자의 검기라는 것에 안심했고, 그만큼 강한 힘에 보호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일주일 후.

“이만 간다. 나중에 초대할 테니까 놀러 오고.”

“그래, 아마 한동안 바쁠 거다.”

클라인의 배웅을 뒤로 하고 레오가 말에 올랐다.

옆에 달아 놓은 주머니에는 슈니가 폭 들어가 있다.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면 바이스만까지 한나절이다.

이제야 제 영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 * *

아카데미 전반기 일정의 마지막 날.

정문 인근에 아침 일찍부터 수십 대의 마차가 빽빽이 세워져 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본가로 돌아가려는 이들을 위한 마차였다.

휴식기에도 기숙사를 사용할 수 있지만 굳이 남으려 하는 생도는 거의 없다.

지난 마물 사건 이후 아카데미 곳곳에 아직 흉물스러운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기숙사에 돌아온 덱스도 짐을 챙겼다.

바이스만으로 와 달라는 레오의 요청. 내일 아침 일찍 무무카와 함께 떠날 예정이다.

“짐은 이 정도면 되겠지?”

지팡이와 움직이기 편한 옷 그리고 비상약과 간단한 육포.

지오르에게 이야기하니 마차를 수배해 줬다. 바이스만까지 내내 마차로 움직인다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레오가 부탁한 돈은 지오르가 어음으로 내줬다.

50골드라는 거액 어음을 받고 손을 덜덜 떨었지만, 레오 본인이 아니면 현금으로 교환할 수 없는 증서라고 하니 좀 안심이 됐다.

‘남작이라니…. 허헛, 참.’

출세한 친구를 생각하니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귀족이라고?

거기다가 제 영지가 있다고?

…이제 남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아, 그건 좀….”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았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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