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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75화 (75/127)

75. 영지를 부유하게 (1)

“영주님, 무사히 다녀오셨습니까.”

영주성 앞에 블레아가 환하게 웃으며 마중 나왔다.

붉은 머리를 깔끔하게 묶어 넘긴 모습, 이제 메이드의 태를 모두 벗었다.

첫인상은 영 미덥지 못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꽤 인상이 변했다. 확실히 제 옷을 찾아 입은 느낌이다.

“블레아, 그간 별일 없었냐?”

“긴급한 사안은 없었습니다. 괜찮으시면 오후쯤 전반적인 내용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

블레아의 목소리에 기쁜 기색이 역력하다.

영주가 돌아왔으니 이제 무거운 책임감에서 해방된다는 기쁨이다.

레오가 영지를 비운 동안 영주 대리를 맡은 이는 블레아였다.

얼마 전까지 잡일을 하던 메이드에게 영주 대리라니, 말도 안 되는 인사였지만 그걸 반대하고 나설 이가 없을 만큼 영주성에 인물이 없었다.

전 영지 관리인 굴트 놈과 엮인 인사들을 죄다 쳐내고 나니 정말 그랬다. 집사와 하녀장마저 새로 구해야 하는 실정이었으니까.

재무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에 쫓기듯 일하던 블레아는 임시 영주 대리까지 맡으라는 명령에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잠깐이다. 열흘도 안 걸릴 거야.]

그렇게 억지로 영주 대리를 맡기고 반다이트로 출진한 것이다.

‘병사는 무무카에게 맡기면 되니 한숨 덜었고.’

무무카와 덱스도 곧 정식 기사 서임식과 마법사 계약식을 할 예정이다.

우리끼리 굳이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때로는 일부러 더 챙길 필요도 있다. 또한 영주성의 다른 이들이 두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 * *

잠시 늘어져 쉬다 보니 금방 오후가 됐다.

오랜만에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뒤적이고 있자니 밖에서 악! 악! 소리가 우렁차다.

무무카가 벌써 병사들을 소집한 모양.

이번 전장을 겪은 병사들은 무무카의 실력을 직접 봤다. 지휘관으로 받아들이는 데 특별히 거부감은 없을 것이다.

[목소리 그것밖에 안 나오냐!]

익숙한 목소리.

창으로 내다보니 덱스 놈도 거기에 끼어 함께 고함을 질러대고 있다.

메이스까지 들고 있네? 더 웃기는 건 덱스를 대하는 병사들 군기가 더 바짝 섰다는 거다.

[그래 가지고 바이스만을 지키는 올빼미가 될 수 있겠나!]

올빼미.

뭐에 꽂혔는지 덱스 놈은 바이스만 병사 중 정예를 추려 올빼미라는 칭호를 주겠다고 했다.

이는 십인장처럼 실제 병사 통솔 권한을 가지는 것이 아닌, 명예뿐인 칭호였는데 의외로 이게 먹혀들었다.

그게 어찌어찌 바이스만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으로까지 발전해 버린 것이다.

“저놈은 저기에서 뭐 하고 있냐….”

펄럭이는 올빼미 문양 깃발 옆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덱스.

어이가 없어서 그걸 한동안 내려다보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블레아냐.”

둘둘 말린 문서들을 무슨 바구니 같은 것에 한가득 담아 들어오는 블레아. 그 뒤에도 시종 몇이 똑같은 서류 더미를 안고 따라 들어 온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해지는 광경.

“그게 전부야?”

“예, 일단은 그렇습니다.”

턱, 바구니를 내려놓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잇는다.

“이쪽은 시급하지만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다 생각되어 제가 전결한 문서입니다. 내용 확인만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쪽은 꼭 직접 보시고 의견을 주셔야 하는 문서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영지 운영 자금에 대한 것으로….”

“정신 사나우니까 일단 앉아. 하나씩 보자고, 하나씩.”

“예!”

레오는 전결했다는 문서부터 하나씩 들춰봤다.

블레아의 말대로 꼭 영주 선까지 올라올 필요 없는 것들이다. 각 문서에 배경 정보와 결재 이유 등이 짤막하게 첨삭되어 앞뒤 흐름 파악이 어렵지 않았다.

“흐음….”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으로 문서를 훑고 확인한 것들을 하나씩 옆으로 넘기는 데에 거칠 것이 없다. 중간중간 의문 나는 점을 질문하면 막힘없이 술술 대답이 나온다.

그렇게 첫 번째 덩어리를 전부 체크 하는 데 불과 한 시간.

레오는 줄곧 아래로 박혔던 시선을 들었다.

자신의 업무 처리가 어땠냐는 듯, 블레아가 눈을 반짝이고 있다.

“잘했다.”

“감사합니다!”

기쁨을 숨기지 못한 입술이 좌우로 벌어진다.

그 모습이 꼭 주인에게 칭찬받은 강아지 같다.

“다음은 영지 자금 운영에 대해 들어 볼까.”

지금까지 영주 대리의 업무 보고였다면, 지금부터는 재무관이라는 본연의 업무다.

약속한 한 달이 조금 지났지만 그녀는 아직 수습 기간.

이번 보고가 그 수습 딱지를 뗄지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았다.

“먼저 전 영주 대리가 남긴 장부를 믿을 수 없었기에 전부 처음부터 확인했습니다. 세부 내역은 아직 부족하지만 큰 숫자들은 어느 정도 맞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 시간이 좀 걸리겠지.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이쪽이 영지 운영에 대한 연간 필요 예산과 예상 수입입니다.”

“…적자로군.”

“예, 그것도 현상 유지를 위한 최소 예산입니다. 몇 년째 미뤄지고 있는 치수 공사나 흉년 대책을 포함시키면 그 숫자를 훌쩍 넘어갑니다.”

골이 아팠다.

연간 필요 예산은 1천 골드를 훌쩍 넘는데, 예상 세수는 최대 800골드다. 게다가 세수 외에 딱히 돈 들어올 구석도 없다.

“먼저 올해는 전 영주 대리….”

“그냥 굴트라고 해.”

“흠흠, 굴트에게 압류한 재산이 대략 280골드에 달합니다. 거기에 영주님께서 주신 50골드 어음이 있으니 당장 1년은 잘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굴트 놈에게 털어 온 돈이 그 정도라니, 어떤 의미로 대단하다.

일단 대략적인 현황은 알 것 같고, 중요한 건 이후 대책이다.

“장기적으로는 새로운 사업이 필요합니다.”

“사업?”

“바이스만의 영지민 중 7할이 농사를 짓습니다만 농업에서 답을 찾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레오도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스만의 밀도 유명하지만 메르윈보다는 한 수 아래다. 더욱이 생산량은 비교할 수준에도 못 미친다.

“저희 영지는 숲과 바다에 모두 인접해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 구상 단계입니다만 이를 활용해 특산품을 발굴해 보려 합니다.

“아직 구체화는 안 된 모양이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숲과 바다라…. 영지 북쪽에 바다가 닿아 있다고 했지.

“소금 생산은 불가능한가?”

바다라고 하니 소금이 바로 떠올랐다.

소금은 귀하다. 제국이 가진 암염 광산에서 소금을 생산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 가치는 높다.

바닷물로도 소금을 만들 수 있다고 들었는데, 자세한 방법은 모르니 일단 던져 본 것이다.

“대륙 동쪽에서는 태양광으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해염(海鹽)을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곳 바이스만의 해안 지역은 일조량이 충분하지 않아 증발이 거의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무를 때어 바닷물을 끓이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증발만 시키면 그 해염이라는 걸 만들 수 있나?”

“이후 작업도 남아 있지만 그것에 비하면 사소합니다.”

“…그럼 할 수 있겠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는 바닷물만 끓여 날릴 수 있다면 소금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블레아, 이 시간부로 너를 영지의 정식 재무관으로 임명한다.”

“에? 가, 감사합니다!”

“그리고 소금 사업에 대한 전권을 부여할 테니 꼭 성공시키도록!”

“예에-?”

천국으로 올라가려던 블레아의 표정이 1초 만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여태껏 유능한 재무관을 흉내 내더니 금방 쭈구리가 되는구먼.

“바닷물만 날리면 되는 거라며?”

“그, 그렇긴 한데… 그게 어렵다고 계속 말씀드린 건데요….”

태양? 나무로 불을 때?

아니지, 우리는 마법사가 있잖아.

[빨리 안 뛰냐? 우리 할머니도 그것보다 빠르겠다!]

[악!]

밖에서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는 고급 인력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지 마법사여, 첫 번째 일이다.

* * *

눈코 뜰새 없이 닷새가 지났다.

슬슬 소식이 올 때가 됐다고 여길 즈음 드디어 자카르도 가문에서 사자가 찾아왔다.

“영주님, 보르트 왕국의 자카르도 백작가에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응접실로 잘 모셨지?”

기다리던 소식에 레오가 화색이 됐다.

암, 잘 모셔야지. 다 썩어 가는 시체를 비싸게 사 가시겠다는 분인데.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이 가문의 대표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뭐?”

두 사람?

레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님을 모셨다는 응접실로 내려갔다.

과연 시종의 말대로 두 사람이 와 있었는데, 서로 영 탐탁치 않은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다.

“내가 레오 바이스만이오.”

영 답답한 말투지만 영주의 위엄을 보이자니 어쩔 수 없다.

고개를 쳐들고 여유 있게 응접실에 들어서는 레오.

그 모습에 자카르도가에서 왔다는 두 인물이 각기 일어나서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바이스만의 주인을 뵙습니다. 저는 자카르도 가문의 차기 가주이신 유안 자카르도님의 명을 받고 온 행정관 마티오라 합니다.”

넉넉한 뱃살과 부족한 머리숱을 가진 중년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바이스만의 주인에게 인사 올립니다. 저야말로 자카르도 가문의 정당한 계승자이신 시르티 자카르도님의 명을 받은 외교 대사 야쿱이라 하옵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쩍 말라 빼빼한 노인이 긴 인사말을 늘어놓는다.

자카르도 가문의 계승자라 주장하는 이들이 각기 사자를 보낸 상황. 가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후계 분쟁이 일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단박에 상황을 알아챈 레오였으나 짐짓 곤란한 듯 미간을 굳혔다.

“먼저 자카르도 백작의 일에 조의를 표하오. 백작은 누구보다 용감하게 군을 이끌었고 명예롭게 싸웠으며, 비록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지만 끝까지 고결함을 잃지 않았소. 백작의 죽음을 나 또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요.”

자카르도가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항복했고, 감옥에서는 노상 관전 방뇨로 수치를 당했다는 소문은 돌려보낸 포로 병사들도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래도 말 한마디가 천금 값을 하는 법이니 이 정도는 어렵지 않다. 물론 진짜 금을 받을 생각이었고.

“오오…! 이 마티오, 영주님의 넓은 아량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저희 또한 귀환한 귀슈 백작을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선대 가주님의 일은 안타까운 사고였을 뿐 누구도 영주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배려심까지 보여 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서로 경쟁하듯 금칠해 주니 레오도 표정 관리가 힘들다.

아무리 후계 경쟁에서 이기겠다지만, 어찌 보면 제 주군의 시체를 쥔 원수인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

“그것참 다행이오. 자, 앉읍시다.”

필사적으로 당위성을 주장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역시나 예상대로였고.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는 장남과 차남은 각자 백작의 시신을 반환받으며 당위성에 방점을 찍으려는 듯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당황스럽소. 나로서도 가문의 정통성을 이을 이에게 백작의 시신을 넘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는바, 지금 두 분의 말만 듣고는 어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소.”

무게감 있게 이야기했지만 한마디로 패를 까라는 소리다.

선대 가주의 시신을 받아 오는 세력은 후계 구도에서 승리한다. 반대로 여기서 지는 세력은 나가리다. 그냥 나가리도 아니고 죄다 목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니 칼자루를 쥔 쪽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

“영주님, 판단에 도움을 드리고자 시르티 님의 후계 당위성을 준비해 왔습니다. 가장 끝줄을 봐 주시면 됩니다.”

눈치 빠른 야쿱이 먼저 문서 하나를 내밀었다.

돌돌 말린 종이를 펼쳐 구구절절한 내용을 건너뛰고 가장 끝에 주목했다.

[금화 300.]

레오의 눈썹이 움찔했다.

살아 있는 백작이라면 오히려 적은 액수다. 하지만 시체에 300골드라?

“장자인 유안님의 당위성이 그 이상이리라 자신합니다.”

이윽고 건네받은 두 번째 문서.

[금화 350.]

“하아….”

양측의 마음을 확인한 레오는 허공을 향해 한숨을 내쉬었다.

야쿱과 마티오의 시선이 서로 잠깐 교차하더니 레오의 입술을 향했다. 과연 어느 쪽 손을 들어 줄 것이란 말인가?

“두 아드님의 진심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고 말았소. 으으음….”

그러면서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신음하는 레오.

“어디 몸이라도 편치 않으신 건지….”

“요즘 두통이 심해서 고생이오. 한 시간 정도 찬 바람을 쐬면 조금 나아지더이다. 다과를 더 준비하라 이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소?”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리를 뜨겠다니.

황당한 말이었지만 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응접실을 떠나던 레오가 문득 몸을 돌려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두 아드님의 마음에 감복했소. 금화 300과 350이라니, 나도 나중에 그런 아들을 낳고 싶을 정도요. 그럼 잠시 후 봅시다.”

“……!”

양측이 숨겨온 패를 확 까 버리고 자리를 떴다.

황당하겠지. 보지 않아도 둘의 표정이 훤하다.

새로운 패를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바깥바람이 시원하니 기분 좋았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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