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바이스만의 신임 영주 (4)
레오는 위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세금 징수관 누벨은 영지의 세금을 과다 징수하고 이를 착복하며 사리사욕을 채웠다. 또한 무고한 영지민을 도적으로 몰아 겁박하기까지 하였다. 나를 포함하여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이가 수십에 달하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굴트는 이를 악물었다.
누벨의 착복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영지민을 도적으로 겁박해?
게다가 그 장면을 영주에게 들켜?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굴트! 이에 대한 적절한 형벌은 무엇인가?”
“…세금 착복은 교수형입니다.”
찢어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한 굴트.
자식처럼 여긴 조카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또한 영지 대리인 굴트의 착복도 의심되는바, 지금부터 그것을 확인하겠다!”
“여, 영주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굴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조카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제 살길부터 찾아야 했다.
“발트란! 굴트를 묶어라. 군량 창고로 간다!”
* * *
군량 창고 앞에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영주 레오와 발트란을 포함한 병사들, 그리고 결박당해 꿇어앉은 굴트와 불안한 얼굴의 창고 관리인이었다.
“창고 관리인, 이 장부에 적힌 내용이 틀림없나?”
“그, 그렇습니다요.”
결박당한 굴트를 본 순간부터 창고 관리인은 벌벌 떨기 시작했다.
장부에 적힌 숫자는 보리와 호밀 각 50자루.
“억울합니다! 영주 대리로서 세금 징수관의 비리를 막지 못한 것은 인정하오나 그 이상의 죄를 묻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굴트, 어제 내게 말했지. 이곳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말이야.”
이곳의 식량은 영지의 상비군 삼백 명의 한 달분 식량, 말 그대로 전쟁과 같은 비상시를 대비한 군량이다.
어제 굴트는 매년 수확한 햇곡식으로 군량을 관리하고 있다며 자신의 치적을 내세웠다.
레오는 창고 안에 들어섰다.
쥐를 막으려 사방을 막아 놓은 창고는 퀴퀴한 냄새가 가득했다. 한쪽에는 곡식 자루가, 반대쪽에는 건초가 쌓여 있었다.
푹-!
가까이 있던 자루를 검 끝으로 찌르자 우수수 보리알이 흘러내렸다.
“보리로군.”
“그, 그렇습니다, 올해 수확한 보리입죠.”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는 창고 관리인.
“그것 보십시오! 영주님, 저는 억울합니다!”
입구 너머 굴트는 그것 보라는 듯 억울함을 호소했다.
“슈니.”
캉!
슈니가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이리저리 킁킁 냄새를 맡는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틈을 비집고 들어가더니 다시 한번 캉캉! 짖었다.
“저 안쪽을 한번 보자.”
“영주님, 저것 또한 보리입니다. 안쪽을 확인하려면 이 앞의 자루를 모두 들어내야 하는데….”
“그래서, 지금 영주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레오가 싸늘히 명령했다.
창고 관리인도 금방 제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조아렸다. 영주의 명령에 토를 달다니,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다만 관리인의 말처럼 최소 수십 개의 곡물 자루를 바깥으로 꺼내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자루 하나는 장정 둘이 달라붙어야 할 무게인 데다가 움직일 공간도 좁았다. 병사들이 달라붙었지만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
“다들 비켜.”
보다 못한 레오가 직접 나섰다.
사람들을 전부 비켜서게 하고 본인 몸통만 한 곡물 자루를 끄집어 밖으로 내던졌다.
한 손으로 한 자루씩 잡아 던지는데, 곡물 자루 두어 개가 동시에 공중을 날았다.
쿵! 쿵!
밖에 쌓여 가는 둔탁한 충격음.
순식간에 서른이 넘는 자루가 입구 앞에 쌓였다.
괴력을 발휘하는 영주의 모습에 둘이서 한 자루를 들고 낑낑대던 병사들은 말을 잃었다.
“이 정도인가?”
손을 턴 레오는 다시 검 끝으로 자루를 찔렀다.
모두 안쪽 깊숙이 쌓여 있던 것들.
푹. 푹. 푹. 푹. 푹.
사아아아-!
보리도 호밀도 아니다.
자루 전부에서 똑같이 흙과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발트란! 군수물자를 횡령한 죄목은 뭔가?”
“전시에는 참형! 평시에는 교수형입니다!”
“그렇다는군. 더 할 말이 있나?”
레오와 눈을 마주친 굴트가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이대로는 교수형 확정일 테니.
“여, 영주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창고 관리인, 모두 창고 관리인의 책임입니다!”
“어제는 분명 네가 직접 관리한다 하지 않았나?”
“아래 것들이 작정하고 속이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는 평생 재물에 욕심을 부린 적이 없습니다. 빈 몸으로 이곳에 부임하여 이십 년간 오직 영지만을 위해 일했습니다!”
끝까지 억울함을 주장하는 굴트.
교수형만큼은 피하겠다는 몸부림이었다.
“주, 죽여 주십시오, 영주님. 전부 제가 한 짓입니다.”
그 와중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는 창고 관리인.
레오의 무감정한 시선이 그 둘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발트란에게 향했다.
“발트란! 굴트의 가산을 압류할 것을 명한다! 빈 몸으로 와서 일만 했다고 했지? 영주 대리의 녹봉이야 뻔하니, 모아 놓은 재산을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군.”
“아아아…!”
사형과 진배없는 선고.
굴트의 몸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 * *
발트란이 압류해 온 굴트의 재산은 상상 이상이었다.
특히 금화만으로 꽉꽉 들어찬 작은 상자가 나왔을 때는 레오도 말이 안 나올 지경.
상자 안에는 정확히 금화 200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200골드라니, 영지 1년 예산의 2할이 넘는 금액이다.
그와 함께 갖가지 계약서도 발견됐는데, 영주성과 굴트의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들과의 부당 계약서와 블레아의 상회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창고 관리인도 놈에게 약점을 잡혀 있었군.”
그렇다고 창고 관리인 또한 마냥 피해자는 아니었다. 다만 굴트의 압력을 어느 정도 정상 참작해 적당한 선으로 죄를 감면해 줬다.
굴트와 누벨은 지하감옥에 가두었다. 제국 중앙에 보고서를 올린 후 교수형을 집행할 예정이다.
영주성에서 일하는 이들과는 새로운 고용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성을 떠나길 원하는 이가 대략 3할이었고, 나머지는 계속 일하고 싶어 했기에 적절한 임금으로 다시 계약을 맺기로 했다.
레오는 한 명씩 그들과 만나 직접 고용 계약을 맺었다. 집사와 하녀장이 모두 그만뒀기 때문에 앞으로 함께 할 사용인들의 얼굴도 익힐 겸, 겸사겸사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마지막 인물이 들어섰다.
힘없이 들어온 블레아가 레오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는다.
“사용인으로 계속 일하고 싶다고?”
조금 의외였다.
블레아는 굴트에게 인생이 망가진 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당장 이곳을 떠나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고, 갈리아 상회도 진작 산산이 분해됐어요. 제게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남고 싶다고?”
블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기를 잃어 탁해진 그녀의 눈동자에 레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욕실에서 처음 봤을 때가 더 활기차 보였을 정도다.
살아갈 이유를 잃은 자의 전형적인 눈동자.
때로는 증오도 삶의 원동력이 된다. 굴트가 죗값을 치르게 된 이상 이제 그녀를 움직일 것이 남지 않게 된 것이다.
“미안하지만 실력 없는 사용인을 둘 정도로 난 여유롭지 못해.”
“…예?”
레오의 거부에 깜짝 놀라는 블레아.
당연한 반응이다. 앞서 남고 싶다는 사용인들은 모두 좋은 조건으로 받아 주었으니까.
“왜 놀라지? 내가 너를 반드시 고용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
뭐라 대꾸하려던 블레아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그제야 제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치맛자락을 말아 쥔다. 금방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른다.
그래도 있는 힘껏 참는 건 기특하군. 우는 여자는 질색이거든.
“회계를 배웠다고 했지? 별 소질도 없는 사용인 일 말고 영지의 재무 관리나 해라.”
“예?”
놀라 고개를 드는 블레아.
“앞으로 한 달은 수습 기간이다. 한 달 동안 네가 할 일은 영지 살림에 도움이 되는 모든 방안을 고민해서 가져오는 거야. 최종 결정은 모두 내가 한다. 일하는 거 봐서 정식으로 채용할지 결정하겠다. 어떠냐?”
“감사합니다, 영주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블레아는 꾸벅 허리를 굽히고는 집무실을 떠났다.
유령같이 힘없던 방금 전보다 한결 사람 같은 눈빛이 되었다.
용병으로 떠돌며 수많은 비극을 목도했다.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전 재산을 잃은 사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난다. 닥치면 죽을 것같이 힘들겠지만 또 살아가려 하면 살아지는 것이 사람이다.
살아갈 이유를 잃어? 그러면 만들어 주지.
그게 비록 한 달짜리 수습으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한 고용 계약이라도, 제대로 작동만 하면 되는 거다.
“이왕이면 믿고 맡길 만큼 실력도 좋았으면 좋겠는데.”
당장 영지 살림살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다.
장사꾼의 딸이었다고 하니, 싹수만 보인다면 그녀를 빨리 키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은 전쟁 준비다.
보르트의 침공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병사 삼백이라….”
전부 보병, 중장보병과 장궁병의 편제다.
인구 2만이 안 되는 영지 규모를 생각하면 상비군 삼백도 적지 않은 숫자지만 전쟁을 생각하면 늘릴 필요가 있다.
마침 굴트에게 압류한 돈이 있으니 당장 이백 정도는 추가로 확충할 수 있을 터.
당장 모병부터 실시하고 병사들의 무장을 보완했다.
무겁고 번쩍거리기만 하는 병신 같은 철판은 죄다 뜯어 대장간에 넘겨 버리고 오직 실전성에 집중한 무장으로 개편했다.
그 와중에 얼씨구나 덤터기 씌우려는 대장간에 직접 쫓아가 다시 금액을 후려쳤다.
이것들이 어디서 뒤통수를 치려고….
블레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거리를 들고 들어왔다.
개중에는 당연히 레오가 파악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기에, 큰 관점에서 문제없겠다 싶으면 승인해 줬다.
그 의욕 넘치는 모습이 처음에는 기특했는데 점차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일하다 죽을 셈인 거야…? 어디까지 일을 벌여?
결국 지금까지 보고한 일들만 제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해야 했다.
병사들의 훈련 강도도 높였다.
기존 병사와 신병을 적절히 섞고 백인장과 십인장 체제를 재정비했다.
백인장은 레오가 직접 후보들과 검을 섞으며 선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십인장이었던 발트란이 백인장으로 올라섰다.
“어떻게 영지에 기사 하나가 없냐.”
그간 영주가 없었으니 기사도 없는 것이 당연했다.
여차하면 직접 지휘해도 상관없지만 그래도 믿고 맡길 지휘관 하나가 아쉬웠다.
흑마법사와 살인귀의 소굴에서 발견한 까마귀 메달도 잊지 않고 마탑에 보냈다.
원래대로라면 마탑에서 어마어마한 분석 비용을 청구할 테지만, 아카데미의 마물 발생 사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며 메퀸토에게 직접 보냈다.
뭐, 관련이 없으면 어쩔 수 없고.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을 보내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영주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군데?”
“황립 아카데미의 친구분들이라고 합니다. 두 분이 방문하셨는데 한 분은 웨어울프….”
“당장 응접실로 맞이해.”
레오는 며칠간 붙어 있던 집무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맞아, 오라고 했었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달음에 응접실로 달려 내려가니 익숙한 녀석들이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다.
“얘들아!”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던 덱스와 무무카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그간 갑갑했는지 이제야 좀 숨이 트인다는 표정이다.
“오! 네가 진짜 영주님이야?”
“흐흐흐, 그렇게 됐다.”
“거기다가 귀족이고?”
“그래, 자그마치 소드 마스터로 딴 남작이라 이거야.”
“흐아아… 보고도 믿기지가 않네.”
보자마자 야단법석을 떠는 덱스와 달리 가만히 보고 있던 무무카가 무겁게 입을 뗐다.
“으음.”
“왜 그래? 뭔 일 있냐?”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영주님이라고 하면 되나?”
“지랄… 하던 대로 해. 닭살 돋게 왜 이래?”
레오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며칠 간 영주 행세에 꽤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막상 친구들 입에서 그 소리를 들으니 소름이 끼쳤다.
“우리끼리야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 있는 곳에서 영주를 막 대할 순 없지 않나. 통치하는 자는 격에 맞는 위엄이 필요하다.”
“그건 무무카 말이 맞는 것 같네. 좋아, 지금부터 영주님으로 대접해 드리지. 크흐음, 레오 바이스만? 영주님?”
“미친놈, 누가 영주 이름을 풀 네임으로 부르냐? 너 다른 데서 그랬다가는 목 떨어진다.”
“목을 붙여 줘서 고맙습니다, 영주님.”
“나도 고맙소, 영주 어른.”
“그만해, 이 새끼들아!”
결국 웃음이 터져 셋 다 배를 잡고 웃었다.
그간 영주랍시고 무게를 잡고 있다가 친구들과 편하게 낄낄대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아카데미는 어떻게 할 거야? 후반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아, 그거….”
레오는 입술을 일자로 굳히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들이 있으면 훨씬 든든하겠지.
“아카데미는 나중에 생각하고. 둘 다 온 김에 나 좀 도와줘라.”
“어? 상관없긴 한데.”
“뭐든 돕지.”
얼떨결에 대답하는 둘을 보며 레오가 씨익 웃었다.
웬만한 기사는 반으로 접을 만한 실력 좋은 전사와 전도 유명한 마법사가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까.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