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침공 (4)
“잊지 않았겠지? 메르윈이 출병한 것은 가문의 은인을 돕기 위함이었네. 자네가 그러지 않았나? 인장까지 줘 놓고 두말하지 말라고.”
슬쩍 레오를 향해 윙크해 보이는 메르윈 백작.
그 후덕한 윙크에 레오는 육성으로 으엑 소리를 내 버렸다.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도 그걸 전부 꿀꺽하면 제가 양아치 같잖아요.”
“뭘 새삼스럽게 빼고 그러나? 정 마음에 걸리면 우리 쪽 죽고 다친 병사들에 대한 위로금 정도는 챙겨 주시게. 그 이상을 받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니.”
“정 그러시다면야…. 그러면 판테오라는 녀석은 직접 데려가셔서 배상금까지 받아 내 주십쇼. 제가 포로까지 챙겨 가기에는 여유가 없어서.”
“하하핫, 이거 뭐 도둑놈 심보가 따로 없구먼. 알겠네. 그리하지.”
그런 메르윈을 바라보는 클라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쟁 후, 서로 공을 챙기려 아군끼리도 치열하게 다툰다는 것 정도는 익히 들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신경전이 벌이는 것은 예사라고 했으니까.
누군가는 메르윈의 통 큰 결정을 비웃을지 몰라도, 최소한 어린 클라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백작님의 결정에 감탄했습니다. 후배가 많은 것을 배웁니다.”
“장차 제국을 이끌 젊은 피들에게 점수를 땄으니 나 또한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네. 그러면 이만 군을 물리도록 하지. 십수 년만의 대대적인 출병이라 부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거든.”
부인이 걱정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니, 역시 소문난 애처가다운 대답.
“그럼 가셔야죠, 빨리빨리 가 보십쇼.”
서두르는 와중에도 메르윈 백작은 무무카를 향해 인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보다 더 늠름해졌군. 미리야에게 자네 안부도 전하겠네. 언제든 동생을 만나러 방문하게.”
“감사드립니다.”
떠나는 메르윈 백작을 짧게 배웅하고 다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레오, 덱스, 무무카, 클라인.
서로의 얼굴을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것이 거짓말 같다.
여느 때처럼 아카데미 강의실에 모여 있는 기분이었다.
“다들 정말 고맙다.”
“그만해, 인마. 닭살 돋아.”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휴식을 취하는 막사에 이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 * *
흙바닥 위에 얹은 원통형 철창, 그 위에는 거적때기 같은 것을 얹어 간신히 지붕 역할을 하는 야외 감옥.
그 안에 결박이 풀린 귀슈와 자카르도 백작이 갇혀 있었다.
“여봐라! 병사!”
포로로 잡힌 자카르도 백작이 철창 밖을 지키는 병사를 불렀다.
“뭔데?”
귀찮은 듯한 병사의 대답에 와락 인상을 쓰는 자카르도.
“나는 보르트의 변경백이다! 일개 사병 따위가 말도 붙일 수도 없는 고귀한 신분이거늘, 어디서 반말 짓거리란 말이냐?”
“이런 씨-팔, 개새끼도 자기 동네에서나 먹어 주는 거지. 침략군 주제에 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네. 말은 제 놈이 걸어 놓고서 쌍노무 새끼가 어디서 개지랄이야? 에이- 퉤!”
“어, 으, 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걸죽한 욕설에 자카르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국의 왕에게도 존중받는 자신인데, 감히 천한 병사가 이리 대우한다는 말인가…!
으드득!
자카르도는 창살을 쥐고 이를 갈았다.
마법사를 가두는 특수 감옥이라더니, 마력 순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당장 머리에 구멍을 냈을 것이다.
이게 모두 그놈들 때문이다
특히 불붙은 메이스를 들고 부관들의 머리를 죄다 깨 버린 그 미친놈을 잊을 수 없다.
좋은 손맛을 외치며 메이스를 휘두르던 그 광기 어린 눈빛. 분명 마법사임이 분명한데 준기사급 부관들이 놈에게 모조리 당했다.
[앗! 한 놈 더 있네?]
인간은 미지에 공포를 느낀다고 했던가.
자카르도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는 그에게 한없는 공포를 느꼈다.
[뭐야? 항복이야? 진짜?]
아쉬워하는 미친놈이 얼굴이 기억에 선명하다.
자카르도는 그렇게 무기를 던지고 항복했다. 그것도 놈을 피해 반다이트 병사에게 달려가 스스로 결박당했다. 그러니 병사에게 얕잡아 보는 것도 당연했다.
“…이보게.”
못 들었는지 묵묵부답인 병사.
마른침을 한번 삼킨 자카르도가 다시 한번 병사를 불렀다.
“이보게, 내 부탁이 하나 있네.”
“거, 사람 되게 귀찮게 하네, 뭔데?”
이윽고 병사가 고개를 돌린다.
자카르도는 같은 철창 안 귀슈와 판테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철창에 바짝 붙어 병사에게 속삭였다.
“소변을 좀 보고 싶네만….”
굳어진 얼굴로 몇 초간 빤히 자카르도를 보던 병사.
“…어쩌라고, 씨팔!”
“그러니까 소변 말일세. 보다시피 이 철창 안에는 화장실이 없지 않은가?”
자카르도는 차근차근 설명을 늘어놓았다.
깨끗한 옷과 침대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화장실일 뿐이다.
아랫사람의 부족함을 탓하기보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 윗사람의 도리.
그러니 잘 설명하면 이 가엾은 병사도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되리라.
“하….”
“내가 지금 좀 급하네, 그러니….”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개자식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저리 가서 찍소리도 하지 말고 있어. 알아들었냐?”
“……?”
으르렁거리듯 분노를 토해 내고 다시 등을 돌리는 병사.
말문이 막힌 자카르도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이해를 못 한 건가? 그렇게나 자세히 설명했는데?
멀찍이서 그 모습을 보던 귀슈가 한숨을 푹 쉬더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카르도 백작, 혹시 어디서 눈치 없다는 말 들은 적 없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는 침략군이고 패했으며 포로 신세요. 괜히 자극하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거요.”
“하지만 용무가 급한 것을 어쩌란 말이오? 아무리 포로라 해도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지켜주는 것이 도리일 터. 저 병사가 이해력이 조금 부족한 듯하니 이따가 다른 병사와 교섭해 보겠소.”
“…하아, 마음대로 하시오.”
몸을 돌려 버리는 귀슈.
병사가 바뀐다고 해서 자카르도의 교섭이 통할 리 없었으니 이내 방광은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귀슈가 쏘아붙였다.
“거참, 그냥 저쪽에서 처리하면 되지 않소.”
“……?”
“웬만하면 저 끝으로 가 주시오. 내가 악취에 민감하여서.”
그냥 싸라는 말인가? 몸을 가릴 곳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이곳에서?
뒤늦게 의미를 깨달은 자카르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장실을 넣어 주지는 못할망정, 데려다주지도 않다니!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결국 터질 것 같은 방광을 참지 못하고 철창 한구석에서 슬그머니 바지를 내린 자카르도.
“저기 저 새끼 봐라, 오줌 싼다!”
“씨팔, 귀족 물건은 좀 다른가 했더니 생긴 것처럼 볼품없네.”
“어어어? 저것 봐라, 더 작아진다! 카하하하!”
쪼르르….
일단 시작한 배뇨는 멈추기 힘들었고.
자카르도는 수치심에 부들부들 몸을 떨며 엄폐물 없는 노상 관전 방뇨를 끝까지 마쳐야 했다. 당장이라도 혀를 빼물고 죽고 싶을 정도로 치욕적인 경험이었다.
‘이놈들 두고 보자. 밤만 되면…!’
자카르도는 대대로 마법사 가문이었다.
최근 수 대의 성취라고 해야 전부 2~3서클로, 그 또한 겨우 3서클 초입의 경지였지만, 이백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5서클 성취를 이룬 선조도 있다 했다.
그런 자카르도 가문 전승의 비술.
죽은 자를 일으키는 사령술.
술식은 후대의 피에 새겨져 이어진다 했다.
조건은 인근에 일으켜 세울 만한 시체가 존재할 것.
위기의 순간 단 한 번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과 함께 수 대에 걸쳐 전승된 비술이었으니, 자카르도는 그것이 지금을 위한 선조의 혜안이라 여겼다.
그러나 전승 중 일부 소실된 내용이 있었으니, 비술 사용의 대가로 영혼을 내주어야 한다는 것.
실상은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가문의 일가를 지키는 최후의 비술이었으나, 그것을 몰랐던 자카르도는 선조에게 연신 감사하며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곳곳에 횃불이 밝혀진 어둑한 늦은 밤.
끄엑-!
철창 가운데서 조용히 마력을 운용하며 시동어를 읊은 자카르도는 이내 눈깔을 뒤집으며 풀썩 쓰러졌다.
“자카르도 백작?”
설핏 잠들었던 귀슈가 자카르도를 흔들었지만, 그는 영영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 후 싸늘한 한기와 함께 오한이 일기 시작했다.
“이 작자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좋지 않은 예감.
한기는 점차 강해졌다. 사방에 보이는 것은 어둠 속 일렁이는 횃불과 병사들의 모습뿐.
“어우, 썅 왜 갑자기 이리 추워?”
이빨이 딱딱 부딪힐 정도의 한기에 철창을 지키던 병사마저 불평을 내뱉었다.
스으윽- 턱.
스으윽- 턱.
그와 함께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소리.
수상한 소리를 들은 병사도 횃불에 의지해 어둠 속을 들여다봤고, 그 속에서 일렁이는 형체를 발견했다.
깨지고 부서져 성치 않은 갑옷과 창칼을 든 병사들의 실루엣.
“적습인가?”
그 안에는 반다이트의 갑옷과 보르트의 갑옷이 섞여 있다.
이윽고 병사는 깨달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시, 시체가 일어났다!”
혼비백산한 병사는 철창 감옥을 버려둔 채 도망쳤고.
“나, 나도 데려가 주게! 살려 줘!”
철창 속 귀슈의 목소리만이 어둠 속에 울렸다.
* * *
땡땡땡땡-!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이 군영을 시끄럽게 깨웠다.
경계병을 제외하고 곤히 잠들어 있던 병사들이 서둘러 눈을 떴지만,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아직 꿈속이 아닌가 의심해야 했다.
“시체가 공격해 온다!”
한기와 함께 나타난 것은 움직이는 시체.
침략군과 방어군의 전투로 수백의 시체가 발생한 것이 불과 하루도 안 되었다.
자카르도의 사령술로 얕게 묻힌 시체들이 흙을 뚫고 일어났다. 일어난 시체들이 그의 마지막 의지로 이곳 국경 요새를 향한 것이다.
“시체라니, 이건 또 뭔데?”
자고 있던 레오와 덱스도 뛰쳐나와 요새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무무카도 곧 뒤따라왔다.
어스레한 달빛과 곳곳을 비추는 횃불이 접근하는 시체의 군대를 비추고 있었다.
“요새의 벽에 기대어 싸우는 게 상책이야.”
어둠 속에서 야전을 치르기에는 무리한 상황.
클라인의 명령이 벌써 떨어졌는지, 병사들은 요새 문을 굳건히 닫고 농성을 준비했다.
시체의 움직임은 직선적이고 단순했다. 그저 숫자만 많을 뿐이니 최대한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편이 좋다.
“그래, 그게 낫겠다. 덱스 뭐 하냐, 잘 보이게 불 좀 비춰 봐.”
“…맨날 횃불 취급이야.”
“뭘 자꾸 구시렁거려?”
“쳇, 라이트!”
덱스가 만든 수십 개의 광원이 요새 주위에 둥실 떠올랐다.
비로소 놈들이 자세히 보였다. 숫자는 대략 삼사백.
모두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국경 방향에서 몰려오고 있다.
“…우리 병사들도 섞여 있다.”
“병사였던…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클라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레오의 말이 맞다. 사령관이 되어 병사들에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다. …젠장 시체하고 싸우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런데 저놈들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야? 한번 죽었는데 죽기는 하는 걸까?”
“가만있어 봐.”
오러안으로 살피는 레오.
당연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과 전혀 다른 에너지 흐름이 보였다. 팔다리와 몸통에 이어지는 흐름은 매우 미약하며 그 중심은 머리에 쏠려 있다.
“머리를 부수면 될 것 같은데? 팔다리를 썰어도 별 타격이 없을 거야. 심장도 의미가 없겠지.”
그러고 보니 가슴이 뚫린 채 걸어오는 시체는 있어도 목 없는 시체는 없다.
“클라인, 너 오러 회복 얼마나 됐냐?”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하기에는 부족해.”
전후 처리로 제대로 오러 연공을 하지 못했다. 바로 이렇게 일이 터질 줄 알았다면….
자책하는 클라인의 얼굴에 대고 레오는 손을 휘휘 내젓는다.
“그럼 가만히 여기서 구경이나 해라.”
“또 너희에게 전부 맡길 순 없어.”
“나도 여기서 구경이나 할 건데? 전망도 좋고.”
정말로 구경할 셈이라는 듯 요새 난간에 기대 털썩 앉는 레오.
“저기 안 보이냐? 대가리 깨고 싶어서 안달 난 녀석 있잖아.”
레오의 턱짓.
그곳에는 메이스에 불을 붙였다 껐다 하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덱스가 있다.
“불이 없는 게 나은가? 타는 냄새는 별로던데. 아냐, 그래도 불 몽둥이가 역시 근본이지.”
“어….”
클라인은 혼란스러웠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