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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84화 (84/127)

84. 스승과 제자 (1)

마탑 최상층부.

마탑주 데르파가 피곤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너저분한 광경이 그를 맞았다.

사방에 문자와 도형이 그려진 종이가 널려 있다. 책상을 빼곡히 채우고 이내 바닥까지 침범한 기록들은 마법사가 아닌 이가 봤다면 낙서로 치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의 주인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여전히 엎드린 자세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

벌써 몇 주째 이어진 익숙한 광경이다.

“스승님, 저녁은 드신 겁니까.”

“이놈아, 어딜 쏘다니다 이제야 오는 게냐? 여기 와서 이것 좀 보거라.”

데르파는 군말 없이 노인의 손짓을 따랐다.

마탑의 주인이자 6서클의 마법사인 그에게 이렇게 하대할 수 있는 인물은 대륙에서 오직 한 명, 스승 메퀸토뿐이다.

“이것은… 속박의 술식이군요.”

데르파는 건네받은 종이를 뚫어져라 보던 끝에 입을 열었다.

바닥에는 메퀸토가 휘갈겨 놓은 술식이 수십 장이나 펼쳐져 있다. 일부는 해석된 부분도 있지만 아직 풀어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

“영 까막눈은 아닌 모양이구나.”

“제가 이래 봬도 마탑주 아닙니까. 스승님이 보기에 아직 부족해 보일지 몰라도….”

“시끄럽고. 여기 이것도 좀 보아라.”

흐음….

스승의 손가락이 향한 술식을 들여다보던 데르파는 침묵했다.

알고 있는 모든 마법을 떠올렸지만 유사한 술식조차 찾기 힘들었다. 결국 끄응-하는 신음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이게 무슨 술식입니까?”

“쯧쯧, 아직 멀었다, 이놈아.”

“끄응….”

결국 다시 한번 신음을 토한 데르파. 그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이 괴팍한 노인네 같으니.

느지막이 제자로 받은 황녀는 금이야, 옥이야 한다던데, 젊었을 적 같이 고생한 첫 번째 제자에게는 언제나 푸대접이다.

그렇다고 나이 쉰을 먹고서 일흔을 바라보는 스승에게 예뻐해 달라고 투정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무슨 술식이라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괴팍한 스승 아래에서 자란 제자의 입이 곱기만 할 리 없다.

‘옛날에는 이런 식으로 말대꾸하다가 지팡이로 쥐어 터지는 게 일상이었는데….’

흠칫 옛 생각이 난 데르파가 저도 모르게 늙은 스승의 눈치를 봤다.

그래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인데 쥐어박기라도 할까.

하지만 메퀸토의 손은 지팡이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한참 동안 어두운 얼굴로 침묵하더니 무겁게 입을 뗐다.

“…마계와 이어지는 술식이다.”

“예? 마계라니요? 악마의 차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데르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농담이라 하기에는 질이 나쁘다. 아니, 스승은 그런 농담을 할 줄 아는 인물이 아니다.

악마의 존재는 고서에 남은 기록이 전부다. 흑마법사 같은 자들이 악마의 힘을 빌리는 연구를 한다지만, 여태껏 적발된 연구들은 그저 잡다한 사술에 그쳤다.

악마의 존재도 전설과 같은 것인데, 하물며 마계라니.

“왜? 터무니없이 들리느냐?”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네 녀석이 마탑주가 되더니 눈이 멀었나 보구나. 마법사란 무엇이더냐? 내가 처음 내린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느냐?”

늙은 스승의 눈빛이 매섭다.

“마법사란 진리를 탐구하는 자라 하셨습니다. 마법은 세상 만물의 진리를 찾는 학문이니, 당연함을 당연하지 않게 여겨야 하며, 항상 되묻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그래, 이놈아! 그런데도 네 녀석은 악마의 존재를 터무니없다고 할 것이냐!”

데르파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수그러들었다.

마탑의 수백 마법사의 정점이면서 스승 앞에서는 여전히 작아지기만 했다.

“영혼석이라는 이것을 내게 맡긴 녀석이 또 다른 단서를 보내 왔다.”

“그 레오 바이스만이라는 생도 말입니까?”

“그래, 이번에는 악마의 진명을 알아냈다고 하더구나.”

“악마의 진명…!”

고서의 기록에 의하면 악마는 자신의 진명에 영혼의 흔적을 새긴다 했다.

진명이 드러난 것은 자신의 영혼 일부를 드러낸 것과 같은 의미라고.

“악마의 진명으로 놈의 영혼을 추적해 볼 생각이다.”

“안 될 말씀입니다! 위험합니다!”

늙은 스승의 의도를 깨달은 데르파는 처음으로 큰 목소리를 냈다.

인간의 몸으로 악마의 영혼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승은 육신을 버리고 정신체가 되어 놈을 추적할 셈이다.

데르파는 6서클에 오르며 처음으로 정신체가 되어 세상과 교감했다.

그것은 마법사로서 새로운 감각을 각성케 하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 농밀한 자극에 매몰되면 자칫 자아를 잃는다. 영영 육신을 되찾지 못하고 마나의 일부로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당연히 매우 조심스럽게 행하는 작업.

그런데 그러한 정신체가 되어 악마를 찾겠다니…!

메퀸토는 그러한 제자의 눈을 지긋이 마주 보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의 제자들이 죽었다. 비록 내가 손수 가르치지 않은 녀석들이지만 품 안에 들어왔던, 내 제자들이다.”

메퀸토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아이들은 모두 고리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산 채로 고리가 깨지고 마력과 생기를 빼앗겼다. 그 고통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스승님….”

“나는 그 악마를 잡아낼 것이다. 명색이 스승 나부랭이라면, 제자들의 목숨은 살리지 못할지언정 명예는 지켜 주어야지. 악마가 진명을 들켰다는 것을 눈치채면 영영 방법이 사라진다.”

늙은 스승의 눈동자에 어느덧 나이 든 제자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가득 담겼다.

메퀸토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

“네게 방호를 맡기마.”

“…반드시 돌아오셔야 합니다.”

데르파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정신체가 되면 육신과 미약한 끈 하나로 연결된다. 육신과 이어진 끈을 보호하고 정신체에게 돌아올 곳을 계속해서 주지시키는 방호의 임무.

그것은 곧 목숨을 맡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준비는 끝내 놓았다.”

바닥에 깔린 종이를 헤집자 미리 만든 마법진이 드러났다.

메퀸토는 그 가운데 누워 양손을 가슴에 올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술식을 기동하자 마법진을 밝히던 빛이 그의 육신으로 빨려들었다.

쑤욱- 허공으로 떠오르는 이질적인 감각.

늙은 마법사의 정신체가 육신과 분리됨과 동시에 강한 인력(引力)을 느꼈다. 악마 게르베의 이름을 쫓는다는 의지가 악마의 영혼이 있는 곳과 강하게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좋다. 따라가 주마.’

메퀸토는 그 힘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육신을 거치지 않고 정신체에 곧바로 가해지는 자극은 가히 폭력적이다.

밝은 달빛은 황홀했으며 한밤의 습한 기운은 음습하게 영혼을 투과했다. 바람은 시릴 듯 서늘했고 하늘을 부유하는 감각은 짜릿했다.

그러한 자극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존재할 리 없는 입술을 깨문다. 그런 의식적인 행동은 영혼이 기억하는 통증을 불러일으켜 자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휙- 휙-!

풍경이 빠르게 지났다.

마탑이 존재하던 황야를 넘어 몇 개의 숲과 도시를 넘었다. 마침내 검은 바다를 건넜을 때는 중앙 대륙을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부인가.’

메퀸토는 침음을 흘렸다.

음침하고 부정적인 기운이 점차 강하게 느껴진다. 악마의 영혼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 괜…니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육신이 없는 상태이니 영혼에 직접 울린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스승님, 스승님! 들리십니까? 저 데르파입니다!]

‘잘 들린다. 호들갑 떨지 말거라.’

[아아…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지난 게냐?’

정신체가 되면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

일순간이라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시간이 가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듯했다.

[벌써 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여섯 시간이라니.

그제야 여명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정신체의 감각에 매몰되었다가는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 자아를 잃고 자연으로 돌아가리라.

‘알겠다. 이제부터 한 시간마다 알리거라.’

[예, 부디 조심하십시오.]

시간이 지날수록 육신과 이어진 끈은 옅어진다. 제아무리 메퀸토라 해도 그 끈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최대 하루였다.

‘시간이 얼마 없구나.’

메퀸토는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렸다. 북부의 차가운 한기가 오히려 반가웠다.

서리가 앉은 숲을 지나 도달한 곳은 도시와 떨어진 척박한 땅에 세워진 초라한 신전. 북부 대륙 끝에 있다는 마지막 신전이 분명했다.

악마가 여신의 힘으로 봉인되었다는 내용이 레오의 편지에 존재했다. 그러니 이 신전에 도달하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봉인은 이미 약해졌으며 악마의 힘은 서서히 마계로 흘러들어 본체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포획하는 마도구 또한 악마를 부활시키기 위한 목적일 터.

‘저곳인가!’

메퀸토는 신전을 받치는 가장 큰 기둥으로 향했다.

그 주춧돌 아래 깊은 곳에 악마를 봉인한 주먹만 한 검은 수정이 보였다. 검은 수정의 표면에는 얇은 실금이 가득했고, 그 틈으로 마기가 새고 있었다.

게르베의 영혼을 포획한 봉마석(封魔石)임이 틀림없었다.

[스승님, 아홉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검은 수정을 앞에 두고 메퀸토는 고심했다.

마기가 줄줄 새고 있는 모습을 보니 봉마석은 이미 제 역할을 못 한 지 오래다. 게르베의 본체는 마계에서 조용히 힘을 회복하는 중일 것이다.

봉마석에서 새어 나가는 마기의 흐름을 따라가면 게르베의 본체를 찾을 수 있다. 그 본체에 흔적을 새긴다면 이후 놈이 인간계에 몸을 드러냈을 때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데르파, 놈은 이미 마계에 그릇을 만들고 있다. 그 본체에 표식을 해 둬야겠다.’

[안 됩니다! 어서 돌아오세요!]

데르파의 목소리가 다급히 전해졌다.

정신체로 차원을 넘는 것은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 육신과 정신체를 이어 주는, 점차 희미해지는 이 끈이 단박에 끊어질지도 모르는 일.

메퀸토는 그런 제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마기의 흐름에 의식을 섞었다.

급류에 휩쓸리는 듯한 감각과 함께 그의 정신체가 인간계에서 사라졌다. 몽롱한 감각 속에 표류하던 메퀸토는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씹은 덕에 자아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이곳이 마계인가…!’

부(不)의 기운이 사방에서 메퀸토의 정신체를 짓누른다.

필사적으로 방호하지 않으면 어느새 마기에 오염되어 인간성을 잃고 말 것이다.

[스…님! 제 목소… …십니까!]

데르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졌다.

다행히 육신과의 끈은 연결되어 있는 모양. 다만 아까보다 훨씬 희미한 것으로 보아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느냐?’

[열세… 어서 돌아, 오셔야…!]

메퀸토는 서둘러 움직였다.

붉고 검은 척박한 대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 또한 여러 마계의 한 가지 모습일 것이다.

게르베의 마기를 따라간 곳은 어느 붉은 동굴 깊숙한 곳.

오직 놈의 마기에 이끌려 미로와 같은 동굴을 지났다. 이윽고 발을 멈춘 곳에는 질척해 보이는 검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게르베의 본체였다.

‘이놈이구나!’

숨이 턱 막힐 것만 같은 짙은 마기.

그럼에도 아직 형태를 갖추지 못한 것을 보면 절반도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라 볼 수 있다.

[열다섯… 째입니다! 지금이라도… …셔야 합…!]

메퀸토도 서서히 조급해졌다.

이 검은 웅덩이에 흔적만 남기고 서둘러 귀환해야 한다.

그 순간 호수의 표면이 크게 일렁이더니 폭발하듯 일어났다.

‘아차!’

검고 질척한 마기가 메퀸토의 정신체를 휩쌌다.

방심했다. 형태조차 갖추지 못했기에 의식도 차리지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왜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았을까!

자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꽤나 강한 정신력이다.

영혼에 직접 울리는 탁한 목소리.

악마 게르베였다.

-인간이 아닌가? 어디서 흘러 들어온 것이냐? 운이 나쁘구나. 제 발로 여기까지 오다니, 크크큭.

저항하려 했지만 사방에 들러붙은 눅진하고 음습한 마기를 떼어낼 수 없었다.

제아무리 메퀸토라 해도 정신체만으로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다. 게다가 악마는 그 자체가 정신체라 할 수 있는 존재. 지금 상황에서는 격에서부터 차이가 컸다.

-끈이 남아 있다고? 네놈, 우연히 흘러들어 온 것이 아니구나.

악마의 호기심은 곧 적의로 바뀌었다.

-인간 주제에 나를 찾겠다고 마계로 넘어온 것이냐? 그 용기만은 칭찬해 주마. 하지만 어리석고 무모했다.

마기는 한층 강하게 정신체를 침식해 들었다.

방호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다. 메퀸토는 이제 선택해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들리느냐.’

[예… 잘 들립… 무슨 일이…]

다행히 제자에게는 이쪽의 소리가 잘 들리는 모양.

‘데르파,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시간이 얼마 없었다.

신전 기둥 아래의 봉마석부터, 마계에서 찾아낸 게르베의 본체까지. 메퀸토는 자신이 알아낸 모든 사실을 전했다.

‘악마에게 표식을 남겼다. 내 육신 옆에 있는 마도구가 그 흔적을 쫓아 줄 것이다.’

최악의 경우도 안배했다. 설사 자신이 게르베에게 당하더라도 마도구로 놈을 추적할 수 있도록.

[스승…! 왜 그런 말씀… !]

‘나는 돌아갈 수가 없구나.’

메퀸토는 이제 정말 남은 시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마기에 완전히 침식당하기 직전이다. 육신과 이어진 끈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일렁였다.

끝은 언제나 갑자기 다가온다.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이리도 미련이 많을 줄 몰랐다.

[그게 무슨 말씀… …승님!]

제자의 급박한 목소리.

마법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거늘, 아직도 가르쳐야 할 것이 이리도 많이 남았거늘….

전장에서 거둔 첫 제자였다. 거칠고 반항기 가득한 꼬마였기에 사람 구실을 하게 만드는 데 꽤나 속을 썩였다.

메퀸토는 제자에게 전할 마지막 말을 골랐다.

‘…괴팍한 스승 아래서 고생이 많았구나. 뒷일을 맡기마.’

그렇게 늙은 마법사는 세상과 이어진 끈을 스스로 끊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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