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83화 (83/127)

83. 바이스만의 기록 (3)

풍요와 자애의 여신 아멜리아.

대륙의 유일신으로 숭배되는 존재.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신전의 힘은 강력했다.

여신의 기적을 행하는 신전 앞에서는 제국의 황제도, 한 나라의 국왕도 고개를 숙였다. 국가와 국가, 영지와 영지의 전쟁이 횡행하던 시기에도 신전만큼은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신전의 힘은 급격하게 축소되었다.

사제는 신성력을 잃었고, 성녀는 더 이상 축복의 기적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일부 사제들은 신도를 속여 사리사욕을 채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신도의 믿음이 흔들리며 기부금이 대폭 줄었다. 이에 믿음이 약한 사제들부터 속속 신전을 떠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대략 맞아.’

악마 봉인에 힘을 소진한 여신.

기록된 시기와 신전의 세력이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한 때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여신은 잠들었다.

그로부터 백 년 이상 훌쩍 지난 지금, 대륙 북단의 마지막 신전에 남은 사제들이 여신에게 기도를 이어 가고 있었다.

레오는 눈을 감았다.

흑마법사들의 수상한 움직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도구, 켈시온 백작과 요크 후작…. 모두 악마와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메이너드 바이스만의 염려대로 악마가 힘을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배드엔딩.

마물에 의해 멸망하는 세계.

‘난 이미 한차례 그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또다시 같은 결말을 맞을 수는 없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오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마탑에 있을 메퀸토에게 또 하나의 단서를 전할 생각이다.

악마의 진명(眞名).

그것이 메퀸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

* * *

바이스만의 북부 바닷가.

유리아, 세실, 샤를롯은 바닷물을 증발시키고, 덱스는 여분의 마나 화력석을 만드는 나날이 일주일째 이어졌다.

오로지 1서클 마법만 반복하는 의미 없는 시간.

적어도 처음 세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충분히 숙련된 마법을 반복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사흘째부터는 그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충분히 숙련되었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이 정도로 미세한 조정까지 가능했던 거구나…!”

그간 술식을 완성하는 속도에만 치중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빠르다며 스스로 만족했기에 더 파고들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덱스의 훈련은 그간 쌓아 올린 자신의 마법을 말 그대로 기초부터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마력의 연결, 방출 수율, 미세 조정까지… 모든 것을 다시 고민하게 했다.

“덱스, 나 잠깐 성에 돌아가도 될까?”

그렇게 열흘째 아침.

바닷가에 나오자마자, 세실은 복잡한 얼굴로 덱스에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강요하는 훈련이 아니잖아?”

“세실….”

덱스는 개의치 않았다. 함께 있던 유리아는 당황했지만 차마 세실을 말리지 못했다.

둘의 반응에 세실은 아차 싶은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오해하지 마. 훈련이 싫어서 그만두겠다는 뜻이 아니야.”

싫어서 그만두는 게 아니라고?

덱스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사실 뭘 가르쳐야 할 줄도 몰랐고, 일단 시간을 좀 벌어 보자는 생각으로 바닷가로 데려온 것뿐이다.

처음 사흘은 딱 예상한 반응이었다. 유리아는 그나마 표정 관리가 됐지만, 세실은 당장이라도 욕을 퍼붓고 때려치울 분위기였으니까.

그런데 나흘째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리아는 처음부터 불만을 보이지 않았고, 샤를롯은 스승님의 큰 뜻을 외치며 맹목적인 믿음을 보였다. 여기에 세실까지 열의를 보이기 시작하니, 덱스도 중단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나, 뭔가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아.”

복잡 미묘하지만 두근거림이 묻어나는 세실의 선언.

그것이 네 번째 고리에 대한 실마리라는 의미를 알아챈 유리아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다.

“너무 잘됐다! 힘내 세실! 꼭 해낼 수 있을 거야.”

“응, 반드시 고리를 엮어 낼게!”

유리아의 손을 잡고 의지를 다진 세실의 시선이 덱스를 향했다.

그 눈빛이 지금까지와 너무 낯설었다.

“덱스.”

“어? 어어?”

크게 한 걸음 다가오는 세실.

덱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고맙다고? 나한테?”

덱스의 눈동자가 다시금 흔들렸다.

이거 농담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세실은 언제나 자신과 거리를 뒀다.

첫 만남도 썩 좋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타입이 아닌 듯했다. 그런데 지금 그 거리감이 순식간에 좁아진 기분이다.

“…네 뜻을 모르고 잠시나마 안 좋은 마음을 품었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깨닫게 해 줘서 고마워.”

“아냐, 미안할 건 없는데….”

뜻? 무슨 뜻?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도움을 청하려 유리아에게 고개를 돌렸지만 엄청나게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어 일단 입을 꾹 닫았다.

“그래, 힘내고! 아자!”

더 혼란스러워진 덱스는 그냥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응원하면 되는 거겠지.

마침 블레아가 중간보고를 하러 가려던 참이라 했다. 세실은 블레아와 마차에 동승하여 곧 영주성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쏴아-!

이른 바닷가에는 덱스와 유리아 둘만 남았다.

아침에 약해 언제나 늦잠을 자는 샤를롯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목석처럼 서 있는 호위 기사를 제외하고 말이다.

“세실이라면 해낼 거야.”

입술을 굳게 다문 유리아가 음, 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조금 눈치를 보던 덱스가 그제야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뭘 해낸다는 거야?”

“응? 네 번째 고리 말이야. 세실도 꼭 4서클이 되었으면 좋겠네.”

“난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덱스가 툴툴거렸다.

다들 통하는 이야기를 혼자만 감도 못 잡고 있자니 꼭 따돌림당하는 기분이다.

그런 덱스를 지긋이 보던 유리아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번째 고리를 엮기 위해서 깨달음의 벽을 넘는 것 말이야. 왜 꼭 모르는 것처럼 그래? 너도 겪었으면서.”

“깨달음? 벽? 그게 뭔데?”

유리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항상 온화했던 표정이 어느새 차갑게 굳어 있다.

“농담하는 거지? 네가 뛰어난 건 나도 잘 알아, 인정해. 그래도 친구를 바보 취급하는 듯한 농담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짜 답답해 죽겠네…. 몰라서 물어보는 데 왜 안 가르쳐 주는 거냐고. 도대체 그 벽이라는 게 뭔데 그래?”

진심으로 답답했던 덱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던 유리아. 그 굳은 얼굴에 서서히 금이 가더니 경악으로 물들었다.

“…덱스 너, 설마 네 번째 고리를 엮을 때까지 한 번도 벽에 부딪혀 본 적 없는 거야?”

“벽…? 그런 거 모르겠는데.”

그냥 되던데.

유리아의 입이 벌어졌다.

얼마나 자각이 없어야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걸까. 다른 마법사가 들었다면 기절할 만한 소리였다.

소위 재능 있다는 마법사는 보통 3서클까지 수월하게 진입한다. 그러나 4서클에서 처음 벽을 마주한다. 괜히 4서클부터 중급 마법사의 칭호를 받는 게 아니었다.

유리아만 해도 4서클의 벽 앞에 몇 달이나 멈춰 있었다.

“…그런 거야.”

“아하! 그런 거구나.”

유리아의 긴 설명에 이윽고 손바닥을 탁, 치는 덱스.

이제야 속이 좀 시원하다는 얼굴이다.

“그게 다야?”

“어? 이제 시원해졌으니까 됐어. 그렇구나. 그래서 다섯 번째 고리가 생길 느낌이 안 온 거구나?”

“느낌?”

“4서클까지는 그런 느낌이 오면서 그냥 됐거든. 그냥 때가 된 것 같은 느낌?”

불세출의 천재란 이런 건가.

유리아도 뭐라 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요는 깨달음이란 게 필요하다는 거지? 근데 뭘 깨달아야 5서클이 되나?”

고민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말투에 유리아는 슬슬 관자놀이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스승님께 들은 이론으로는, 마력 회로 조립에 대한 접근이 바뀌어야 한다고 하셨어.”

“그게 뭐냐? 학부장님도 참…. 자세히 좀 알려 주지.”

“어쨌든 5서클부터는 새로운 방식의 마력 술식을 구성해야 한다는 거야. 같은 마력으로도 더 광범위한 효과를 내야만 하니까.”

“광범위?”

“…너 설마, 각 서클의 핵심 개념도 모르는 건 아니지?”

역시 들어 본 적 없는 표정이다.

유리아의 이마에 어느새 힘줄이 돋아났다.

“강의에서도 그런 거 안 가르쳐 줬잖아.”

“그건 너무 기본이라서 그렇지”

원소 마법을 한정으로 보면, 각 서클별로 명확한 특성이 보인다.

1서클은 각 원소를 발현하는 기초 단계다.

2서클은 방향과 속도를 부여하여 움직이게 한다.

3서클은 각 원소의 특징을 더욱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 폭발력을 강화한 파이어 볼이나 바람을 압축하여 살상력을 높인 윈드 커터처럼.

4서클도 강화의 연장이지만 마력 사용량이 크게 늘어난다. 당연히 효과도 더 크다.

강한 위력의 살상 마법을 쓸 수 있는 4서클 마법사는 어디서든 대우받을 수 있다. 베테랑 4서클 마법사는 전장에서 상급 기사에 비견할만한 존재였으니까.

4서클에 배틀 메이지라는 칭호가 달리 붙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5서클부터는 방향성이 달라진다.

5서클의 핵심은 범위 마법이다. 하나의 타깃이 아니라 대규모 범위를 커버해야 한다.

때문에 술식에 대한 접근 자체가 달라지게 되며, 이것이 다섯 번째 고리를 엮기 위해 필요한 깨달음이었다.

“…그렇군. 좋은 걸 배웠네.”

고개를 끄덕거리는 덱스를 보면서 유리아는 더욱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런 것도 모르고 지금까지 마법을 해 왔다고?

오직 직관력에 의지해 4서클을 이루었다는 의미와 같다. 유리아는 눈앞의 남자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스승님-!”

“어, 오늘은 일찍 일어났다?”

샤를롯이 합류했다.

항상 늦잠을 자다 늦게 나타나는 주제에 오늘은 꽤 일찍 나타났다.

짧은 다리로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달려온 샤를롯이 이내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세실 언니는 어디 갔어?”

“세실은 먼저 영주성에 돌아갔어. 어쩌면 고리를 하나 더 엮을 수 있을 것 같대.”

어느새 허리를 굽혀 샤를롯의 볼을 당겨 인사하는 유리아.

“진짜예요? 우와아!”

“그러니까 우리도 오늘 열심히 하자!”

“히잉….”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이던 샤를롯이 금세 침울한 얼굴을 한다.

아침부터 열심히 땋은 양 갈래 머리가 작은 어깨와 함께 축 늘어졌다.

“왜 그래?”

“너무해요. 나만 빼고 전부 4서클 되는 거잖아….”

“샤를롯은 지금도 충분히 대단한걸. 내년에 아카데미 입학하면 금방 3서클이 될 수 있을 거야.”

“헤헤….”

유리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금방 헤실거리더니 이내 작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 맞다! 그 이야기하려고 한 건데!”

“뭘?”

“봐요!”

샤를롯이 핑크색 마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영창을 시작했다.

“파이어 볼!”

지팡이가 가리킨 곳에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나타났다.

이내 바닷가의 한 바위를 향해 휘두르자 화염구가 그쪽으로 날아가더니 이내 폭발했다.

첨벙첨벙, 바위 파편이 바다에 쏟아졌다.

“어때 스승님?”

“이야, 파이어 볼을 쓸 수 있게 됐네?”

“응! 해냈어!”

평범하게 기뻐하는 두 사람.

그 광경에 유리아는 또다시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샤를롯, 지금 그거 파이어 볼 맞지?”

“응!”

“…그런다는 건, 3서클이 되었다는 말이야?”

“맞아요! 스승님의 특훈 덕분이야!”

샤를롯의 나이 열 살.

3서클.

유리아가 3서클에 올랐던 것보다 빠른 속도다.

“오, 이러다가 곧 역전당하겠는데?”

“정말?”

유리아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됨을 느꼈다.

덱스만 괴물이라 생각했는데 여기에 작은 괴물이 한 명 더 있었으니까.

‘까딱하다가는 추월당하겠어.’

유리아의 결의가 더욱 굳어졌다.

마법에 대한 진심은 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덱스에게 가르침을 청하기까지 했겠는가.

경쟁자가 한 명 더 늘어난 것뿐이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좋아. 오늘 갯벌 훈련은 오전만 하자! 오후는 자유 훈련이야!”

“와! 스승님 최고!”

“아싸!”

그런 결의가 무색하게 유리아도 기쁨의 함성을 지르고 말았다.

…갯벌 훈련이 싫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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