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진급 시험 (2)
“덱스는 왜 강의에 안 들어오는 걸까?”
유리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레오와 덱스가 아카데미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다.
반다이트의 국경에서 싸웠다는 그들에게 궁금한 것투성이인데, 덱스는 이후 한 번도 마법 학부 강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전사 학부 강의를 청강하고 있다던데?”
미간을 조금 찡그리며 답하는 세실.
그녀 또한 줄리앙 일행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것뿐이라 확실하지는 않다.
“전사 학부 청강? 왜 거기 강의를 들어?”
“글쎄? 걔, 원래 좀 이상하잖아.”
세실은 고개를 털레털레 저었다.
덱스만 생각하면 저절로 그때 그 체력 훈련이 생각나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 고통스러운 루틴을 매일매일 반복하라고 숙제로 던져 주고 사라져 버리다니.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이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걸까?”
“보나 마나 무슨 변덕이겠지. 뭘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래?”
전사 학부의 강의를 청강하는 마법사라니.
유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세실과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덱스의 행동은 엉뚱해 보였지만 항상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그 말도 안 되는 것 같던 체력 훈련의 덕도 톡톡히 보지 않았던가.
“세실, 요즘에도 그거 해?”
“응? 뭐를?”
“덱스가 알려 준 그거, 14번.”
“으윽….”
세실은 생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운동할 시간이 없으면 매일 딱 10분만 하라며 알려 준 열네 번째 체조.
제자리에서 엎드려 팔을 굽혔다가 펴고 다시 일어서는 간단한 동작의 반복이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10분은커녕 3분 만에 입에서 단내가 올라왔으니까.
그 얼굴을 본 유리아가 싱긋 웃었다.
“하고 있나 보구나?”
“으으… 죽을 만큼 힘들어도 효과는 좋았으니까.”
세실은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끄덕였다.
죽을 만큼 힘든 체조였지만 매일 하다 보니 신기하게도 점점 잘하게 됐다.
지금은 매일 아침 10분 루틴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몸이 찌뿌둥할 지경이다. 게다가 점점 몸매도 좋아지는 것 같아 끊을 수 없게 됐다.
“내일은 나타나겠지.”
“응.”
아무리 엉뚱한 덱스여도 내일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다름 아닌 마법 학부의 진급 시험이 있는 날이니까.
* * *
아카데미 1학년 진급 시험은 수십 년째 같은 방식이다.
도시 외곽의 작은 숲.
메퀸토가 고안한 마도구를 통해 나타나는 몬스터의 환영을 뚫고 무사히 숲을 가로지르는 것이 합격의 조건이다.
입학하고 첫 번째 진급 시험인 만큼 생도에 대한 많은 배려가 엿보이는 방식이었으나, 이 환영이 너무도 생생하여 패닉에 빠져 탈락하는 생도들이 한 해에도 몇 명씩은 꼭 발생했다.
“레오 바이스만, 준비됐나?”
인솔을 맡은 자크 교수가 시험 시작을 알렸다.
오늘은 전사 학부, 내일은 마법 학부가 이 숲에서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그냥 숲 반대편으로 나오면 된다 이거죠?”
“그래, 방향을 알려 주는 붉은 표식이 있을 거다. 교수들 또한 숲 곳곳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돌발 상황이 생기면 당황하지 말고 제자리에서 대기하도록.”
네 녀석이라면 문제없겠지만.
자크는 뒷말을 삼켰다.
고작 2학년 진급을 위한 시험이다.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는 산책이나 다름없는 난이도일 터.
“그럼.”
레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를 향해 걸었다.
긴장하려야 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본인의 실력은 둘째치고, 몬스터는 환영인 데다 친절하게 안내 표식까지 있으니 길을 헤맬 걱정도 없다.
이 얼마나 안전한가.
“빨리 들어가. 미적거리면 확 따라잡아 버릴 테니까.”
다음 순서인 클라인이 재촉했다.
그 또한 진급 시험을 위해 엊그제 막 아카데미에 도착한 차였다.
“나를?”
입구에 선 레오가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뒷사람에게 따라잡힌다고 바로 실격 처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존심 문제였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그 말을 남기고 레오는 숲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이왕이면 압도적으로 시험을 끝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신체를 강화하여 숲을 달리자 푸른 잎새가 휙휙 눈앞을 스쳤다.
입구에서 이어진 자그마한 오솔길의 흔적이 점차 사라질 때쯤 앞쪽에서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고블린 셋.
이마에 못보던 붉은 반점이 환영이라는 표식이리라.
쉬익-!
멈출 이유도, 속도를 줄일 필요도 없었다.
레오의 검이 번득이자, 놈들은 미처 돌아볼 틈도 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오, 정말로 진짜 같은걸.’
베는 감촉과 비산하는 피가 생생하다.
어떻게 이런 환영을 만들어 낸 거지? 새삼 메퀸토 영감의 능력에 다시 감탄했다.
스르륵-!
반으로 갈라져 죽은 놈들의 사체가 흩어져 사라졌다. 그 자리에 붉은 화살표가 떠올랐다.
이런 식이군.
단순하지만 명쾌했다.
레오는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다시 몸을 날렸다.
* * *
출구 쪽에서는 이오페와 네피르가 생도들을 기다리며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했다.
그들은 숲 곳곳에 배치한 통신 거울을 통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빠르군요.”
“검술보다도 저 노련함이 더 놀랍습니다.”
소드 마스터인 그에게 이 시험이 걸맞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당연히 손쉽게 헤쳐 나올 것을 생각했지만, 레오가 보이는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꺼내지 않는다. 최소한의 오러 소드와 신체 능력으로 곳곳에 배치된 몬스터를 학살하며 돌파하는데, 그 몸놀림이 너무나도 노련했다.
고블린부터 오크와 트롤을 거쳐 아울베어까지.
마치 놈들의 습성과 약점을 모두 꿰고 있는 듯한 몸놀림으로 가장 효율적인 공략을 선보였다. 한 마리든, 여러 마리든 숲을 달리는 레오의 발목을 잡는 몬스터는 없었다.
“시험다운 시험을 하려면 오우거라도 준비해야 했을 것 같네요.”
네피르의 중얼거림에 이오페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어쩌면 오우거도 부족할 테지.
그 말처럼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숲을 가로질러 달렸고.
파사삭-!
이윽고 수풀을 헤치고 레오가 등장했다.
“음? 끝인가?”
마지막에 나타난 트롤마저 양단하고 레오가 숲을 빠져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9분.
평균 합격선이 30분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숲을 일직선으로 달려 온 것이나 다름 없는 속도였다.
“그래, 끝이다. 여기 앉아서 구경이나 해라.”
“이오페 교수님, 이거 너무 짧지 않아요? 땀도 안 날 정도인데.”
“자네가 너무 우수한 탓이니 시험을 탓하지 말게.”
“그래서 말인데… 조기 졸업도 가능합니까?”
레오는 넉살 좋게 이오페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기 졸업에 대한 질문은 진심이다. 지금 당장은 아카데미를 통해 얻어 낼 것이 있지만 그것이 오래 갈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이왕 입학했는데 중도 퇴소보다야 졸업이 낫지 않은가.
“…고려해 보마.”
이오페도 진지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그를 아카데미에 붙잡을 명분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껏 이 정도로 규격 외 실력을 보인 생도는 없었으니까.
조기 졸업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지 내규를 확인해야 할 것 같다.
“이제야 다음 생도가 진입했군요.”
네피르가 통신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10분마다 다음 생도가 진입하는 방식이다. 다음 주자는 클라인이었고, 그 또한 진입하자마자 전속력으로 숲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 녀석도 소드 마스터라고 했지….’
이오페는 저도 모르게 관자놀이를 잡았다.
한 학년에 소드 마스터가 둘이라니, 자신보다 뛰어난 제자들에게 뭘 가르쳐야 할지 부담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야, 진짜 따라잡아 볼 생각이었나? 그런데 어쩌냐, 난 벌써 나왔는데.”
그런 이오페의 고민을 아는지 레오는 거울을 보며 킥킥거렸다.
클라인은 몬스터에 대한 부족한 경험을 전투 센스로 메웠다. 둘이서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하지 않는다. 하긴 환영을 상대로 불을 뿜어 봐야 애꿎은 나무만 불탈 것이니.
파삭-!
잠시 후 클라인도 수풀을 헤치고 종료 지점에 도달했다.
다음 차례인 무무카가 막 입구에 진입한 시점이었다.
“늦었네?”
어서 와서 앉으라는 듯 손짓하는 레오.
“쳇, 생각보다 코스가 짧았어.”
“사내새끼가 변명은….”
나머지는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생도들이 속속 숲에 진입했고 대부분 30분 언저리에 빠져나왔다.
레오 9분, 클라인 11분, 무무카 13분, 패트릭 19분 정도가 눈에 띄는 기록이었다.
“교수님, 작년 기록은 어땠어요?”
“작년이라…. 베일 그리먼이 15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베일? 아, 그 오지랖 넓은 양반.”
교류전에서 맞붙었던 상대였으니 금방 떠올랐다.
확실히 그 대검으로 펼치는 검술은 위협적이었지. 오지랖 때문에 좀 짜증 나긴 했지만.
“시험이 끝난 생도는 돌아가도 좋다.”
백여 명에 달하는 전사 학부 생도들이 모두 시험을 치르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린다.
진급 시험을 끝으로 후반기 공식 일정이 종료되기에 여기에서 곧바로 본인의 영지로 떠나려는 이들도 꽤 있었다.
“난 이만 갈게. 또 보자.”
클라인도 그중 하나였다.
레오와 무무카, 패트릭과 악수를 나누고는 마차를 타고 떠났다. 지난 전쟁 이후 영지에 대한 책임감이 부쩍 커진 듯 보였다.
“아아- 칼 저렇게 쓰는 거 아닌데.”
“에헤이! 바로 대가리부터 따야지!”
레오는 느긋이 통신 거울에 훈수를 두며 자리를 지켰다.
그간 발견하지 못한 새싹이 있을까 열심히 지켜봤지만, 마지막까지 다들 고만고만한 실력들이었다.
“교수님, 내일 마법 학부 시험이죠?”
레오는 숲에 들어가 주섬주섬 마도구를 회수하는 이오페에게 따라붙으며 물었다.
“그렇다만?”
“내일 저도 참관해도 됩니까?”
“안 될 것 없지.”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죠!”
무무카, 패트릭과 함께 가까운 마을에서 하루 묵고 내일 다시 이곳으로 올 생각이다. 어차피 내일 덱스 놈을 데리고 바이스만으로 돌아갈 생각이니까.
‘겸사겸사 쓸 만한 마법사가 더 있는지도 한번 보고.’
상대적으로 마법 학부 생도들에 대한 정보는 적었다.
덱스를 제외하고는 유리아 황녀 정도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 옆에 딱 붙어 다니는 세실이나 줄리앙 삼인방의 실력도 대충 짐작만 할 뿐 제대로 확인한 적은 없었다.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같은 방식으로 마법 학부의 시험이 시작됐다.
“전위 없이 혼자라고 생각하니까 조금 불안하네.”
“걱정 마! 유리아는 잘할 거야.”
“그래, 세실 너도.”
유리아와 세실은 서로를 격려하며 전의를 다졌다.
단독으로 숲을 돌파해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긴장됐지만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잘할 수 있겠지?”
“파블로, 니앙, 자신감을 가져! 셋이서 프로인 숲도 다녀왔잖아.”
“줄리앙!”
전위 없이 마법사 셋이서 길드 임무를 진행한 줄리앙 그룹도 서로를 격려했다.
이들은 프로인 숲 외곽에서 고블린과 코볼트를 상대하며 경험을 쌓았다. 실전을 통한 끈끈한 연대감 속에서 줄리앙은 든든한 리더로 변모했다.
“교수님! 어제 전사 학부 시험은 어땠습니까? 혹시 탈락자도 나왔나요?”
“탈락자는 없었다. 매년 탈락자는 마법 학부였지. 더 긴장해야 될 거다.”
“으으….”
자크 교수의 대답에 생도들이 몸을 움츠렸다.
근접전이 약하고 전위도 없이 혼자라는 점에서 이번 시험이 마법 학부에게 불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마법 학부 맞나?”
자크의 시선이 한 생도에게 향했다.
지팡이를 비롯해 가벼운 복장을 한 마법사들 사이에, 판금 흉갑 무장에 메이스까지 든 영락없는 전사가 한 명 섞였으니까.
“예, 마법사 맞습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생도.
다시 보니 최근 무기술 실습을 청강하겠다던 그 괴짜 녀석임이 분명했다. 별 미친놈이 다 있다고 생각하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 그렇구먼.”
자크는 더 캐묻지 않고 눈을 피했다. 잘못 엮이면 안 된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크흠,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는… 덱스, 덱스 생도가 누구지?”
“접니다.”
메이스를 들고 있던 그 생도가 앞으로 나섰다.
“미리 설명한 대로 몬스터는 환영이니 걱정할 것 없다. 나타나는 표식을 따라 숲을 빠져나가면 시험 종료다.”
척척척, 입구에 선 덱스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파이어.”
들고 있던 메이스에 화염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몸이 총알처럼 숲속으로 돌진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