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스승과 제자 (2)
대마법사 메퀸토의 죽음.
마탑에서 발표된 충격적인 사실에 제국 전체가 비탄에 잠겼다.
대마법사, 초대 마탑주, 현자….
그가 가진 다양한 칭호만큼이나 그동안 제국에 끼친 영향력은 컸다.
현 황제와 함께 제국의 혼란기를 평정한 영웅이었으며, 공작의 지위와 성을 마다하고 오로지 제 이름 석 자로 시대를 풍미한 마법사였다.
“거짓말…! 스승님이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바이스만 영지에도 금방 소식이 닿았다.
충격에 유리아는 기절할 듯 휘청였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세실도 뒤늦게 뛰쳐나왔다. 항상 싱글거리던 덱스도 침울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소식을 전한 레오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추모식은 한 달 후라고 하더군. 아카데미에서 열릴 모양이야.”
“…추모식에 가야겠어.”
덱스가 입을 뗐다.
입학식 때 마석을 건네며 더욱 정진하라던 따뜻한 격려가 다시금 떠올랐다.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지만, 그는 모든 마법사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 그것은 덱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참석할 생각이야. 너희도 당연히 갈 거지?”
“물론이야.”
유리아와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줄곧 눈물을 흘려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모두가 떠난 응접실.
레오만이 조용히 남아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몰라.’
마탑주 데르파로부터 전할 말이 있으니 추모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것을 본 순간 자신이 알린 정보가 메퀸토의 죽음에 연관되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교류전 때 메퀸토가 보인 마법이 떠올랐다. 순식간의 대지를 불태우며 마물을 일소했던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다.
누구도 막아 세울 수 없을 것 같던, 그렇게 강한 영감이 어쩌다가….
괴로웠다.
그의 죽음도, 그에 슬퍼하는 동료들을 보는 것도.
그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더라면 달라졌을까?
레오는 한동안 머리를 감싸 쥔 채 응접실을 떠나지 못했고.
끼잉-!
그런 레오를 위로하듯 슈니가 몸을 붙이고 그 옆을 지켰다.
* * *
며칠 후 두 대의 마차가 수도로 향했다.
무무카와 패트릭에게는 바이스만에 남아 있어 줄 것을 부탁했다.
추모식을 위해 각지의 인사가 수도에 집중될 것이 뻔했다. 만약을 대비해 영지를 방비할 이가 필요했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라.”
무무카가 믿음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패트릭은 어때? 적응 좀 됐어?”
“응, 무무카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
포렌티아를 흡수한 패트릭은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올랐다.
오러의 양만 보자면 이미 상급의 끄트머리.
지금 실력이면 아마 평생 비교당했던 형을 제쳤을 터다.
그런 패트릭을 상대로, 무무카는 언제나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였다.
매일 이어지는 둘의 대련을 보고 있자면 든든했다. 제국 전체를 뒤져도 소드 엑스퍼트 상급 이상의 기사를 둘이나 보유한 영지는 손에 꼽을 테니.
레오는 두 사람에게 영지를 맡기고 바이스만을 떠났다.
올 때처럼 두 대의 마차였으며, 발트란을 비롯한 바이스만의 기병 십여 기가 호위로 따라붙었다.
사흘째 밤.
두 마차는 인적 없는 황야에서 야영을 준비했다.
바이스만에 향할 때는 여유 있게 마을을 들러 가며 이동했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다는 유리아의 고집이 반영되었다.
모닥불에 냄비를 걸고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쳤다.
“영주님 편히 쉬십시오.”
“그래, 부탁하마.”
빈 냄비를 가지고 돌아간 발트란은 병사들을 소집해 야간 경계를 지시했다.
오랜만의 야영.
레오도 기감을 열어 놓았다.
소드 마스터에 황궁의 호위 기사, 배틀 메이지가 둘이나 섞인 일행이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으면 병사들이 보호받아야 할 입장 아닐까.
밝은 달과 별빛이 황야를 내리쬐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이었고, 수상한 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안 자냐?”
“후우… 별로 잠이 안 올 것 같네.”
덱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메퀸토의 소식과 별개로 며칠째 꼬리처럼 따라붙는 고민 때문에.
[5서클부터는 새로운 방식의 마력 술식을 구성해야 한다는 거야. 같은 마력으로도 더 광범위한 효과를 내야 하니까.]
유리아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새로운 방식의 마력 술식라니, 분명 마력 효율화와 관계된 것이 분명하다.
광범위한 마법에 더 많은 마력이 소모되는 것은 당연한 법. 기존 방식으로는 그 마력을 모두 충족시킬 수 없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회로의 조합, 그것이 5서클의 깨달음이었다니.
일렁이는 모닥불을 한동안 바라보니 자연히 갯벌 훈련이 떠올랐다.
‘일단 사과부터 해야겠지….’
덱스는 모닥불 반대편에 있는 유리아와 세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갯벌 훈련에는 사실 별 의미가 없었노라고, 둘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다.
체스판처럼 줄지어 있던 바닷가의 불덩이가 떠올랐다.
한 번에 만들어 낸 화염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 수십 개의 화력을 균등하게 배분하고 유지하는 것이 관건.
처음에 혼자 땡볕에서 그 고생을 하던 것이 떠올라 입꼬리가 절로 일그러졌다.
‘가만. 그게 범위 마법 아닌가?’
덱스의 뇌리에 번개가 이는 듯했다.
두꺼운 불의 장벽을 치는 5서클의 대표 마법 파이어 월을 떠올렸다.
1서클 파이어를 쌓고 쌓아 겹쳐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결국 얼마나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느냐의 문제 아닌가?
꼬리처럼 이어진 자문자답은 결국 마력 효율로 이어졌다.
‘각각을 굳이 세밀하게 컨트롤할 필요가 있나?’
갯벌 훈련 때는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위해 각각의 화염구를 세밀하게 조절했다. 화력을 일정하게 분배하고 서로의 간격을 조율하는 데에는 신경 쓸 것이 많았다.
하지만 그저 벽을 쌓을 뿐이라면? 효율적으로 물을 증발시킨다는 목적 없이, 그저 불의 장벽을 만들어 내는 자체가 목적이라면 세세한 조율은 필요 없지 않나?
세밀함을 버리고 편의성을 더한다.
생각이 빠르게 전환됐다. 범위 마법은 이를테면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만드는 공방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준만 충족시키는 대량 생산 작업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하나 필요한 작업과 필요 없는 작업을 구분했다.
‘서로 마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면?’
지금까지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각 화염구를 직접 마력을 연결해 조절했다. 그 자체가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각 화염구 사이에 마력이 이동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면 어떨까.
물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진한 것이 옅은 곳으로 퍼져 가듯, 마력도 그렇게 자연히 흐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벌떡.
줄곧 모닥불을 보고 있던 덱스가 자리를 박찼다.
마력 통로를 통한 효율화.
이것이 범위 마법의 핵심임이 분명했다.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검은 지평선을 향한 덱스의 눈에 새로운 술식의 얼개가 짜였다가 분해되기가 반복된다.
조금씩, 조금씩.
술식 설계가 반복될수록 완성도가 높아졌다.
그럴수록 정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에 희열이 차올랐다.
“갑자기 뭐 해? 서서 꿈이라도 꾸냐?”
레오의 핀잔은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선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달싹이는 덱스.
그 모습에 의아하게 보던 유리아와 세실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뭐 하냐고.”
“쉿!”
유리아가 손가락에 입술을 대고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는 뜻.
그 진지한 표정에 레오는 머쓱하게 입을 다물고 괜히 잠든 슈니의 등만 매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들 방해가 될까 싶어 움직이지도 않고 자리를 지켰다.
레오가 꺼져 가는 모닥불에 조심스레 장작을 밀어 넣는 찰나.
“이렇게… 하면 되려나?”
몇 시간을 석상처럼 서 있던 덱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파이어 월.”
작게 입술을 달싹이자 그의 갈색 눈동자에서 옅은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그대로 검지를 들어 가로로 허공을 가르는 덱스.
화르르르르륵-!
하나, 둘, 셋….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화염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화염은 순식간에 옆과 위로 퍼져 나갔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이글거리는 화염의 장벽이 나타났다.
반다이트의 요새를 떠올릴 정도로 높고 두꺼운 장벽이었다.
“…된 것 같은데?”
팔을 내린 덱스가 히죽 웃었다.
장엄하게 펼쳐진 화염의 장벽을 배경으로, 여느 때와 같은 헤실거리는 얼굴.
동시에 그의 심장께에서 푸른 빛이 일었다.
다섯 번째 고리가 엮이는 순간이었다.
“데, 덱스… 너…!”
유리아와 세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뭔가 일어난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는 레오는 여전히 멀뚱거리는 얼굴.
“너 정말 미쳤어!”
세실이 먼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5서클부터는 마나에 선택받은 이들이라 불렸다. 그만큼 희귀했으며 제국 전체에서 채 열 명이 안 되는 귀한 자원이다.
그런 5서클 마법사가 태어나는 순간을 목도했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며칠 동안 머리 빠개지는 줄 알았다고.”
털썩.
제 자리에 주저앉는 덱스.
“나 이제 말해도 되냐? 뭔데? 마법사들끼리만 아는… 뭐, 그런 건가?”
“레오, 너 진짜! 방금 덱스가 다섯 번째 고리를 엮었다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성취야!”
“오오… 진짜?”
흥분해 소리치는 세실, 그제야 눈치채고 덱스의 등을 두드려 주는 레오.
“장하다, 장해! 5서클이면 진짜 대단하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하하핫!”
“헤헤헤.”
유리아는 조용히 몸을 떨었다.
‘내가 따라갈 수 있을까?’
대마법사의 제자라는 칭호는 언제나 무거웠다.
그의 첫 번째 제자 데르파가 마탑의 주인임을 자칭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자신도 그와 같은 경지에 올라야만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렸다.
거기에 스승의 죽음까지 더해지며 그 부담이 한층 커진 상황.
‘축하해 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온갖 감정이 섞여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금 이 순간 덱스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동료의, 친구의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한다고? 내가 겨우 이 정도였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유리아.”
“…왜?”
유리아는 흠칫 떨며 답했다.
속내가 발가벗겨진 기분에 그의 눈동자도 마주치기 힘들었다.
“이거, 너도 할 수 있겠다, 가르쳐 줄 테니까 해 봐.”
“……?”
가르쳐 준다고? 자신의 깨달음을?
유리아의 얼떨떨한 얼굴에 덱스가 뒤늦게 아차 싶었다.
“아, 이거… 내가 실수한 건가? 혹시 싫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유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자존심? 5서클의 깨달음을 알려 주겠다는데 그깟 자존심 따위 얼마든지 꺾을 수 있다. 오히려 정말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마법사에게 자신의 깨달음은 모든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대로 직계에게만 잇는 기사 가문의 연공법이나 비전 기술보다도 더욱 비밀스러운 것이기에.
“세실도 이리 와. 너도 나중에 써먹어야 할 거 아냐.”
“…나? 나도 알려 주는 거야?”
멀뚱히 서 있던 세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야, 내가 그렇게 치사하게 굴 것 같냐? 당연히 둘 다 알려 주는 거지. 저기 레오는 들어도 모르겠지만, 크크큭!”
“뭐래, 이 마법사 놈이.”
덱스의 앞에 유리아와 세실이 나란히 앉았다.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덱스
“말보다는 이게 쉬울 것 같다. 갯벌 훈련 기억나지?”
체스판을 채우듯 동그라미가 줄지어 그려졌다.
두 사람이 훈련할 때 유지했던 화염구의 개수와 대략 일치했다.
“둘 다 그걸 각각 하나하나 컨트롤했지?”
“그렇지.”
“맞아.”
죽- 죽-!
덱스는 동그라미 위에 선을 그었다.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가능한 모든 선을 그렸다. 그 선들은 각 동그라미의 위, 아래, 좌우, 대각선을 모두 연결했다.
“새로운 마력 통로를 연결하는 거야. 그러면 하나하나 마력을 조절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
“이렇게 하면 마력 주입점을 최소화할 수 있어.”
이어지는 덱스의 설명.
유리아와 세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며칠간 수십 개의 화염구를 만들고 유지해 보았기에 요점이 쏙쏙 들어왔다.
개념 설명을 끝으로 덱스는 자신이 짠 마력 회로를 모두 공개했다. 아직 완벽한 술식이 아니었기에 셋은 회로를 분석하며 밤새 토론을 벌이고 수정하기를 반복했다.
“역시 같이 이야기하길 잘했어. 적어도 10% 이상 효율이 높아졌을 거야.”
“…고마워 덱스, 나 반드시 해낼게.”
아는 것과 시행하는 것은 별개인 법.
유리아는 그날로 마차에 틀어박혔다. 함께 완성한 술식을 하루빨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 유리아에게 방해가 될까, 세실은 레오의 마차로 자리를 옮겼고.
“너는 네 번째 고리부터 완성해야지?”
“어? 그, 그렇지?”
“막힌 데가 어디야?”
그 한나절 동안 족집게 과외를 받은 세실은 네 번째 고리를 엮는 데 성공했으며, 마차가 수도에 도착할 때쯤 유리아의 심장에도 다섯 번째 고리가 엮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