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바이스만의 기록 (2)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덱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오랜만에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영주성에 돌아왔더니 유리아와 세실이 대뜸 그리 말했다.
“너희가 뭐가 부족해서 나 같은 놈한테 배워?”
자그마치 대륙 최고의 대마법사를 스승으로 모신 두 사람 아닌가.
게다가 한 명은 제국의 황녀, 다른 한 명도 내로라하는 백작가의 영애이다. 찾기만 한다면 가르치고 싶다는 마법사가 줄을 설 텐데 뭐가 부족해서?
“그리고 나 가르치는 거 잘 못 해.”
덱스는 에둘러 거절의 뜻을 밝혔다.
가르치는 데 소질이 없다는 것도 거짓이 아니다. 샤를롯의 마법을 본격적으로 봐주며 그것을 깨달았다.
잘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그냥 하면 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부탁할게. 이건 제국의 황녀가 아니라 동기로서 부탁이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일 것 없어. 지난번에 체력 훈련도 도와줬잖아? 그냥 그런 느낌으로 조언을 구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게 말해도….”
“하라는 건 뭐든 할게. 그때 그 체력 훈련, 우리 아직도 하고 있다니까? 그렇지, 세실?”
“맞아. 특히 14번 체조는 매일 눈뜨자마자 해. 보여 줄까?”
“아, 아니 됐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덱스도 거절하기가 궁색했다.
바이스만까지 따라온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오는 동안 레오가 내내 심란해하던 것에 뒤늦게 생각이 닿았다.
“솔직히 말해서 뭘 가르쳐야 할지도 모르겠고….”
“괜찮아! 뭐든지 할 테니까.”
“뭐든지 한다고? 흠….”
한풀 꺾인 반응을 보이자 유리아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덱스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일단 해 보자. 뭐든지 한다고 했다?”
“물론이야!”
양팔을 번쩍 들며 기뻐하는 유리아.
덱스의 미소가 불길하다고 생각한 것은 세실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유리아와 세실은 바닷가 땡볕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훈련이야?”
세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바닷물을 대충 가둬 놓은 갯벌에 데려와서는 한다는 소리가 대뜸 마법으로 바닷물을 증발시키라니. 그것도 파이어 한 가지 마법만 사용하라고?
처음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땡볕에서 시작했다.
오늘따라 쨍쨍한 태양과 짠 내를 머금은 미지근한 바닷바람에 금방 온몸이 끈적해졌다.
그나마 어디선가 달려온 붉은 머리의 여자가 의자와 차양 막을 준비해 주지 않았다면 진작 탈진해 쓰러졌을 것이다.
“덱스에게 다 생각이 있을 거야.”
유리아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쓸데없는 의구심은 버리기로 했다.
1서클 파이어.
그것만으로 한 시간 안에 저 바닷물을 모두 날려 버리라니.
처음에는 불덩이를 최대한 많이 생성하려 했다. 하지만 개수가 늘어날수록 각각의 화력과 위치를 조정하는 것이 까다로웠다. 게다가 장시간 유지해야 하니 전체 마력 소모량도 고려해야 한다.
고작 1서클 마법이라지만 이렇게 다량으로 광범위하게 장시간 유지하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
유리아가 그렇게 답하니 세실도 말을 줄였다.
그녀에게도 새로운 경험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초장거리 마라톤을 하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단거리 전력 질주라면 고통스러운 시간이 짧을 텐데, 가벼운 뜀걸음으로 끝없이 트랙을 달리는 느낌.
체력과 마력보다 오히려 정신력의 싸움에 가까웠다.
바닷가까지 따라온 호위 기사는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지켰고, 그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덱스는 블레아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외부인을 갑자기 데려오면 어떡해요! 그것도 제국의 황녀님이라니요?”
“그래서 염전으로 안 가고 떨어진 곳으로 왔잖아요.”
“보안은 둘째치고… 황녀님을 저렇게 땡볕에 두면 되겠냐고요. 아까 그 호위 기사님 눈빛 못 봤어요? 차양을 치는 게 늦었으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니까요?”
“에이, 호들갑은….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정말이죠? 믿어요? 저 이제 가요?”
블레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계속 뒤를 돌아봤다.
그녀가 천재 마법사의 실체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재들은 다들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더니 딱 그 느낌이다.
“빨리 가라니까.”
덱스는 연신 뒤를 돌아보는 블레아의 등을 밀어 보냈다.
참 걱정이 많은 여자다. 무슨 차양 막까지 준비한다고 호들갑인지…. 정 더워 보이면 머리에 물 정도나 뿌려 주려고 했는데.
슬슬 한 시간이 되었다.
얼마나 증발시켰으려나? 중간 점검 겸 휴식 시간을 줄 때였다.
“잉?”
둘이어야 할 사람이 셋으로 늘어 있었다. 물론 호위 기사는 제외한 숫자다.
“넌 또 언제 왔어?”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똑같이 땀을 흘리고 있는 꼬마, 샤를롯이다.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나는 스승님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야, 그게 아니고…. 일단 좀 쉬었다가 다시 하자. 한 시간 휴식!”
샤를롯이 입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덱스가 직접 마법을 봐준다고 해서 아버지를 따라 바이스만에 넘어왔는데, 정작 얼굴 보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일하러 바닷가에 가 있다고 하더니 어느 날은 갑자기 아카데미에 돌아갔다고. 겨우 바이스만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영주성에 쫓아왔는데 다시 바다에 갔단다.
결국 샤를롯은 스승을 잡으러 직접 여기까지 달려왔다.
“스승님, 진짜 너무해! 수제자를 버려두고 다른 제자를 들인 것도 서러운데, 몰래 비밀 훈련까지 한 거야? 하여간 남자는 다 똑같다니까!”
덱스는 왠지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서러움이 묻어나는 샤를롯의 외침에서 요즘 수도에서 유행한다는 연극이 떠올랐다. 어린 본처를 버리고 사방팔방 다리를 걸치던 바람둥이가 결국 파멸하는 내용이라고 했던가?
덱스를 바라보는 유리아와 세실의 시선이 괜히 차갑게 느껴졌다.
“샤를롯,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잔뜩 화난 고양이 같은 눈빛을 받은 덱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한 번 봐주도록 할게, 나는 마음이 넓은 제자니까.”
“그, 그래, 고맙다.”
“좋은 언니들이라서 특별히 봐주는 거야, 다음부터 이러면 안 돼!”
가슴팍에도 안 오는 꼬마의 능숙한 밀당에 덱스가 쩔쩔매는 사이.
샤를롯의 뒤로 다가간 세실은 능숙하게 양 갈래로 땋은 머리를 매만졌다.
“내년에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던데? 몇 살이야? 어쩜 이렇게 귀엽니? 어머, 볼 말랑한 것 좀 봐!”
“아우우….”
세실의 손이 어느새 샤를롯의 볼을 잡아 늘이고 있다.
말랑말랑 쫀득쫀득한 빵 반죽 같은 촉감에 손을 떼지 못하는 세실. 그 덕에 덱스도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셋이 인사는 벌써 했나 보네?”
“덱스, 제자가 있는 줄 몰랐어. 괜히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땀에 젖은 은색 머리칼을 넘기며 유리아가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냐, 내가 말을 안 한 건데, 뭐.”
“우으으…!”
찌릿.
샤를롯의 시선이 덱스를 다시 한번 찔렀다.
“내가 말을 ‘못’ 한 거지. 깜빡하고 ‘못’ 했어. 아하하하….”
미녀. 그리고 바닷가.
분명 남자라면 환장할 키워드의 조합인데, 어쩐지 덱스에게는 괴롭기만 했다.
* * *
“저 책은 뭐지?”
레오는 집무실 책상을 가리키며 시종에게 물었다.
못 보던 책이 놓여 있었다. 먼지는 닦아 낸 것 같지만 가죽 표지 곳곳이 갈라지고 얼룩져, 보관 상태는 그리 좋지 않다.
“지하에 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고가 있었습니다. 전 영주 대리가 그대로 방치했던 모양입니다. 대부분 잡다한 것이었는데 행정관이 그 책은 따로 챙겨 영주님께 말씀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래? 꽤 오래되어 보이는군.”
“행정관 말로는 쓰인 문자를 알아볼 수가 없다고….”
알아볼 수 없는 문자라…. 고대어일까?
레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고대어의 기록이 발견되곤 한다. 개중에는 이처럼 서적의 형태도 있었는데 대부분 귀족의 허영심을 채우는 사치품으로 거래되곤 했다.
표지만 갈아 끼우면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그리고 황녀님을 위한 저녁 만찬은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필요 없다. 아마 며칠 후에나 돌아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다시 혼자 남은 집무실.
레오는 빈방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크게 변한 것 없는 모습이다. 지오르가 없었다면 저 빈 책상에 지금쯤 서류가 한가득 쌓였을지 모른다.
창을 통해 시끌벅적한 훈련장을 내려다보았다.
패트릭을 상대하던 병사가 나가떨어지는 광경이 보인다. 신입 기사의 인사 겸 신고식은 잘 진행되는 모양이다.
털썩, 자리에 앉으니 아까 그 고서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디 한번 볼까?”
낡고 더러운 가죽 표지를 열었다.
책 내부는 생각보다 깨끗했는데 얇고 매끈한 속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촉감이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첫 장을 넘기자, 그다음 장에 시종의 말대로 모르는 문자가 나타났다.
[이것은 후손을 위한 나의 기록이다. 오직 메이너드 바이스만의 피를 이은 자만이 이 기록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응?”
레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신기한 현상이었다. 분명 알지 못하는 문자임에도 의미가 자연스레 이해됐다.
게다가 메이너드 바이스만이라고? 어머니에게 전해 들은 선 대 남작이자 외현조부의 이름이다.
바이스만이라는 성을 처음 사용했으며,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졌다는 선대 남작의 기록.
영주성 지하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니, 이곳의 지명이 바이스만인 것은 분명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메이너드 바이스만. 바이스만 가문의 시조이며….]
비밀을 엿보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귀족가에서는 오직 혈족에게만 전승하는 비밀스러운 방식이 있다고 들었다. 오직 혈족만 이해할 수 있다는 이 장치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겠지.
문자를 따라 움직이던 레오의 눈이 멈췄다.
생소한 단어의 나열에 그 눈동자에는 의아함이 가득 떠올랐다.
[한국 이름은 이현이다.]
[나는 여신의 소환으로 이 세계에 전이됐다.]
“…무슨 말이지?”
한국.
여신의 소환.
전이.
짧은 문장 속에 개념을 알 수 없는 단어가 몇 개나 섞여 이해를 방해했다.
다시 한번 천천히 그 의미를 추측해 보려는 와중, 머릿속에 폭풍이 이는 듯한 감각이 덮쳤다.
“으윽….”
레오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신음했다.
누군가 손으로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은 고통스럽고 불쾌한 감각이 이어졌다.
동시에 알 수 없었던 단어의 의미가 강제로 머리에 주입됐다. 그저 모르는 문자의 뜻이 이해되던 것과 다른 폭력적인 감각이었다.
이윽고 고통이 사라지고, 잠시 멍하게 앉아 있던 레오가 중얼거렸다.
“…내 선조가 다른 세계에서 온 자라고?”
충격이었다.
바다 건너 다른 대륙도 아니고 다른 세계라니.
지구.
한국.
단어의 개념은 강제 주입되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완전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 게임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다. 강제로 게임 속에 끌려 온 내게, 여신은 세계를 올바른 엔딩으로 이끌어 달라 했다.]
게임? 엔딩?
개중에는 여전히 완벽히 이해되지 않는 개념도 있다.
대략적인 의미는… 아마도 세계를 구하라는 뜻인 걸까?
[나를 소환한 것은 게임 튜토리얼에 등장했던 여신 아메리아. 나는 여신에게 소리쳤다. 왜 멋대로 사람을 데려온 거냐고, 왜 하필 나냐고. 여신은 전 차원에서 한국인보다 더 유능한 종족이 없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그들에게는 여섯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느냐면서.]
일그러진 레오의 미간이 펴질 줄 몰랐다.
이해한 것은 선조가 한국인이라는 유능한 종족이기에 선택받았다는 내용뿐.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여신은 ‘꿰뚫어 보는 눈’과 ‘오러 친화’를 선물했다. 이 두 가지 능력으로 악마 게르베를 물리치고 세계를 올바른 엔딩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이 대목에서 줄곧 일그러져 있던 레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여신에게 선물받았다는 능력.
‘꿰뚫어 보는 눈’의 개념을 이해하자 자연히 오러안이 떠올랐다.
대상의 구조와 약점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 그것은 메이너드 바이스만이 여신에게 받았다는 ‘꿰뚫어 보는 눈’의 기능과 매우 유사했다.
‘오러 친화’도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에도 스스로 오러를 깨닫고 엑스퍼트 상급까지 올랐다.
감히 말하지만 일개 용병이 혼자서 넘볼 만한 경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드 마스터의 벽을 넘어 그 이상의 경지를 넘보고 있다.
모두 선조가 여신에게 받았다는 능력과 연관된 것이 틀림없다.
[악마의 목적은 이 세계를 마기로 물들이는 것. 마계와 통하는 문이 완전히 열리면 대륙은 마물로 가득하게 된다. 그것이 배드엔딩이다.]
마물이라는 단어에 레오의 미간이 움찔했다.
마계와 통하는 문.
대륙을 가득 채운 검은 마물.
회귀 전에 겪었던 지옥 같은 광경이 떠올랐다.
허무맹랑한 내용이라 생각했지만 믿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가진 특별한 능력. 그리고 검은 마물에 대한 단서까지.
읽을수록 신빙성이 더해졌기에.
[마침내 악마 게르베를 봉인했다. 완전 소멸을 바랐으나 그러기에는 나도, 여신도 힘이 부족했다. 여신은 악마 봉인에 모든 힘을 소진했다. 그 결과 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여신의 힘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죽은 다음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 정착한 지 올해로 20년째. 이곳에서 아내를 얻었고 아이를 낳았다. 이대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과연 제대로 엔딩에 도달한 것일까? 이에 대답할 여신은 잠들어 깨어날 줄 모른다. 게르베를 소멸시키지 못한 것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줄곧 불편하게 남았다. 봉인된 악마가 다시 깨어나는 것은 클리셰 중의 클리셰. 게르베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는 확신은 점점 강해졌다.]
[게르베를 봉인하고 여신에게 받은 보상, ‘과거 회귀’. 나는 이것을 펜던트에 담았다. 언젠가 게르베가 깨어나 세계가 다시 위기를 맞았을 때, 나의 후손이 유용하게 사용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레오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마물의 등장부터 자신의 회귀까지, 이제야 모든 것이 연결되는 기분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