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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78화 (78/127)

78. 진급 시험 (1)

“우리 아들이 바이스만의 영주라니, 정말 꿈같은 이야기야.”

긴가민가하기는 했는데 역시 맞았다.

왠지 익숙하다 했더니 일전에 어머니에게 들은 선대 남작 메이너드 바이스만의 이름이었다. 어쩌면 그가 다스렸다는 영지도 지금의 바이스만이지 않을까?

“그러게요, 신기하긴 하네….”

겨우 백 수십 년 전의 인물. 영지 어딘가에 메이너드 바이스만에 대한 기록이나 이야기가 남아 있을지도 가능성도 충분하다.

영지에 돌아가면 한번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빠! 얘 너무 귀여워!”

옆에서는 릴리가 슈니를 끌어안고 몇 시간째 까르륵거리며 뒹굴고 있다.

열 살 소녀의 끝없는 에너지에 여태껏 누구를 만나도 당황한 적 없던 슈니도 진이 빠진 듯하다. 레오와 스친 슈니의 눈동자가 애절하게 구원을 바라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놔줘….”

“왜? 내가 이렇게 예뻐해 주고 있는데? 슈니가 싫어하는 거 같아?”

“…아니야, 좋아하는 것 같네.”

슈니, 미안하다.

그렇게 쳐다봐도 도와줄 수가 없어….

레오는 여동생에게 너무 약했다.

* * *

다음 날, 레오와 덱스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카데미는 꽤나 분위기가 바뀌었다.

먼저 두 학부장 카르파와 메퀸토가 사라지며 전보다 조금 싱숭생숭해졌다.

그나마 메퀸토는 지난 아카데미의 사건을 조사한다는 대외적 명목이 있었지만, 카르파는 후반기 일정이 시작되고 얼마 안 가 스스로 학부장 직을 내려놓고 아카데미를 떠났다.

말 그대로 하야한 것.

결국 이오페가 전사 학부장 대리를, 네피르가 마법 학부장 대리를 맡으며 아카데미를 지키고 있었다.

‘카르파도 결국 그대로 움직였군.’

카르파가 모든 책임을 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소문이지만, 실상은 베니에르 백작가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 몸을 드러낼 것이다.

당연히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황제와 황태자, 레오와 이오페 정도의 극소수뿐이다.

이런 내막을 알기에 이오페가 아카데미에 남은 것이지, 아니었다면 진작 카르파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한동안은 조용할지도 모르겠어.’

보르트에 특사로 파견된 켈시온, 그에게는 이단 심문관이 따라붙었다.

흑마법사의 흔적을 직접 제보받고 파견된 이단 심문관이니만큼, 켈시온과 흑마법사의 연관성 유무를 확실히 확인하기 위해 끈질기게 달라붙을 것이다.

이단 심문관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최소한 두어 달은 아무 짓도 못 할 테지.

“레오!”

“오, 패트릭 아냐? 너 분위기가 좀 바뀌었다?”

오랜만에 전사 학부 연무장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패트릭이 반갑게 맞았다.

전보다 한층 투기가 강해진 것은 물론이고, 자신감도 붙은 모습이다.

“너야말로 엄청난 인물이 됐잖아! 제국의 영웅이라니!”

“제국의 영웅? 무슨 소리야?”

“몰랐어? 보르트를 물리친 제국의 영웅, 레오 바이스만 남작과 올빼미들! 수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아아, 덱스 이 자식 죽여 버릴 거야!

레오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성문에서 병사들의 이야기도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일당백의 올빼미를 이끄는 야수의 기사,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올빼미를 조련한 수수께끼의 교관 이야기도 있던데, 그 말도 진짜야?”

“아아아… 제발 그만….”

호흡이 가빠졌다. 수치심에 숨쉬기가 힘들기는 처음이다.

“그래, 제대로 알고 있군!”

등 뒤에서 들려온 대답 소리에 레오는 고개를 휙 돌렸다.

덱스 놈이 자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거기에 서 있었다.

“너…!”

레오의 주먹에 꾸드드득- 힘이 들어갔다.

정수리라도 한 대 내려치려고 덱스에게 다가가는 순간.

“다들 모였나?”

자크 교수가 연무장에 도착했다. 레오를 발견하고는 입가에 웃음을 담는다.

“이게 누구야? 제국의 영웅께서 오랜만에 강의에 참석하셨군.”

“아….”

“이 자크를 제물로 삼아 소드 마스터가 되었으면 제국의 영웅 정도는 되어 줘야지! 나는 자네가 아주 자랑스럽다!”

“아아, 교수님 제발….”

“나뭇잎을 밟고 유메른 강을 건넜다는 기적을 나중에 꼭 한 번 보여 달라고!”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레오는 결국 연무장 바닥에 주저 앉았다.

수치심만으로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 해 보았다.

생도를 훑던 자크의 눈이 덱스에게 걸렸다.

“못 보던 친구인데, 자네는 마법 학부 아닌가?”

“네, 맞습니다! 오늘은 청강을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청강? 지금 무슨 강의인지는 알고 왔나? 실전 무기술이네만.”

“알고 왔습니다, 여기 무기도 준비했고요.”

자랑스레 메이스를 들어 보이는 덱스.

자크는 턱을 매만지며 영 미덥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안 될 건 없겠지….”

“헤헤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덱스 전사 학부 수업에 기웃거리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이 메이스를 더 시원스럽게 휘두르고 싶었기 때문에.

쪼르르 둔기를 다루는 그룹에 합류한 덱스는 그 안에 금세 녹아들어 함께 실습하기 시작했다.

“패트릭, 대련 한판 어때?”

레오가 패트릭에게 다가갔다.

처음부터 규격 외였던 클라인과 무무카를 제외하면 전사 학부에서 가장 성취가 높은 녀석이었다. 그 성취에 레오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지만 스스로 쌓아 온 실력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좋지.”

패트릭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레오는 동경의 대상이었다가, 은인이 되었으며, 이제는 목표가 되었다.

그를 목표로 삼는 길은 괴로울 것임이 틀림없다. 따라잡기는커녕 그 등만 쫓아야 할 것이며, 어쩌면 너무 멀어 평생 그림자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외에 다른 목표는 생각할 수 없게 돼 버렸다.

‘오호….’

창을 잡고 마주선 패트릭을 보며, 레오는 조금 감탄했다.

오러 소드의 발현이 훨씬 안정적이다. 전과 다른 완숙함이 느껴졌다. 황녀와 팀을 이루고 활동하며 분명 많은 경험을 한 것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흔들림 없는 기세.

두 사람의 대련에 다른 생도들도 실습을 멈추고 그들을 주시했다.

팟-!

패트릭의 창이 먼저 움직였다.

회전과 함께 최단 거리로 찔러 들어가는 창끝이 레오의 명치를 향했다. 그야말로 정석적인 공격.

반걸음 움직이며 검신으로 창을 감아 위로 튕기는 레오.

패트릭의 성장을 확인하는 것이 목적이기에 비슷한 수준의 오러 소드로 대응했다.

첫 공격이 파훼당할 것을 예상한 듯, 빠르게 회수되던 창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 옆구리를 노린다.

망설임 없는 연격!

오러가 깃든 창과 검이 부딪히며 연이어 충격음이 터졌다.

‘자식, 많이 컸어.’

그 강맹한 창보다 마음에 든 것은 녀석의 마음가짐이다.

본인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패트릭의 내면에는 열등감과 패배 의식이 깔려 있었다.

언제나 발전하기를 원했고 그만큼 노력했지만, 오랜 좌절감을 완전히 떨쳐 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

하지만 지금 녀석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패트릭의 창을 받아 내기만 하던 레오가 일순 기세를 바꾸었다.

짧게 드러낸 빈틈 속으로 망설이지 않고 몸을 쑤셔 넣더니 그대로 간격을 좁혀 품을 파고든다.

여태껏 묵직하던 패트릭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카갓-!

목젖을 노리는 검을 가까스로 쳐 낸 패트릭.

그 매서운 기세에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미련없이 검을 회수한 레오는 그 회전력을 살려 그대로 몸을 띄웠다.

좁은 간격에서 이루어진 회전 베기, 풍참(風斬).

쾅!

반 바퀴짜리로 부족한 회전이었지만 파괴력은 범상치 않다.

뒷발이 후들거렸지만 패트릭은 이를 악물며 막아 내는 데 성공했다.

크게 창신을 휘두르자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나는 레오.

간격의 주도권이 다시 패트릭에게 돌아갔다.

‘지금이다!’

눈을 빛낸 패트릭이 앞발을 크게 내디뎠다.

다시 한번 간격을 내어 주기 전에 승부를 결정지어야 했다.

그 창끝이 레오의 목젖과 명치를 노리고 동시에 날아들었고.

카가가각-!

섬전(閃電)의 파공음이 터지기 전, 창신이 긁히는 소리가 울렸다.

“하아….”

패트릭이 길게 숨을 토했다.

창의 궤도를 밀어내며 파고든 레오의 검 끝이 가슴 앞에 멈춰 있었기에.

“졌어. 역시 너한테는 안 되네.”

“새꺄, 눈에 힘이나 풀고 말해.”

검을 내린 레오가 패트릭의 가슴을 툭 쳤다.

그 말대로 패트릭의 눈빛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뜨거워진 느낌이다.

과거 녀석이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은 이제 온전히 호승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간 어떻게 지냈냐? 궁금하다.”

연무장 한곳에 앉아 잠시 쉬면서 패트릭의 이야기를 들었다.

길드 임무에서 레오의 팀에 합류하지 않은 것은 예상대로였다. 그리고 유리아, 세실이라는 두 마법사의 전위를 혼자 맡은 것은 녀석의 정신적인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너, 내 영지의 기사가 될 생각 있냐?”

레오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거두고 물었다.

수중에는 아직 쓰지 않은 포렌티아가 있다. 패트릭이 사용한다면 소드 엑스퍼트 상급까지 금방 도달하겠지.

그래도 그냥 내줄 수는 없는 법이다.

패트릭도 좋은 녀석이지만, 덱스나 무무카처럼 뜻을 같이하기로 한 것도 아니다. 냉정한 말이지만 클라인처럼 중요도가 높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런 패트릭에게 포렌티아를 주려면 최소한 내 사람이라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패트릭도 표정을 고치고 레오를 응시했다.

상대는 같은 생도이자 동기. 그리고 얼마 전 남작 위를 받았지만 그전까지는 평민이었던 자.

“미리 말해 두지만 첫 번째 기사 자리는 무무카가 이미 꿰찼어. 덱스 놈은 마법사 주제에 자꾸 기사 자리를 넘보는 것 같고 말이야.”

그렇구나, 벌써 그 둘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굉장히 친밀해 보이던 두 사람이었으니까.

“당장 대답하라고는 안 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라.”

레오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이 재촉할 것도 없는 일. 이후의 결정은 온전히 녀석의 선택에 맡길 뿐이다.

느린 호흡이 한두 번 이어질 정도의 짧은 침묵.

패트릭이 천천히 입을 뗐다.

“아카데미는 내 마지막 선택지였어.”

마이어 가문의 가주는 일찌감치 장남을 후계자로 낙점해 두었다.

기대도 받지 못한 차남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노력해도 성장은 더디기만 했고, 가문에서의 입지는 좁아져만 갔다.

그렇게 아카데미를 선택했다. 숨 막히는 가문에서 도망이었으며, 헛된 유예였다.

그런데 레오를 만나고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평범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은 어느새 유망주가 되었다.

실제로 몇몇 가문에서 접촉해 오기도 했다. 부유한 영지를 가진 백작부터, 중앙 요직을 차지한 자작과 남작까지…. 그들은 아카데미 졸업 후 영지의 기사가 되어 달라는 제안을 건넸다.

“짜식, 인기 많아졌네? 이 형님이 다 뿌듯하다.”

레오는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교류전에서 보여 준 모습만 해도 충분히 여러 곳에서 입질이 올 만했으니까.

“처음 아카데미를 선택했을 때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길 바랐어. 그런데 막상 그 일이 닥치니 선뜻 대답을 못 하겠더라.”

“당연하지! 일찍 선택할 필요 없다. 칼자루 쥐고 있을 때는 몸값을 더 높이는 거야.”

“그리고 내가 왜 망설였는지 이제야 알았어.”

묘하게 엇갈리는 대화.

레오는 다시 패트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이스만의 기사가 되겠다.”

패트릭은 깨달았다.

이대로 안주하는 것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느리더라도 투쟁의 길을 걷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 결정, 후회하지 않게 해 주마.”

레오의 진심이었다.

넌 방금 굉장한 선택을 한 거야.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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