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침공 (2)
‘시간 싸움이다.’
이백의 병력과 함께 귀슈 백작이 이끄는 침공군을 맞은 클라인은 애써 굳은 표정을 숨겼다.
총 칠백의 병력을 이백씩 셋으로 나누고, 예비대로 일백을 두었다.
세 갈래에서 밀고 들어오는 적군에 비해 각기 3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병력이었으나, 어느 한 곳도 포기할 수 없는 노릇.
버티는 것조차 힘든 싸움이 될 것이 뻔했다.
작은 위안이라면 클라인이라는 존재가 노출되지 않았다는 것. 그러니 압도적인 힘으로 빠르게 승기를 잡고 다른 전장을 구원하러 가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양군이 대치한 국경의 초원.
섣부른 돌격으로 병력을 잃은 자카르도 백작 달리, 귀슈 백작은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정공법을 펼쳤다.
쿵. 쿵. 쿵.
중장보병을 전열로 두고, 오백의 보병이 견고한 진형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일백 창기병은 언제든 치달을 기회를 보고 있다.
활을 쏘고, 투창과 투석을 날렸음에도 견고히 접근하는 귀슈 백작의 정예병.
이윽고 어스름 속에 서로의 표정이 보일 정도로 양군이 근접했을 때.
마침내 클라인이 앞으로 나섰다.
“적 진형이 붕괴되면 돌격을 명하라.”
부관에게 전하는 짧은 명령.
혼자서 오백에 달하는 견고한 정예 보병의 진군을 부수겠다는 선언이었으나, 부관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드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으니까.
“지금 앞으로 나선 저자는 누구냐?”
삼백의 예비대와 함께 후위를 지키던 귀슈 백작이 눈을 찡그렸다.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반다이트군 앞에 나선 것은 붉은 머리칼을 가진 앳된 얼굴의 사내.
귀슈 백작을 포함하여 초원의 모든 눈동자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내가 열화(烈火)를 갈망하노니-!”
클라인의 입술에서 작고 나직한 문구가 흘렀다.
불꽃의 오러를 더욱 빠르게 실체화하기 위한 자신만의 시동어.
단전에서 폭발하듯 분출된 오러가 오른손에 움켜쥔 검으로 달려 나간다.
푸르게 응집된 기운이 서로 부딪히고 깨지며 발생된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어 발화했다.
[오러를 태운 불꽃에 그 주인의 의지가 깃드니, 대대로 반다이트가의 주인은 화룡(火龍)을 부리리라.]
화르르르륵-!
희미한 여명 아래, 어린 사령관이 피워 낸 진홍색 열기가 새벽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반다이트 방패들의 가슴속에 함께 불꽃이 일었다.
어린 주인이 용을 피워 냈다. 그 작은 등을 보이며 가장 앞에서 적을 맞이하려 한다.
그러할진대 두려울 것이 무엇이랴!
“후우- 후우-!”
병사들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창과 방패를 움켜쥔 손이 흥분으로 떨려왔다.
오직 돌격 명령만 기다리는 병사들.
전장의 공기가 일순 바뀌었다.
줄곧 냉정함을 유지했던 귀슈 백작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어째서…?”
소드 마스터 반다이트 백작은 분명 이곳에 없을 터.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란 말인가?
귀슈 백작의 짧은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클라인의 붉은 검이 움직였다.
일검(一劍).
지평선을 유영하는 화룡의 발톱에 중장보병 전열이 폭사하 듯 터져 나갔다.
오러의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하자 적군은 무기를 던지고 제 몸을 땅에 굴리기 바빴다.
이검(二劍).
무너진 전열 사이로 다시 한번 화염이 들이쳤다.
열화에 휩싸인 후열 보병들이 절규가 들불처럼 번졌고, 뜨거운 열기에 놀란 군마가 흥분해 날뛰며 곳곳에서 낙마의 비명이 터졌다.
견고했던 일천 군진(軍陣)이 단 두 번의 검에 무너졌다.
“돌격하라! 반다이트의 방패들이여!”
우와아아아아-!
부관의 명령과 함께 병사들이 들이쳤다.
그 하나하나의 기세가 마치 고삐 풀린 황소와 같았으니,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이들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귀슈 백작이 자랑하던 오백의 정예 보병이 거친 국경의 초원에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뒤늦게 통제력을 찾은 기병은 잠시 전장을 벗어난 숨을 고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단번에 적을 밀어내라!”
클라인도 함께 검을 들었다.
뭉텅이로 오러를 소진한 탓이 아랫배가 공허했다.
당장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다. 지금 잡은 승기를 승리로 굳혀야 다음 전장을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클라인의 앞에 촤아아악-! 피 보라가 일었다.
일검에 십수 명의 몸이 쪼개지며 솟구친 핏물.
반다이트의 병사들을 유린하는 붉은 검광이 번득였다.
보르트 왕국의 소드 마스터, 광검(狂劍) 카바넬. 그가 나타났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규격 이상의 오러를 느낀 클라인이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보르트 왕국이 숨기고 있던 소드 마스터의 존재.
만약 레오의 말대로 소드 마스터가 존재한다면 가장 군세가 큰 이곳에 있을 확률이 높다 생각했는데,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콰앙-!
“네 상대는 나다!”
붉은 검광 속으로 뛰어든 클라인이 카바넬의 검을 막아섰다.
두 오러의 충돌에 전장의 공기가 진동했다.
열기가 식지 않은 검과 핏물에 흠뻑 젖은 검.
교차된 두 개의 붉은 검신 너머, 광기 어린 암적색 눈동자가 클라인을 응시한다.
“비켜라, 꼬마야.”
하얗고 창백한 얼굴과 대비되는 검고 치렁한 머리칼.
퀭할 정도로 마른 얼굴, 유난히 작은 눈동자 때문에 흰자위가 도드라지는 기이한 외모의 사내.
그 목소리에는 즐거움을 방해받은 것이 무척이나 거슬린다는 불쾌한 감정이 가득했다.
“너냐? 보르트의 소드 마스터가.”
“꺼지라고 했다.”
짜증과 함께 검을 밀쳐 낸 카바넬.
짧게 검을 맞댄 순간, 클라인은 느꼈다.
기사가 아니다.
녀석은 왕국의 승리도, 본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에도 흥미가 없다.
원하는 것은 그저 살육의 쾌락.
‘기사가 아니었나.’
소드 마스터.
무(武)의 길을 걷는 수많은 이들 중 극히 일부에게 허락된 경지.
당연히 고명한 기사일 것이라는 예측은 편협했다.
카가가각- 캉-!
떼어 내려는 카바넬의 검을, 클라인은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어떻게든 놈을 잡아 놓아야 한다. 그래야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으니.
“크크큭, 제법 질기구나.”
“네 검에 긍지를 가지고 있다면 날 상대해야 할 것이다!”
“흐흐흐, 역시 애새끼들은 다 똑같군. 긍지? 그딴 건 진작에 엿 바꿔 먹었다.”
“…같은 소드 마스터라 하여 조금 기대했건만, 도살자 같은 놈이었군.”
“같은? 너와, 내가?”
처음으로 카바넬이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클라인으로서 놓칠 수 없는 기회.
“그래, 같은.”
카바넬의 입이 쭉 찢어졌다.
우월함과 열등감이 뒤섞인 기괴한 미소. 이윽고 장난스러운 기대감이 그의 눈빛에 깃들었다.
“반푼이 놈, 그 말을 후회하게 해 주마.”
화아아악-!
순식간에 발생한 핏빛 박무(薄霧)가 시야를 뒤덮었다.
팔을 뻗으면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안개.
어찌나 짙은지, 들이쉰 호흡에 딸려 온 혈향이 입속을 진득하게 맴돌았다.
“이게 뭐야! 앞이 안 보여!”
“쿨럭, 씨발 피비린내!”
“적은 어디냐!”
곳곳에서 터지는 병사들의 외침.
극도로 기감을 세운 클라인은 가만히 그 자리를 지키며 카바넬의 기척을 탐지했다.
“이래도 너와 내가 같아 보이나?”
붉은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방향은 추측할 수 있으나 거리는 분간하기 힘들다.
피아를 구별할 수 없게 된 병사들도 일순 전투를 멈추었다.
“아아악-!”
“크윽!”
곳곳에서 반다이트의 병사들의 단말마가 울렸다.
카바넬은 자신이 만든 핏빛 안개 속을 유유히 거닐며 병사의 목을 자르고 가슴을 쑤시고 있었다.
“크읏…!”
클라인은 이를 악물었다.
오러의 불꽃으로 안개 일부를 태웠으나 극히 일부다. 피아 구분이 안 되는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화염을 일으켰다가 아군마저 피해를 입게 되니까.
…무엇보다 오러가 바닥이다. 지키는 것도, 버티는 것도 한계다.
카바넬은 여전히 클라인의 주위를 맴돌며 비웃었다.
“무얼 하느냐? 네놈의 자랑스러운 그 불꽃으로 전부 태워 보지 않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고요한 전장을 울렸고.
“크학!”
“씨발, 너 같은 새끼는 우리 공자님이… 흐윽…!”
그 속에서 간간이 터지는 병사들의 단말마가 클라인의 폐부를 찔렀다.
으득.
분하게도, 카바넬의 말대로다.
심상의 실체화는 소드 마스터의 첫 단계일 뿐, 놈은 자신보다 멀찍이 높은 곳에 있었다.
“비겁한 놈! 네가 그러고도 소드 마스터라 할 수 있느냐! 나를 상대해라, 내게 검을 들이대란 말이다!”
“카하하핫! 비겁이라고 했느냐? 그것참 극찬이구나! 좀 더 외쳐 봐라, 네놈의 약함을 절절히 소리쳐 보란 말이다!”
치밀어 오는 분함에 몸이 떨렸다. 물어뜯은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소드 마스터가 되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약했다.
“뭐 하느냐? 제발 그만하라 빌지 않고,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걸 구경만 할 셈이냐? 카하하하! 결국 애새끼의 잡소리였구나. 강함이 곧 정의다! 피눈물을 흘리며 절망하거라, 크하하핫!
핏빛으로 가득한 시야가 카바넬의 광소(狂笑)로 물든 순간.
낯선 목소리가 전장을 관통했다.
“씨발놈아, 내 친구한테 뭐라 그랬냐?”
후우우우웅-!
순간, 국경의 초원에 거센 바람이 들이쳤다.
갑자기 불어온 광풍에 핏빛 안개는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말끔해진 시계 너머, 북쪽 숲을 뚫고 나타난 군대가 보였다.
정면을 응시하는 둥근 눈과 날카로운 부리, 마치 올빼미를 연상시키는 낯선 가문의 문양.
그 선두에 거대한 흰 늑대 위에 올라탄 레오가 있었다.
“네가 카바넬이냐? 얼굴도 씨발, 좆같이 생겼네.”
“뭐, 뭣!”
“머리에 붙이고 다니는 건 미역이냐? 눈깔은 일부러 그렇게 뜨는 거냐, 원래 그런 거냐? 보면 볼수록 좆 같아서 그래.”
숨 쉴 틈 없이 들이치는 외모 공격에 카바넬은 혼미해졌다.
오러로 구축한 안개가 날아가 버린 것도, 이처럼 직설적인 외모 비하도 충격이었다.
카바넬이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레오는 이끌고 온 부대에 명령했다.
“지금부터 반다이트를 구원한다! 돌격!”
“악!”
생소한 대답과 함께.
바이스만의 구원군이 초원을 달렸다.
“새끼들아! 뒈지는 새끼는 지옥에서 무한 용병 체조다!”
“악!”
으아아아아악-!
바이스만군의 돌격은 엄정한 군기로 무장된 귀족의 사병과 사뭇 달랐다.
오와 열이 흐트러져 막무가내 같았으나, 그 안에 십인 단위의 끈끈한 조직력이 엿보인다.
적을 향해 돌진하는 광기 어린 눈빛은 마치 용병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죽어라! 보르트의 개새끼들아!”
“저 새끼들 때문에! 저 새끼들 때문에!”
“지옥에나 떨어져! 거기서 영원히 쪼그려 뛰어라!”
“마지막 구호! 마지막 구호!”
부모의 원수 대하듯 증오 가득한 눈빛으로 달려드는 바이스만군.
그 위를 하얀 늑대가 날았다.
한 번의 도약으로 돌격하는 병사들 앞을 훌쩍 앞서간 늑대는, 그에 맞서는 카바넬의 붉은 검을 앞발로 쳐 내고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시, 신수(神獸)다!”
어느 병사의 외침.
전설로 구전되던 신수의 등장에 보르트의 침략군은 벌벌 떨었으며, 그 구원을 받은 반다이트 병사들은 환호했다.
“같잖은 소리 마라! 커다란 짐승 새끼일 뿐이다!”
카바넬이 악을 쓰며 쏘아 낸 핏빛 오러는 새하얀 신수의 몸에 닿기도 전에 흩어졌다.
“이 새끼가 우리 슈니한테 막말을 해?”
늑대의 등에서 내린 레오가 목을 좌우로 꺾었다.
카바넬을 응시하는 그 눈빛에 살의가 깃들었다.
“슈니, 넌 뒤에 있는 새끼 물어와라. 저 자식은 내가 조진다.”
카웅-!
한달음에 사라진 슈니를 뒤로하고, 레오가 저벅저벅 걸었다.
그의 주위로 밀집된 오러의 기운에 카바넬은 저절로 뒷걸음치며 외쳤다.
“웬 놈이냐!”
“곧 죽을 새끼가 알아서 뭐 하게.”
벌레를 보는 듯한 그 시선에 카바넬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놈이…! 잘게 다져 주마!”
다시 한번 시야를 뒤덮는 핏빛 안개가 피어올랐지만, 레오의 검 끝에서 불어온 바람에 또다시 흩어진다.
“좆같이 생긴 게 대가리도 나쁘고요.”
화악-!
레오의 주위에 응축되어 있던 무형의 오러가 확산됐다.
분명 더 넓게 퍼졌음에도 그 밀도에 큰 변화가 없었으니. 사방을 짓누르며 물리력을 발휘하는 오러의 압력에 카바넬은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이건…!”
힘겹게 고개를 드는 카바넬.
치렁한 머리칼이 젖은 미역처럼 두피에 달라붙었고, 기세를 자랑하던 핏빛 검광은 오러에 짓눌려 그 형태가 일그러졌다.
“왜?, 네가 자랑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냐?”
오러에 심상을 부여하여 실체화한 것이 소드 마스터의 증거였으나, 그 위도 존재하는 법.
신체와 연결된 매개체 없이 공간의 오러를 직접 운용하고 실체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카바넬의 핏빛 안개도 그 응용이었으나, 이처럼 강력한 물리력을 구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위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레오의 은근한 미소에 카바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비틀린 심상을 가진 그였지만 무(武)에 대한 염원은 누구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으니까.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목을 죄고, 어깨를 누르던 무형의 힘에서 자유로워진 카바넬이 저도 모르게 숨을 토해 냈다. 그 와중에도 무심결에 레오의 입매에만 집중했다.
그 입꼬리가 얕은 호선을 그었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을 옥죄던 오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 진득하고 무거운 무형의 오러가 단단히 압축되고 또 압축되어 사방에 떠 있었다.
“잘 보고 가라.”
동시에 압축된 오러로 실체화된 수십 개의 바람 칼날이 카바넬의 몸을 관통했다.
끄르르륵-!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카바넬의 목에서는 피거품만 끓어 올랐다.
“아, 미안. 안 보였겠네.”
히죽 웃는 레오의 얼굴을 눈에 가득 담고서.
수십 군데의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보르트의 소드 마스터가 쓰러졌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