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바이스만의 기록 (1)
두 대의 마차가 줄지어 바이스만으로 향했다.
올빼미 문양이 그려진 검은 마차의 주인은 당연히 레오다. 애당초 함께 돌아갈 예정이었던 덱스, 무무카와 더불어 패트릭이 바이스만의 마차에 합류했다.
그 뒤를 따르는 마차는 더욱 이목을 끌었다.
흰 바탕에 새겨진 금빛 문양, 황실의 표식이다. 안에는 제국의 3황녀 유리아가 언제나처럼 세실과 함께했고, 호위 기사 카티스가 말을 타고 마차 옆을 따랐다.
“야, 덱스, 쟤들은 왜 갑자기 따라오는 거냐?”
“갑자기 바이스만에 가 보고 싶다던데?”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아 씨, 괜히 머리 아프네.”
레오는 관자놀이를 꾹꾹 매만졌다.
분명 바이스만 방문은 핑계다. 진짜 목적은 덱스 저놈인 것이 틀림없다.
진급 시험을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뭔가 싶긴 했다. 덱스 놈의 뻘짓에 유리아가 감명받은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맨주먹으로 트롤을 두들겨 패는 미친 짓을 똑같이 따라 할 리 없다.
시험을 끝내고 숲을 빠져나온 유리아의 얼굴은 꽤 상쾌해 보였다. 네피르 교수는 반대로 사색이 되어 식은땀만 흘렸지만.
“나중에 메퀸토 영감한테 욕먹는 거 아닌가 몰라….”
소중한 제자에게 이상한 물을 들여 놨다고 분명히 한 소리 들을 것 같다.
* * *
“영주님, 무사 귀환을 환영합니다.”
어떻게 미리 알았는지 외성 문에 닿기도 전에 지오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충! 영주성까지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1번 올빼미이자 이제는 백인장이 된 발트란도 함께였다.
덱스는 일백 명의 올빼미들은 각각 번호를 부여했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작은 숫자일수록 병사들 사이에서 더 인정받는 듯했다.
“뒤쪽 마차도 함께 호위해라. 귀빈이 계신다.”
“명 받들겠습니다!”
레오의 명령에 발트란은 일절 질문 없이 병사들을 움직였다.
지오르가 마차 쪽으로 말을 바짝 붙이며 물었다.
“황실의 마차로군요. 혹시 3황녀님이십니까?”
“그래 맞아.”
레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오르에게 하대하는 것은 아직 어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영주는 말 그대로 영지의 지배자. 사적인 친분과 별개로 언제나 위엄을 보여야 하는 입장이었으니.
“…영주성으로 미리 가서 준비해도 되겠습니까?”
지오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실의 마차를 발견했을 때부터 굳어 있긴 했는데 확인 사살까지 당해 석상이 된 듯하다. 하기야 예고 없이 황족이 방문해 버렸으니 행정관으로서 속이 타겠지.
“과한 의례는 필요 없다. 어디까지나 아카데미 동기로서 방문이니까.”
지오르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그렇게 전했다.
황녀 본인도 그렇게 말했으니 없는 말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최소한의 준비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맡기지.”
말 위에서 고개를 숙여 보인 지오르가 먼저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그 ‘최소한’이라는 것에 꽤 차이가 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귀찮아질 것 같다. 이게 다 덱스 저놈 때문이다.
“미리 말하는데 바다는 절대 안 갈 거니까.”
지긋이 노려보자 눈이 마주친 덱스 놈이 단호하게 응수한다.
그렇게나 바다가 싫었나….
“…시끄러워.”
다시 관자놀이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 슈니는 어디 있지? 손을 뻗자 익숙한 부드러운 털이 만져진다.
레오의 마음에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황실 마차, 세실도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유리아, 정말 덱스에게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셈이야?”
“응, 그렇게 정했으니까 말려도 소용없어.”
단호한 대답이다. 유리아가 이 정도까지 말하는 것은 정말 단단히 마음먹었다는 뜻.
둘에게는 메퀸토라는 엄연히 스승이 있다. 당연히 덱스를 정식 스승으로 모시겠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아니,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유리아가, 다름 아닌 황녀님이 덱스에게 가르침을 청한다는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유리아는 4서클이고 덱스는….”
“덱스도 마찬가지야.”
“어?”
“덱스도 이미 4서클이라는 뜻이야. 이제 내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없어.”
“…말도 안 돼.”
세실은 말문이 막혔다.
그가 2서클이었던 것이 몇 달 전이다. 그사이 두 단계나 성취를 얻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3서클로 입학해서 3서클로 졸업하는 이들이 태반인 것을 생각하면 실로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세실, 나는 덱스가 백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생각해.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것은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야. 오히려 그런 인물에게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행운 아닐까?”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이해해 줘서 고마워, 세실.”
세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유리아의 결심이 너무도 확고한데다 말릴 명분조차 없다.
울컥 감정이 북받쳤다. 하얀 손가락이 제복 자락을 슬며시 움켜쥐었다.
분하고 서운했다. 어느 순간 유리아의 눈이 계속해서 덱스를 찾는 것만 같아 신경 쓰이곤 했다. 그런데 유리아가 그를 이렇게까지 고평가하고 있을 줄이야.
‘내가 더 잘했다면….’
유리아의 옆자리를 빼앗길 것만 같은 불안감마저 들었다.
[세실, 황녀님의 놀이 친구가 되지 않겠느냐.]
[하겠어요, 아버님!]
여섯 살에 황궁에 들었다.
아버지의 기대는 온통 쌍둥이 오라버니에게 쏠려 있었기에, 다른 방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친구가 생긴다는 두근거림도 잠시, 어린 세실에게 황궁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같은 나이였음에도 황녀는 더 어른스럽고 기품이 흘렀다.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까 세실은 언제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언제나 따뜻하게 바라봐 주는 집사도 없다. 어리광을 받아 줄 유모도 없다. 황궁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를 찌르는 가시와 같아서 항상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두 달에 한 번 본가를 찾을 수 있었다.
갑갑한 황궁에서 벗어나 편히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시간.
아버지 베니에르 백작은 집을 비울 때가 더 많았다. 언제나 살가웠던 오라버니 줄리앙은 어느 날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본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도대체 뭘 위해서…?
안락한 집을 떠나 황궁 생활을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 나도 가끔 그러는걸.]
그런 세실의 마음을 보듬어 준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황녀였다.
황태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1황자 슈나이더와 2황자 크롬멜의 세력 다툼에 황궁은 언제나 살얼음판 같았다. 어린 3황녀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그녀의 선택은 칩거였다. 살아남기 위해 황궁에 틀어박힌 황녀와 돌아갈 곳을 잃은 세실.
그렇게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덜컹.
마차의 소음이 세실의 짧은 상념을 깼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겨우 이런 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자신은 유리아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하고 유일한 친구로 남아야만 하니까.
“…그러면 나도 같이 배워도 될까?”
“정말이야? 고마워, 세실!”
화색을 보이는 유리아에게 세실은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슬프고 힘들어도 웃어 보이는 것. 그것은 세실이 황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먼저 배운 것이었다.
* * *
“충! 근무 중 이상 없습니다!”
외성문을 지키던 병사의 쩌렁쩌렁한 경례를 받으며 레오의 마차가 성내에 들어섰다.
“수고해라.”
“충!”
레오는 병사에게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경례에 답했다.
지오르의 언질은 있었겠지만 외성문은 옛날 흐리멍덩했던 인상과 꽤 달라졌다. 지금 보니 군데군데 부서졌던 성벽도 말끔히 보수되었고, 울퉁불퉁 요철이 심했던 도로도 깔끔하게 정비된 상태였다.
‘지오르가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고 있군.’
유능한 행정관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대목이었다.
“영주님께서 돌아오셨어!”
“영주님…!”
레오의 마차를 발견한 영지민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숙였다.
영주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 하기에는 다들 진심 어린 얼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새 영주가 오고 나서 다들 달라진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리라.
세금이 줄어드니 당장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영주성 주도로 도로 정비와 치수 공사 등 각종 사업이 전개되어 편의가 늘었다.
자연히 일자리가 늘어났고 일하기 위해 바이스만을 찾는 이들도 많아졌다. 영지민의 수입이 늘고 사람이 몰리니 자연히 시중에 도는 돈도 늘었다.
바이스만 영지는 그 어느 때보다 활기에 차 있었다.
“너 인기 많아졌다?”
“큼, 인기는 무슨.”
레오는 괜히 쑥스러워 커튼 뒤로 얼굴을 숨겼다.
영주의 마차 곁을 따르는 발트란의 허리가 덩달아 꼿꼿해졌고, 뒤에서 황실 마차의 곁을 지키며 따르던 호위 기사 카티스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윽고 도착한 영주성 앞에는 일백 가량의 병사가 도열해 있었다.
레오는 굴트 영주 대리 하에서 처음 영주성을 방문했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그때는 정말 오합지졸들이 모여 목청만 높이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엄중한 군기가 흘렀다.
쿵. 쿵. 쿵. 쿵.
가운데 통로를 남기고 양쪽으로 나뉘어 선 병사들이 창끝으로 바닥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가 마치 전장의 북소리를 떠올리게 했다.
이윽고 두 대의 마차가 멈췄다.
레오와 일행이 먼저 마차에서 내리자, 호위 기사 카티스가 기다렸다는 듯 황실 마차의 문을 열었다. 흰 마차로부터 유리아와 세실이 차례로 내렸다.
쿵. 쿵. 쿵. 쿵.
바이스만 병사들은 그때까지도 절도 있게 환영의 예를 갖추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엄정한 군기를 보이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아, 이거 조용히 데리고 들어갈 분위기가 아니네.’
레오는 짧게 혀를 찼다.
영주성을 등 뒤로 하고 앞으로는 황녀를 맞이하는 상황. 평범하게 맞으려 했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 아카데미에서야 친구라지만 엄연히 상대는 제국의 황녀다. 본인이 괜찮다며 편하게 대해 달라고 했다지만 다른 눈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영주로서 황실의 인사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맞다.
레오가 조용히 오른손을 들자.
쿵!
동시에 병사들이 움직임이 멈추었다.
“천년 제국 아슐렌에 영광이 있으라. 존귀한 걸음을 행하신 황녀님께 바이스만의 영주로서 환영의 뜻을 표합니다.”
레오는 허리를 숙이며 예를 보였고, 유리아는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그 인사를 받았다.
“바이스만 남작, 갑작스러운 방문에 환대해 주어 감사합니다. 바이스만의 올빼미들이 용맹하다 소문이 자자했는데 과연 그러해 보이는군요. 제국을 향한 그대의 충정과 진심이 충분히 전해집니다.”
“과찬이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레오가 이끄는 방향으로 유리아가 기품 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세실과 카티스가 조금 거리를 두고 따랐다.
“쟤들 갑자기 왜 그러냐….”
평소 아카데미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광경에 덱스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중얼거렸다.
회귀 전, 귀족 사회에 대해 여러 경험을 가진 레오와 달리, 덱스는 그 방면에 무지했다. 그러니 지금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본 기분이었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거다.”
덱스의 등을 툭 친 무무카는 곧바로 병사들을 인솔했다.
무무카도 그런 분위기에 익숙지 않은 건 마찬가지. 차라리 기사의 본분을 행하는 편이 나았다.
“올빼미들, 그간 별일 없었나!”
“악!”
“바로 훈련장으로 간다! 그간 농땡이 친 녀석들은 없는지 한번 봐야겠다!”
“악!”
무무카는 패트릭에게 따라오라 눈짓했다. 이참에 신입 기사 패트릭을 소개할 셈이다.
레오는 영주성으로, 무무카와 패트릭은 훈련장으로 갈라졌다.
“어? 나는?”
잠시 우왕좌왕하던 덱스는 무무카의 뒤를 쫓아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쪽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다.
* * *
바이스만의 행정관, 지오르의 집.
“아버님께서 돌아오셨어?”
“예, 아가씨. 영주님의 마차도 도착한 모양입니다.”
시종의 대답에 마법서를 읽던 샤를롯은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반년 사이 조금 키가 자라긴 했다만 여전히 의자에 앉으면 발이 공중에 떴다.
“그러면 스승님도 같이 돌아왔겠네? 성으로 갈래!”
샤를롯이 눈을 반짝였다.
덱스에게 그간의 성취를 보여 줄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