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브뤼쉬 (1)
이단 심문관 테레사.
평범한 유년기를 보내던 그녀의 삶이 한순간에 바뀐 것은 일곱 살 되던 해였다.
어느 날 테레사의 마을에 음침한 외지인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이 들렀다 떠난 밤, 몬스터들이 마을을 덮쳤다.
수 명의 흑마법사가 마을을 실험장으로 사용한 것이다.
흥분해 달려드는 몬스터 떼에 불과 수십 명이 모여 살던 마을은 몇 시간도 안 되어 폐허가 되었다.
며칠 후, 마을을 우연히 찾은 신전의 사제가 숨어 있던 테레사를 발견했고, 그녀는 그대로 신전에 귀의했다.
그러니 흑마법사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를 가진 그녀가 이단 심문관으로 발탁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켈시온 백작….”
까드득!
테레사의 손아귀에 쥔 두 개의 쇠구슬이 마찰음을 냈다.
과거에 비해 여신의 힘이 미약해진 것은 사실이나 성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신의 성력을 활용한 다양한 성법 중에서도 테레사는 괴력의 성법과 치유의 성법에 특화되었다.
다만 그녀는 아직 성법 제어에 능숙하지 못했다. 특히 감정이 흔들리면 저도 모르게 괴력을 사용하고 만다. 손안의 쇠구슬은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습관적으로 굴리는 것들이었다.
“분명 뭔가 있어. 조금 더 성을 조사했어야 했는데….”
아쉬웠다. 켈시온의 성을 조사하는 찰나, 그가 갑자기 보르트의 외교 특사로 임명되어 버렸다. 결국 그와 함께 보르트까지 동행하느라 스무날이나 낭비했다.
이단 심문관이 초법적인 존재라지만 암묵적 규칙이 있다.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 한 달 이상 조사를 연장할 수 없다는 것. 그 규칙 때문에 테레사는 일단 켈시온에게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밀착 조사에 대한 부분이다. 테레사는 여전히 의심을 놓지 않았기에 켈시온의 주변을 캐 보고자 영지 인근을 순회하고 있었다.
“사제님,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그럼요, 매번 감사해요, 촌장님.”
나이 든 촌장의 인사에 금방 표정을 바꾼 테레사는 환한 미소로 대꾸했다.
그녀의 물빛 머리칼이 흰 사제복에 반사되어 더욱 밝게 빛났다.
“제가 감사해야지요. 사제님 덕분에 다들 건강을 찾았습니다. 저희 같은 것들에게 귀한 힘을 나누어 주시니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러지 마세요, 촌장님. 저는 그저 여신님의 의지를 전파하는 것뿐이랍니다. 여신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 주신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테레사는 이 마을에 자신이 봉사 순례를 하는 사제라 밝혔다.
사제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제국 곳곳에 넘쳤으니, 순례 사제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는 존재였다.
“괜찮으시다면 이걸….”
“여신님의 조각상이군요, 마을 중앙에 두고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테레사는 싱긋 웃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신실하게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제가 있는가 하면, 고단한 현실에 여신의 존재를 잊고 하루를 연명하는 이들도 있다.
이처럼 잊힌 여신에 대한 믿음을 다시 키워 내는 것 또한 순례 사제의 임무였다.
“마을이 갑자기 분주해진 것 같아요.”
“아, 미처 말씀을 못 드렸군요. 마을의 은인이 오셔서 다들 들뜬 모양입니다. 저녁에는 마을 축제를 하려고 하니 함께 즐겨 주세요. 축제라고는 해도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뿐이지만요.”
“은인요?”
테레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처음 치유의 기적을 보였을 때도 촌장은 축제를 열자고 했다. 대가를 바라서는 안 된다며 겨우 말리긴 했는데… 결국 축제를 하기는 할 모양이다.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흑마법사 때문에 마을이 위험했던…. 그때 마을을 구해 주셨던 아카데미 생도분이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어머, 그래요? 저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네요.”
테레사의 눈이 반짝였다.
몬스터로부터 마을을 구한 아카데미 생도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몇 번이나 그에 대해 들었다.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특히 그녀 또한 비슷한 사건의 희생자였기에 더욱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런 기적이 있었다면….’
잠깐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 냈다.
기적은 흔하지 않기에 기적이라 불리는 것.
과거에 매여있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스스로 흑마법사를 단죄할 힘까지 얻지 않았는가.
테레사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을 구했다는 그 생도를 만나보고 싶었다.
* * *
황제의 밀서를 확인한 레오는 곧장 신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일행은 슈니뿐이다. 막 깨달음을 얻은 덱스를 굳이 끌고 가기보다는 시간을 주는 편이 좋다고 여겼다.
“이랴!”
말을 달려 북쪽으로 향했다.
슈니를 타고 달리면 더 빠르겠지만, 쓸데없이 눈에 띄는 건 사양이다. 말 안장 가방을 차지한 슈니는 익숙하게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즐겼다.
떠나기 전 패트릭에게 편지를 보냈다. 신전이 마이어 남작령과 가까우니 함께 가는 것도 좋다 싶었기에. 시오프 산맥의 아랫마을에서 패트릭과 합류하여 함께 북부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혼자서 말을 달리니 시오프 산맥까지는 금방이다. 언젠가 마차로 이동했던 익숙한 길을 지나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누벤! 잘 있었어요?”
“레오님 아니십니까!”
사냥꾼 누벤이 양팔을 벌리고 레오를 맞았다. 그 일이 있고서 고작 반년, 레오의 얼굴을 잊을 리 없다.
말에서 내린 레오가 누벤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 나눴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북부로 여행이라도 가시는 건가요?”
누벤은 여전히 레오를 아카데미의 생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생도가 소드 마스터가 되어 남작 위를 받았다는 소문은 제국 전체에 파다했지만, 그 사람을 곧 레오라고 연결 짓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레오도 굳이 그걸 알리지 않았다.
“맞아요, 가는 길에 동료와 합류하려는데 마을에서 며칠 머무를까 해서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마침 오늘 멧돼지를 잡았으니 마을 축제라도 해야겠군요. 다른 분들도 잘 계시죠?”
“그럼요, 다들 똑같죠.”
레오는 누벤과 나란히 걸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달라진 모습이 눈에 확 띄었다.
“오오, 방비가 많이 달라졌네요?”
과거 울타리도 제대로 둘려 있지 않던 마을 주위에는 목책이 빽빽했다.
본격적인 요새의 목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고블린 따위는 얼씬도 못 할 수준이다.
“또다시 일방적으로 당할 수는 없지요. 지난번 같은 기적을 다시 바랄 수는 없을 테니 싸울 수 있도록 여러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게요. 보기만 해도 안심이 되네요.”
마을에 들어서자 레오를 알아보는 이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무시무시한 트롤을 양단하던 소년 검사의 모습은 그만큼 마을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남았다.
두 사람은 금방 마을 중앙의 여관에 다다랐다.
“이곳 기억나십니까?”
“그럼요, 잊을 수가 없죠.”
반년 전 이 여관은 마을 최후의 보루였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켰고, 트롤이 나타났을 때 누벤은 스스로 미끼를 자처하기도 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여관 건물 안에 있던 앤이 무거운 배를 안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
여관 2층에서 고블린에게 돌을 던지던 새색시는 어느새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보-! 이리 좀 내려와 봐!”
“왜 그래, 자기야?”
“잔말 말고 내려와!”
앤의 목소리 톤이 바뀌자 계단 위에서 우당탕 소리가 울렸다.
곧 루크가 반쯤 구르며 뛰어내려 왔다.
“누벤? 아! 레오님 아니세요!”
“오랜만이에요 루크, 며칠 묵으려는 데 방 있죠?”
“당연하지요! 없으면 제 방이라도 내드려야죠. 식사는 하셨습니까?”
“간단히 뭐 좀 줄래요?”
앤이 식사 준비를 하러 들어간 사이, 셋은 자연히 빈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레오는 두 사람에게 이런저런 마을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영지 관리인 놈, 그때 이후로 지랄 안 해요?”
“별일 없었습니다. 줄리앙 공자님이 뒷일을 잘 처리해 주신 덕분입니다.”
“영주님도 나서지 못하는 판국인데, 영지 관리인이 뭐 별수 있나요? 크크큭!”
루크의 웃음에 다들 따라 웃었다.
하긴 욕심 많은 브뤼쉬 자작이 중앙 요직을 꿰어찬 베니에르 백작에게 밉보이려 할 리 없다. 밑에 있는 영지 관리인만 죽어라 욕을 먹었겠지.
“곧 저녁이니까 간단히 먹을 걸로 준비했어요.”
“고마워요, 앤.”
건더기가 꽤 들어간 스튜를 휘젓던 레오는 흠칫 고개를 돌렸다.
오러도, 마력도 아닌 이질적인 기운. 하얀 사제복을 입고 물빛 머리칼을 한쪽으로 땋은 여자가 여관 안쪽을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제님 아니십니까, 혹시 배가 고프셔서…?”
“그, 그냥 지나가다가 본 것뿐이에요.”
테레사는 괜히 발끝을 끌며 주저주저했다.
눈치 빠른 누벤은 그녀가 레오를 보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제님, 오신 김에 함께 앉으시지요. 소개시켜 드리고 싶은 분도 있고요.”
“그럴까요?”
방금까지 주저하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냉큼 안으로 들어오는 테레사.
‘사제라고?’
레오의 눈이 반짝였다.
이곳에서 순례 사제를 만나다니 운이 좋다. 어차피 목적지가 신전이니만큼 여러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순례 사제님이셨군요. 레오라고 합니다. ”
“부족하나마 여신님의 뜻을 전하는 여행 중입니다. 테레사예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레오는 확신했다.
‘평범한 순례 사제가 아니야.’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은 아마도 성력이다. 게다가 이 정도 성력은 평범한 순례자의 길을 행하는 초급 사제의 것이라 할 수 없다.
신전에서 직접 파견된 이단 심문관일까? 최소한 중급 이상 사제임이 분명하다.
“사실 촌장님께 이야기를 듣고 너무 궁금했거든요. 실례가 되었을까요?”
“실례라니요, 저야말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제가 그리 신실한 놈은 못 되지만 신전의 사제분들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쁘네요.”
의례적인 대화.
눈과 입은 웃고 있지만 역시 위화감이 느껴진다.
레오는 그녀가 평범한 순례 사제가 아니라는 추측에 더욱 힘을 실었다.
산 아랫마을의 해는 금방 기운다.
날은 어둑해졌지만 마을은 떠들썩했다. 마을 중앙에서 누벤이 멧돼지를 구웠고, 루크는 부지런히 술과 음료를 날랐다.
레오와 테레사도 사람들과 함께 그 시간을 즐겼다. 멧돼지 고기와 음료뿐인 축제였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레오님은 신전으로 향한다고 하셨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테레사가 물었다.
대륙 북쪽 끝에 자리한 신전이다. 열렬한 신도가 아닌 이상에야 척박한 땅에 세워진 오래된 석조 건물을 굳이 찾으려는 이유가 있을까.
잔을 매만지며 조금 뜸을 들이던 레오가 답했다.
“악마를 쫓고 있습니다.”
“…악마라고요?”
의외의 대답에 테레사는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악마.
성서에 의하면 여신과 대척되는 존재이자, 세상을 마기로 물들여 멸망시키려 하는 존재.
신전의 사제들은 그 악마를 탐욕에 물든 인간을 은유한 표현이라 여겼다.
테레사 또한 마찬가지. 그러니 방금 레오의 말이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린 것도 당연했다.
“그렇습니다, 선조부터 이어 온 사명이라고나 할까요.”
레오는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더 이상 깊은 이야기는 곤란하다는 뜻이 내포된 미소였다.
“아, 으음…!”
뭐라 답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그녀에게 레오가 역으로 물었다.
“사제님은 왜 여기에 계십니까?”
“저야 말씀드린 대로 순례를….”
“여기에는 얼마나 머무를 계획이신가요?”
“…일단 열흘 정도요?”
레오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이 사제 아가씨는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 순례 봉사를 다니는 사제가 이미 치료가 끝나 병자가 없는 마을에 열흘이나 더 머무를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봉사 순례가 목적이 아니군요.”
“예?”
“켈시온 백작을 캐기 위한 것 아닙니까?”
레오가 나직이 말했다.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였다.
“아닙니까, 이단 심문관 테레사 사제? 쓸데없는 연기는 서로 그만할까요?”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