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영지를 부유하게 (2)
잠시 바람을 쐬고 돌아온 레오의 앞에 새로운 제안이 놓였다.
[금화 450.]
[금화 480.]
“영주님, 저희로서는 이것이 최대한의 성의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시기를….”
자리를 비웠더니 판돈이 올랐다.
레오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둘의 시선을 응시했다.
잡아먹을 듯 뜨거운 눈빛. 여기서 다시 자리를 비울 핑계를 대면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태세다.
그래도 판돈이 올라간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다.
“두 분께 먼저 사과를 드리고 싶소. 생각해 보니 이렇게 한곳에서 논의할 만한 내용이 아닌 것 같소. 이제부터라도 한 분씩 응대하려는데 어떠시오?”
또 금액을 까발리며 판을 깰까 걱정했던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영주가 상식적인 대응을 한다고 생각한 것.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레이스의 시작이었다.
둘을 서로 다른 방에 밀어 넣은 레오는 각자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며 능글능글하게 애를 태우기 시작했다.
마티오에게는.
“나 역시 장남이 승계하는 것이 옳다고 보오. 그런데 저들 역시 필사적인 듯하니 쉽게 손을 들어 주기 어렵구려. 일단 말은 들어 봐야지 않겠소?”
야쿱에게는,
“먼저 태어난 순서 따위 아무 의미가 없다 생각하오. 중요한 건 알맹이 아니겠소? 실력 있는 자가 가문을 이끄는 것이 당연한 법이오.”
다른 공간에서 서로를 충동질하니 판돈이 다시 올라간다.
그것을 두어 번 반복하니 그제야 마티오와 야쿱도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방을 뛰쳐나왔다.
[금화 620.]
[금화 620.]
앞자리가 두 번이 바뀌었는데 공교롭게도 금액이 같다.
다시 응접실에 모인 둘 앞에서 레오가 곤란한 기색을 비쳤다.
“공교롭게도 양측의 마음이 꼭 같으니….”
“이이잇!”
“영주님, 이제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금화 642.]
[금화 645.]
기어코 낱개 단위까지 조정되는 것을 보니 여기까지가 상한선인가 싶다.
저것만 해도 바이스만령의 연간 세수입의 8할이다. 블레아가 좋아하겠군.
얼굴이 벌개진 둘 앞에서 레오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진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소. 더 이상 고심하는 것은 그대들의 충심을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괴롭지만 결정을 내리도록 하겠소.”
선택의 시간.
마티오와 야쿱의 시선이 레오의 입술을 향했다.
그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도 결정될 수 있기에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나 레오 바이스만은 자카르도의 정당한 후계로 차남 시르티 자카르도를 지지하는 바요. 그에게 백작의 시신을 넘기겠소.”
“아아…!”
“오오오…!”
상반된 탄식이 응접실에 울렸다.
장남을 지지하는 마티오는 머리를 감싸 쥐었고 차남을 대리한 야쿱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자카르도는 언제나 바이스만의 우방이 될 것입니다!”
“그것 참 듣기만 해도 든든한 말씀이오, 하하핫.”
망연자실한 마티오는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레오는 그런 그에게 슬쩍 귓속말을 남겼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저 영감보다 빨리 도착해야 가족들 데리고 몸이라도 빼지 않겠소?”
“…예?”
“그냥 죽을 셈이었던가? 생각보다 의리파였던 모양이군. 나라면 가짜 시체라도 준비해서 도망칠 시간이라도 벌었을 텐데.”
“……!”
마티오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영주성을 빠져나갔다.
열심히 레이스에 참여한 그에 대한 마지막 조언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테니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기분 좋게 승낙한 야쿱. 이튿날 계약서를 작성했다.
시신은 바로 넘겨주기로 했고 값은 3년에 걸쳐 치르는 계약이었다.
“약속을 잘 지킬 걸로 믿겠소.”
레오가 슬쩍 살기를 일으키자 야쿱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개 남작이 아니라 소드 마스터와의 계약이다. 게다가 귀슈 백작 진영의 소드 마스터 카바넬을 단칼에 벤 남자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잘못하면 모처럼 얻은 백작 가문이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음을 야쿱은 몸으로 실감했다.
* * *
“후, 바쁘구먼.”
큰 건을 하나 쳐 내니, 그제야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유능한 행정관이 절실했다. 영주가 자리를 비웠을 때 영지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능력을 지녔으며, 부정을 저지르지 않을 믿을 수 있는 인물.
아? 있잖아?
번득 지오르가 생각났다.
상인으로 잔뼈가 굵고 상회의 중견 간부도 겸하고 있으니 관리에도 능하다.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는 욕심을 절제할 줄 알고 선을 지킬 줄 알았으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보다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그는 성공한 상인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금전적인 부분에 한해서다.
영지의 행정관은 평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상단의 직위. 그 권력은 재력에 비할 비가 못된다.
오죽하면 블레아의 아버지도 한순간에 망하지 않았나.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지만, 레오는 한 가지 더 혹할 만한 내용을 덧붙였다.
바로 덱스가 샤를롯의 아카데미 입학 준비를 도와준다는 것.
‘아카데미 수석이 가르쳐 주겠다는데, 이건 거절할 수 없겠지.’
편지를 보낸 지 불과 이 주일 만에 지오르가 도착했다.
벌써 가산까지 정리했다는데 정말 불같은 행동력이다.
“제안을 받아 줘서 고마워요, 달리 아저씨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바이스만의 영주님을 뵙습니다. 이렇게 좋은 제안을 주시다니, 이 지오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레오를 바라보는 지오르는 눈이 번쩍번쩍하다.
행정관이 된다는 것은 신분 상승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에이,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해요. 나도 종일 위엄 있는 척 목소리 깔기도 힘들고.”
그제야 지오르도 조금 긴장을 풀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소드 마스터에 남작이 되셨다는 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그런 거 가지고 사람이 변하면 쓰겠어요? 저희 어머니는 잘 계시죠? 여기로 모시는 것도 생각해 봤는데 이왕 수도의 생활도 좀 즐기시다가 나중에 아카데미 졸업하고서 모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그럼요, 종종 들러 안부를 확인하라고 프라인에게도 전해 놨습니다.”
당장이라도 가족을 부르고 싶은 마음이지만 마음에 불안감이 남아 있다.
국경이 인접한 이 바이스만 보다는 수도 한가운데가 여러모로 안전할 것이다.
“혹시 쓸 만한 친구들은 좀 있던가요?”
전반적으로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괜찮은 인재, 특히 물자 관리 등에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자유롭게 데리고 오라고 했다.
“똘똘한 녀석들을 몇 데려왔습니다. 제가 몇 년 동안 지켜본 녀석들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아저씨 손발이 되어야 할 사람이니 어련하겠어요. 재무관은 제가 키우는 녀석이 하나 있습니다. 그 친구도 이 지역 상회 출신이었다고 하니 아저씨하고 말이 잘 통하겠네요.”
“그렇습니까? 어쩌면 안면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마 지금쯤 한창 소금을 만들고 있겠네요.”
“…소금요?”
바이스만에 암염 광산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지오르.
그런 그에게 레오는 희미한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 * *
바이스만 영지 북단.
넓은 갯벌 한구석에 흙을 쌓아 인위적으로 바닷물을 가둔 공간이 있다.
그리고 바다를 향해 덩그러니 놓인 의자 하나.
비척비척 걸어 의자에 앉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바이스만의 마법사 덱스였다.
“파이어.”
피곤함이 물씬 묻어나는 영창.
수면 위에 수십 개의 화염 구체가 떠올랐다.
그 상대로 미동도 없이 제 자리에서 불타는 화염 구체들. 잠시 후 수면이 일렁이는 듯하더니 바닷물이 끓어 증발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는 공기도 후끈 달았다.
초점 흐린 눈으로 제 머리 위에 찬물을 떨어트려 가며 제자리를 지키는 덱스.
그렇게 한 시간을 끓이자 가둔 바닷물이 모두 증발해 사라졌고, 그 바닥에는 하얀 소금 결정만 남았다.
“수고하셨어요, 마법사님!”
블레아의 신호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인부들이 투입된다.
우르르 달려들어 바닥의 소금 결정을 박박 긁어내 포대에 담고, 다시 그곳에 바닷물을 채우는 작업이다.
포대에 담은 소금에는 아직 흙과 모래가 다수 섞여 있었지만 여과 작업을 거치면 훌륭한 해염이 된다.
“아니,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건데요.”
의자에 늘어진 덱스는 애원하듯 말했다.
블레아에게 끌려 이곳에 온지 사흘째.
난생처음 본 바다에 감동할 새도 없이 작업에 투입됐다.
“많이 피곤하시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하고 오늘은 끝낼게요. 괜찮으시죠?”
한 시간 동안 파이어, 그 뒤 한 시간 휴식.
해가 떠서 다시 질 때까지 사흘간 이 작업을 반복했다.
이제는 본인이 마법사인지, 불붙이는 기계인지 헷갈릴 정도다.
‘영지 마법사는 기사보다 대우가 좋다더니!’
속았다.
최소한 무무카는 이런 고생을 안 할 텐데.
결국 뉘엿뉘엿 해가 질 때쯤 마지막 작업이 끝났다.
바닷가 마을에 마련된 숙소에 들어간 덱스는 침대에 눕는 대신 걸터앉았다.
당장이라도 누워 자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 다른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평생 여기서 물만 끓여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낮에는 바닷물을 끓이고 밤에는 잠들지 않기를 나흘째.
“마법사님 오늘도 부탁드릴게요!”
여명과 함께 찾아온 블레아에게, 덱스는 돌멩이 몇 개를 보였다.
“오늘은 이걸 씁시다.”
“이게 뭐죠?”
겉보기에는 흔한 돌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뭔가 도형 같은 게 그려져 있는데 알아볼 수는 없다.
고개를 갸웃하는 블레아에게 그저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덱스.
항상 작업하던 공간에는 벌써 물이 채워져 있다.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닷물을 응시하던 덱스가 돌멩이를 쥐고 외쳤다.
“레오! 이 나쁜 새끼야!”
“헉!”
영주를 향한 욕설에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킨 블레아.
덱스는 아랑곳 않고 쥐고 있던 돌멩이들을 지금부터 증발시켜야 할 바닷물 한가운데에 던졌다.
퐁당-!
“마, 마법사님?”
블레아는 적잖이 당황했다.
너무 혹사시켜 삐뚤어진 걸까? 영주님이 직접 붙잡아 계약한 마법사라고 했는데 너무 부려 먹었나?
일주일이나 고생시킨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영주님이 마음껏 굴리라고 했는데….
“내가 물이나 끓이려고 마법을 배운 줄 알아? 이것도 이제 끝이다! 아하하하핫!”
“저, 마법사님?”
“끝이라고! 해방이다! 자유다!”
양손을 들고 환호하는 덱스.
블레아의 얼굴이 점점 울상이 되어 갔다.
아무래도 마법사가 살짝 정신이 나간 것 같다.
“마법사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뭔 소리예요. 지난 일주일이 정말 미치는 줄 알았구먼. 지금은 아주 말짱하다고요.”
“그런데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이제 그 짓거리를 더 안 해도 되니까. 저기 봐요.”
덱스가 가리킨 곳.
화염구도 소환하지 않았는데 바닷물이 데워지듯 아지랑이가 피어나고 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해방이라고!”
제멋대로 끓고 있는 바닷물.
블레아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력이 없어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마도구.
아티팩트가 최초로 발명된 순간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