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67화 (67/127)

67. 바이스만의 신임 영주 (3)

바이스만의 영주 대리 굴트.

그는 벌써 이십 년 넘게 바이스만에서 영주와 같은 권세를 휘둘렀다.

보름 전, 바이스만이 어느 남작의 봉토로 정해졌다는 중앙 전령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아쉬움도 컸지만 반대로 후련함도 있었다.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다. 지금껏 축적한 재산으로 여생을 편안하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

이제 남은 것은 신임 영주에게 ‘무사히’ 바이스만을 넘기는 일.

무엇보다 좋은 첫인상이 중요하다.

사용인과 병사들을 닦달해 매일 청소 상태를 점검하고 정원에 새로이 꽃과 나무를 심었다.

연무장의 돌을 줍고 배수로를 정비했다.

덩치 좋은 병사들을 따로 추려 번쩍번쩍한 새 무장을 주었다.

신임 영주가 언제 도착하더라도 최고의 상태에서 맞이하기 위함이다.

“오늘도 소식이 없느냐? 아직도?”

그렇게 신임 영주를 기다렸지만 며칠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성문의 출입 인원을 확인시켰다. 영주가 출입하면 자연히 보고가 올라올 터임에도 조바심에 몇 번이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 오셨습니다! 신임 영주님께서 남쪽 성문을 지나셨다고 합니다!”

“오오오! 그래?”

얼마나 기다렸던 소식인가!

굴트는 비대한 몸을 튕겨 내듯 일으켰다.

시간이 없다. 말을 탄 영주라면 내성까지 금방 도달할 터.

“병사를 사열시켜! 목욕물과 다과를 준비해라! 저녁 만찬도 준비시키고!”

재빨리 밖으로 뛰쳐나가며 명을 내렸다

그간 수없이 연습시킨 덕에 엄선된 백 명의 병사들이 재빨리 대오를 갖추었다. 미리 준비한 대로 모두 번쩍번쩍한 무장이다.

곧 그들 앞으로 말을 탄 신임 영주가 도착했다.

쿵! 쿵! 쿵!

양쪽으로 늘어선 병사들이 창끝으로 땅을 찍으며 절도 있게 환영을 표했다.

‘음, 좋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분위기.

굴트는 이 정도면 충분히 어린 영주도 감격하리라 여겼다.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레오가 천천히 도열한 병사들의 사이를 지났다.

안장에 달린 전용 가죽 가방에서 졸고 있던 슈니가 고개를 빼 들고 사방을 훑었다.

이윽고 레오의 말이 굴트의 앞에 섰다.

척!

굴트가 손짓하자 병사들이 동시에 창을 멈춘다.

“영주 대리 굴트가 바이스만의 새 주인께 인사 올립니다.”

고요함 속에 굴트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말 위에 올라 있는 신임 영주는 아카데미의 생도라는 소문대로 앳된 얼굴이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의 무력을 가졌다 해도 자신은 수십 년의 연륜이 있다. 하늘 높이 띄워 주고 사정없이 금칠해 주면 정신을 못 차릴 것이 분명하다.

“레오 바이스만이다. 환영이 번잡하군.”

레오는 병사들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하나같이 번쩍거리기만 하지, 실용적이지 못하다. 가슴에 철판만 하나 붙여 놓은 듯한 저 무장은 도대체 뭐지?

“바이스만의 새 주인을 가벼이 맞이할 수 없어 제 나름대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번잡하였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사죄를 청하는 굴트.

레오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고는 말에서 내렸다.

“안쪽으로 드시지요. 목욕물을 준비하였으니 여독부터 푸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지.”

폴짝.

말에서 뛰어내린 조그만 동물이 잽싸게 신임 영주의 뒤에 따라붙었다.

부동자세를 취한 병사들의 눈동자가 죄다 그 하얀 엉덩이로 향했다.

* * *

바이스만의 영주성은 수백 년 역사를 지닌 반다이트의 것에 비하면 꽤나 단출했다.

하나의 탑 같은 간단한 구조로, 아래층은 사용인들의 방과 창고 등이었고 중간층에 식당과 회의실이 있었다. 영주의 침실은 꼭대기였다.

레오는 꼭대기 층 한쪽에 위치한 큰 욕탕에서 몸을 풀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기에 사람을 붙여 몸을 씻긴다는 것을 한사코 만류했다.

‘확실히 메프람이나 반다이트에 비할 바는 아니군.’

바이스만에 대한 첫인상은 썩 좋지 않다.

먼저 도시를 두른 성벽은, 성벽인지 돌담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남작령이라는 것을 두고 생각하면 이 정도가 평균인지 모르겠으나 제국의 수도 메프람이나 국경의 요새 도시 반다이트 때문에 자연히 눈이 높아져 버린 탓이다.

문을 지키던 위병은 거의 서서 졸다시피 했고 거리에도 활기가 부족하다. 치안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영지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인상이었다.

“구린 녀석들부터 싹 쳐 내야겠다, 그치?”

캉-!

탕 옆에서 물장구를 치던 슈니가 동의한다는 듯 짖었다.

벽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반인은 알아차릴 수 없는 정도지만 소드 마스터가 된 후 몇 배나 예민해진 레오의 감각을 피할 순 없었다.

가만히 감각을 귀에 집중시키자 벽 너머 말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정원 상태는 확인했나? 물은 뿌렸고? 뭐, 어제 물을 줬다고? 이 머저리 같은 놈아! 물을 주는 게 아니라 뿌렸냐고! 꽃잎이 촉촉해 보여야 할 것 아니냐!]

굴트의 목소리.

목욕물을 포함해 이것저것 준비한 모양이다. 글쎄, 정원이나 꽃 같은 건 별 관심 없는데….

[장부는 제대로 준비했겠지? 창고 관리인을 불러와, 다시 한번 교육시켜야겠어.]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제 목을 조를 정보가 술술 나온다.

장부는 아마 이중장부를 말하는 것일 테지.

이십 년이나 착복했으면 당연히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만들어 놓았을 거다.

[영주는 아직도 목욕 중인가? 누가 시중을 들고 있지? 뭐, 혼자라고? 이 모자란 놈아, 영주가 거절해도 밀어 넣었어야 할 거 아냐! 혼을 쏙 빼라고 하지 않았냐!]

굴트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슬슬 목욕을 마친 레오가 탕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있는데, 끼이익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섰다.

복장을 보니 성 내의 메이드다.

“영주님, 갈아입을 옷을 가져왔습니다.”

“거기 두고 가.”

“제, 제가 입혀 드리겠습니다.”

“두고 가라니까.”

레오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젊은 메이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울 것 같은 얼굴이다.

“됐다. 그냥 들어와.”

아마 욕탕에서 시중을 들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다. 당연히 그냥 옷이나 입히라는 시중은 아닐 것이고.

건강한 남자로서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새 옷을 가지런히 옆에 두더니 자기 옷을 벗으려 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내 옷이나 가져와.”

“읏… 네에….”

얌전히 옷을 입히는 메이드의 손길이 꽤 어색하다.

몸에 제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는데, 오히려 가만히 있는 레오가 더 신경 쓰일 정도였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블레아라고 해요, 스물둘입니다.”

“원래 뭐 했냐? 사용인 일에 익숙하지 않아 보이는데.”

“죄, 죄송합니다. 제가 미숙하여 영주님의 심기를….”

“혼내는 거 아냐. 그냥 물어보는 거다.”

“…작년까지 상회에서 일했습니다. 아버지의 밑에서 회계를 배우고 있었어요.”

레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회의 딸이었다고?

“그런데 왜 사용인 일을 하고 있지?”

집사든 메이드든 영주성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모두 고용 계약을 맺고 일하는 이들이다.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는 하층민에게 영주성 메이드는 꽤 괜찮은 직장이지만, 상회에서 회계까지 배우던 친구가 할 만한 일은 아니다.

“…….”

“괜찮으니 말해.”

“…빚을 갚지 못해 그렇게 되었습니다.”

“빚이라고?”

레오의 인상이 구겨졌다.

싸늘한 분위기에 블레아는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말해라.”

레오는 덜덜 떠는 블레아의 턱을 잡아 치켜올렸다.

그제야 블레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붉은빛이 도는 머리칼, 짙은 암녹색 눈동자. 잔뜩 겁먹어 파르르 떠는 속눈썹이 꼭 사냥꾼에게 잡힌 사슴 같다.

“아, 아버지는 바이스만 토박이셨어요. 평생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나름대로 기반을 만드셨고요. 그런데 어느 날 영주 대리님의 호출이 있었어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영주 대리 굴트는 블레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갈리아 상회에 다양한 납품 계약을 종용했다.

얼마 이득도 없는 데다 언제나 대금 지급이 늦어 돈이 묶이는 거래. 상회 입장에서는 득보다 실이 많았지만 영주 대리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거래 요청이 늘수록 묶이는 돈은 점점 늘었고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 급기야 자금 순환을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 닥쳤다.

“…우량 거래처를 점점 빼앗겼어요. 악순환이었죠. 이러다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는 영주 대리님을 찾아가 사정했어요.”

거래를 줄여 달라 사정했지만 굴트는 한술 더 떠 돈을 빌려줄 대금업자를 소개했다. 알고 보니 그 대금업자 또한 굴트와 한패였고, 결국 상회는 파산했다.

“지금 그 말을 입증할 증거가 있느냐?”

“당시의 계약서들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네가 여기서 일하는 것 또한 계약으로 묶여 있겠지. 그 계약서는 굴트에게 있나?”

“…그렇습니다, 영주님.”

노예 제도는 사라졌지만, 부당한 노동 계약으로 묶여 있다면 결국 노예나 마찬가지다.

당연히 제국에서도 금기하는 일.

“알았다, 이만 나가 봐. 굴트에게는 적당히 둘러대고.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장사꾼의 딸이니 그 정도 눈치는 있다.

깊이 허리를 숙이고 돌아선 블레아는 문을 나서기 전 상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쳤다.

레오는 슈니의 물기까지 닦고 나서야 밖으로 나섰다.

“영주님, 피로는 좀 풀리셨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정원에서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심혈을 기울여 가꾼 정원이니 꽤 마음에 드실 겁니다.”

“목욕 후에 차 한잔이라…. 그거 좋지.”

흔쾌히 따라나서는 레오.

반걸음 뒤에서 따르며, 굴트는 슬쩍 레오의 얼굴을 확인했다.

뽀얀 얼굴에는 아직 발갛게 상기된 흔적이 남아 있다.

목욕이든 시중이든 마음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고년이 제대로 알랑거린 모양이군.’

정원에는 화려한 꽃이 만발해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그의 말대로 꽤나 신경 써서 가꾼 티가 났다.

“이거 정말 아름답군! 이렇게 알차게 꾸민 정원은 처음이야.”

“과찬이십니다, 하하하핫!”

과장되게 정원을 칭찬하니 굴트의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이어서 몇 마디 부드럽게 말을 던져 주자 기분이 좋아진 굴트의 입이 쉴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호….”

“그렇군.”

“저런, 저런.”

적당한 추임새를 돌려 가며 맞장구쳐 주자 더욱 신이 나서 떠드는 굴트.

레오는 그 속에서 써먹을 만한 정보를 골라 취합했다.

다음 날에도 레오는 굴트가 제안하는 일정대로 움직였다.

오전에는 시내 곳곳을 안내받고 오후에는 성 밖의 촌락과 농경지를 돌았다.

“바이스만이 자랑하는 밀밭입니다. 수량은 적지만 제국 최고로 치는 베니에르의 밀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품질이지요.”

바이스만도 제국에서 손꼽는 품질의 밀 경작지로 유명하다.

석양이 밀과 보리밭을 물들이자 붉은 파도가 넘실대는 듯했다.

한차례 성밖을 둘러보다가 영주성으로 돌아가니 어제 없던 분주함이 가득하다.

“무슨 소란이냐?”

굴트가 날카롭게 물었다.

줄곧 영주에게 좋은 인상을 심었는데 괜스레 불안했다.

지나가던 병사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누벨 님이 초주검이 되어 돌아오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감히 누가 세금 징수관을 건드렸다는 말이야? 호위병들은 무얼 하고!”

조카 누벨이 초주검이 되었다는 말에 굴트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냈다.

“죄송합니다, 영주 대리님,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징수관은 지금 어디 있느냐?”

“병사들과 함께 저 안쪽으로….”

흥분한 굴트는 영주를 뒤에 두고 쿵쿵거리며 뛰어 들어갔다.

세금 징수관 누벨, 자식을 보지 못한 굴트가 아들처럼 아끼는 조카. 그러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벨! 이게 무슨 일이냐?”

누벨을 발견한 굴트는 비명을 질렀다. 사랑하는 조카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자그마한 수레 위에 태워진 누벨은 얼마나 두드려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무엇보다 한쪽 팔이 있어야 할 자리가 휑하였으며 거기에는 더러운 천만이 감겨 있었다.

굴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누구냐! 어떤 놈이 내 조카를…!”

“십인장 발트란! 지금 도착하였습니다!”

발트란의 군기 가득한 목소리.

굴트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불같은 분노가 그대로 쏘아졌다.

“네 이놈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호위해야 할 징수관이 이 모양이 됐는데 어떻게 너희들은 멀쩡하단 말이냐!”

“…….”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라! 이 밥버러지 같은 것들아!”

발트란을 비롯한 병사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굴트는 문득 그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했다. 아직 목숨은 붙어 있겠지?”

등 뒤에서 들리는 신임 영주의 목소리.

그제야 굴트는 누벨을 이렇게 만든 자가 영주라는 것을 알았다.

“영주님께서 세금 징수관을 이리 만들었습니까? 징수관 또한 제국 중앙의 관리입니다! 이리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치밀어 오른 분노가 어린 영주의 비위를 맞추던 가면을 벗겼다.

어금니를 악문 그의 목소리가 어두운 성 내에 차갑게 울렸고, 그 얼음장 같은 한기에 십인장과 병사들마저 흠칫 떨었다.

하지만 레오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다.

석양 아래 밀밭을 보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굴트.”

온화한 목소리.

그와 함께 레오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굴트에게 다가갔다.

이윽고 코앞까지 접근하더니 그의 귓가에 얼굴을 더욱 가까이 붙인다.

“너도 곧 저렇게 될 테니까.”

영주의 속삭임에 굴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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