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브뤼쉬 (3)
레오는 이미 놈이 흑마법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남자의 가슴에는 세 개의 고리가 빛났으며, 오러안으로 들여다본 그의 짐가방에는 환하게 빛나는 영혼석이 존재감을 과시했기 때문에.
“나으리,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그저 아이들에게 고기 한 점 먹일 생각에 여기까지 흘러온 것뿐입니다요.”
“시간이 없어요. 정말 흑마법사가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도망치고 있을 거예요.”
속을 기미가 없자 구에로는 없은 자식들까지 들먹이며 연기력을 총동원했다. 그에 한층 마음이 약해진 테레사도 레오를 재촉했다.
레오는 픽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한 가지만 확인하면 네 말을 믿고 보내 주겠다.”
“뭐, 뭡니까?”
“어려울 것 없어. 그냥 내 말을 따라 하면 되니까.”
구에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쨌든 목숨을 붙이는 것이 우선이다. 다리 사이를 기든, 신발을 핥든, 어떤 치욕스러운 요구라도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런 것에 비하면 말을 따라 하는 것 정도는 간단하다.
“켈시온 백작이 시켰다. 이거 한마디만 해 봐.”
구에로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금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 흑마법사들끼리도 금제를 어기느니 그냥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였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분이 누구신데요?”
“알 거 없고, 따라 해 보기나 하라고.”
스릉-!
레오가 다시 검을 뽑았다.
좌우로 흔들리던 구에로의 눈동자가 테레사에게 향했다. 도움을 바라는 절박한 눈빛이었다.
“사, 사제님! 저는 정말 아닙니다!”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나?”
“제발 살려 주십쇼!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냥꾼입니다! 사제님! 제발요!”
“…레오, 아무래도 잘못 짚은 것 같다니까요?”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한 구에로.
놈은 대놓고 테레사에게 매달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마음에 일던 동요가 커졌다.
레오가 보기에는 퍽이나 우스운 광경이었다.
“나는 분명히 기회를 줬다.”
흔들리지 않는 레오의 눈빛.
그걸 확인한 구에로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튕기듯 일어서며 거리를 벌렸다.
테레사를 향해 바람을 압축한 살상 마법을 시전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아앗!”
당황한 테레사의 앞을 막아선 레오.
팟!
익숙하게 윈드 커터를 잘라 내고는 도망치는 구에로를 향해 검을 던졌다.
컥-!
몇 걸음 움직이지도 못한 구에로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레오는 쓰러져 발버둥 치는 그에게 다가가 몸통에 박힌 검을 뽑았다.
“으으윽…!”
순식간에 벌어진 일.
눈을 동그랗게 뜬 테레사를 향해 레오가 나긋이 말했다.
“테레사 사제, 내가 흑마법사와 대화하는 법을 알려 주지.”
아아악-!
구에로의 양다리가 떨어졌다.
* * *
당황과 경계를 오가는 눈빛과 수상한 뒷걸음질.
테레사가 보기에도 동굴에서 나타난 남자는 충분히 의심스러웠다.
-사제님, 제발… 억울합니다요….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
이단 심문관으로 차출된 첫 임무. 증오스러운 흑마법사를 제 손으로 잡고 싶다는 욕구도 있었지만, 억울한 이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 또한 강했다.
-한마디만 하면 된다니까. 못 하겠어?
이죽거리듯 남자를 압박하는 레오.
절박하게 애원하는 남자.
저 남자가 정말 사냥꾼이라면?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저 산 너머에 존재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니 레오의 모습이 점차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네놈들은 하는 짓이 다 똑같아.
하지만 놈은 흑마법사였다.
레오의 눈은 정확했다. 오히려 어설픈 판단으로 위험을 자처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레사, 테레사 사제?”
레오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테레사는 부끄러움과 자책감이 얼굴이 붉어졌다. 돕겠다고 쫓아와서 그의 발목만 잡고 있었으니까.
“미안해요. 당신의 판단을 믿지 못했어요.”
“신경 쓰지 마. 중요한 건 흑마법사 놈을 잡았다는 거지.”
“…어떻게 확신한 거죠?”
“이놈들은 절대 자신이 켈시온의 수하라는 것을 밝히지 못 해. 금제가 있거든.”
“금제? 아, 그래서…!”
테레사는 그제야 말을 따라 해 보라는 의미를 깨달았다.
그가 흑마법사가 아니었다면 금방 자신을 증명했겠지. 레오는 확실한 심증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남자를 시험한 것이다.
“음, 일단은 살려 놓는 게 좋겠지?”
흑마법사의 호흡이 얕아지고 있었다.
옆구리의 깊은 검상에 양다리까지 잘려 꽤 많은 피를 흘렸다. 신음도 옅어지는 것으로 보아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가는 중임이 분명하다.
“아으윽…!”
테레사가 치유의 성법을 발휘했다.
황금색 빛과 함께 흑마법사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치료와 함께 놈의 신음이 커졌다. 정신이 들면서 잊고 있던 고통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또 헛짓거리 해 봐. 바로 목을 쑤셔 줄 테니.”
레오는 검 끝으로 놈의 목덜미를 툭툭 찔렀다.
어차피 오러안이 있으니 몰래 술식을 준비하려 해도 모두 보인다.
“네놈이 켈시온의 수하라는 건 이미 안다. 뭣 때문에 영혼을 수집하는지도 알고 있지. 그러니 다른 걸 묻지.”
구에로는 입술을 깨물었다.
켈시온의 존재도, 영혼 수집도 모두 극비 사항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는 걸까.
최근 동지들 사이에 ‘사냥꾼’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반년 전 잡혀 죽은 네메이르를 포함해, 국경 임무에 투입된 하슈도 종적을 감추었다.
모두 같은 사냥꾼에게 당했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내가 그 사냥꾼임이 분명했다.
“네놈들의 근거지는 어디냐. 아무리 점으로 움직인다 해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는 곳 정도는 있겠지.”
“…그걸 내가 대답할 것 같으냐.”
“동료는 팔지 않겠다? 이상하군. 너희 같은 족속에게 그런 유대감이 있을 리 없는데.”
“레오, 내가 맡겨 주지 않겠어요?”
테레사가 나섰다.
아까 실책을 만회하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였다.
레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단 심문관이 나서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기도 했으니.
“죽여라. 어차피 살려 줄 생각도 없지 않느냐.”
차가운 얼굴로 흑마법사를 내려다보던 테레사는 곧 놈의 더러운 망토 자락을 구겨 그대로 입속에 쑤셔 넣었다.
“으읍?”
당황한 흑마법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지? 심문을 하려던 것이 아니었나?
“당신, 뭔가 착각을 하는 것 같네요.”
테레사의 싸늘한 목소리.
그와 함께 그녀는 망설임 없이 흑마법사의 손가락 하나를 꺾었다.
구에로의 왼손 소지가 손목에 닿을 정도로 기이하게 굽어졌다.
으으으으읍-!
입안 가득한 천 조각에 놈의 비명은 울려 퍼지지 못했다.
“전 별로.”
뿌득.
검지가 부러졌다.
“당신한테 궁금한 게 없어요.”
뿌득.
이번에는 중지.
“오히려 당신이 애원해야 할 텐데요? 제발 내 말을 들어 달라고.”
뿌득, 뿌득.
테레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왼손 손가락을 전부 부쉈다.
구에로가 온몸으로 발버둥 쳤으나 밟힌 손목은 요지부동. 괴력의 성법을 가진 사제의 힘을 이겨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읍읍읍읍-!
아무 말 없이 다시 반대쪽 손목을 지긋이 밟는 테레사.
‘제발 그만! 말할게! 말할게!’
구에로는 절박하게 눈으로 애원했지만 테레사는 멈추지 않았다.
뿌득-!
또다시 다섯 손가락이 부러졌다.
비명도 제대로 내뱉지 못한 구에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몸부림치다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좀 말하고 싶어졌나요?”
구에로가 신들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금제고 뭐고, 뭐든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흥미로운 내용이어야 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방금 고통을 한 번 더 겪을 테니까.”
한 번 더?
열 손가락을 다 부러뜨렸는데 뭐가 ‘한 번 더’라는 거지?
지켜보고 있던 레오가 갸웃하더니 이내 탄성을 질렀다.
치유의 성법으로 뼈를 붙이면 다시 부러뜨릴 수 있다. 같은 부위를 몇 번이고 고문할 수 있다니, 이단 심문관에게 참으로 적절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 진의를 깨달은 구에로도 히익 몸을 떨었다. 이내 입을 자유롭게 해 주자마자 정보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으윽…. 브, 브뤼쉬! 브뤼쉬의 도시에 회합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동지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임무를 전달받습니다!”
“도시에?”
“그, 그렇습니다. 잡화점으로 위장된 장소입니다. 헤르만령에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잡화점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흑마법사의 회합 장소.
테레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단 심문관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브뤼쉬와 헤르만. 둘 다 켈시온 백작의 봉신이네?”
“…….”
“그래, 그 이상은 금제라 이거지?”
레오의 질문에 구에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 혹여 문제가 생길 경우 꼬리를 자르려는 켈시온의 수가 훤히 보였으니까.
“브뤼쉬도 가야겠어요.”
“그래, 놈의 팔 한짝부터 잘라 내자고.”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레오와 테레사는 브뤼쉬로 향했다. 숨만 붙은 채 시체처럼 늘어져 말에 묶인 흑마법사도 함께였다.
며칠 후 도착할 마을에 도착할 패트릭에게는 브뤼쉬로 넘어오라는 메모를 남겼다.
* * *
브뤼쉬의 외성문.
“정지! 신원을 밝히시오.”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레오 일행을 멈춰 세웠다.
낡은 로브를 둘러쓴 젊은 남녀.
특별히 이상할 것 없는 조합이다. 두 다리가 잘려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는 자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사제 테레사입니다. 오늘은 이단 심문관으로서 브뤼쉬에 방문했습니다. 길을 열어 주시지요.”
“어엇…!”
테레사가 나서자 병사가 주춤주춤 뒷걸음쳤다.
이단 심문관에 대한 소문은 제국 곳곳에 무성했다. 평소에는 자애로운 사제의 모습이지만 이단자에게만큼은 악마 같은 존재라고.
“이, 이단 심문관께서 브뤼시에 어쩐 일이십니까?”
“여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길을 여시지요. 만약 막으시겠다면….”
테레사가 망토 속 성법구를 슬며시 꺼내 보였다.
팔뚝 길이보다 조금 긴 육각 몽둥이였는데 성법으로 축복받아 그 무게가 굉장했다.
성력을 지니지 않은 자는 쉽게 들지도 못할 정도였고, 성력을 지녔더라도 선택받은 이만 지닐 수 있었으니, 괴력의 성법을 가진 테레사에게 안성맞춤인 법구였다.
“길을 막다니요, 그럴 리 있겠습니까!”
혼비백산한 병사를 지나쳐 도시 내부에 진입했다.
이들이 방문한 사실은 곧 영주성에 보고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시 내부의 흑마법사들 귀에 들어갈 소지도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서둘러야 했다.
“여, 여기서 왼쪽으로… 그러고 저 골목길로 쭉 들어가면….”
말에 묶이다시피 한 구에로는 안내로 곧 회합 장소라는 잡화점에 도달했다.
“아, 암호가 있습니다….”
“필요 없어.”
어차피 전부 깨부수러 온 마당에 암호는 무슨.
레오가 앞장서 잡화점의 문을 열었다.
끼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어두운 내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턱수염이 수북한 중년 사내였다.
“어떻게 오셨수?”
“무슨 가게가 이렇게 어두워? 장사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오러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는 레오.
곳곳에 술식이 장치된 것이 보였지만 정체는 알 수 없다.
경보 마법일 수도 있고, 공격 마법일 수도 있겠지.
“어떻게 왔냐니까.”
짜증을 숨기지 않는 턱수염 사내. 그 가슴에도 두 개의 고리가 보인다.
허리 높이의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레오와 턱수염 사내가 마주했다. 그리고 로브를 쓴 채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는 테레사.
“거참, 보채기는. 까마귀 새끼 주제에.”
쾅!
레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테레사가 법구를 휘둘렀다.
목제 카운터가 쪼개지며 파편이 튀었다.
턱수염은 재빨리 뒤로 몸을 피하며 경보와 방어 마법을 기동시켰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턱수염은 당황했다.
그사이 레오가 실내 곳곳에 장치된 모든 술식을 파훼했기 때문에.
콰직-!
테레사의 몽둥이질.
턱수염의 몸이 공중에 붕 뜨더니 천장에 맞고 다시 바닥에 떨어졌다.
달리는 말에 부딪힌 것 같은 충격. 갈비뼈가 모두 으스러진 턱수염은 그대로 혼절했다.
퉁퉁-!
사방을 둘러보던 레오는 턱수염이 처음 서 있던 바닥을 검집으로 두드렸다.
“이 아래가 수상한데?”
“비켜 보세요.”
몽둥이로 두드리자 바닥이 뻥 뚫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