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90화 (90/127)

90. 브뤼쉬 (4)

영지 관리인 율브렌은 이단 심문관이 도시에 방문했다는 보고에 곧바로 영주를 찾았다.

“정녕 본인이 이단 심문관이라 밝혔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여신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며….”

“어디로 향했다 하던가?”

“일단 외성문에서 온 보고입니다. 다음 행적은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보고드리겠습니다.”

“으으으…! 그래서는 늦는단 말이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치는 브뤼쉬 자작.

율브렌은 싸한 기운을 느꼈다.

이단 심문관은 분명 골치 아픈 존재다. 얼마 전 켈시온 백작도 이단 심문관에게 내내 감시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영주의 이런 반응은 과하다. 게다가 뭐에 늦는다는 말인가?

“안 되겠다, 채비를 하라! 듀발 경은 병사를 추려 나를 따른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

“여, 영주님?”

율브렌은 당황했다.

기사까지 앞세우다니, 마치 이단 심문관을 상대로 전투라도 벌일 듯한 기세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 건가?’

회의실에 혼자 남은 율브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브뤼쉬 영주는 탐욕스럽기는 하지만 머리가 비상한 인물은 아니다. 그런 영주의 부족한 점을 지금껏 보좌해 왔다.

반년 전 흑마법사 사건이 떠올랐다.

영주는 압송된 흑마법사를 곧바로 처형하라 명했다. 당시에는 일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심문 한번 하지 않고 처형한 것은 역시 부자연스러웠어. 잔여 세력이 브뤼쉬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그 반대라면?

영주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한 처형이었다면?

거기에 생각이 닿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영주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이단 심문관을 상대로 영주가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다면 최악의 경우 영지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자신도 잘못하다가는 이단자로 함께 죽임을 당할 판이다.

율브렌은 재빨리 움직였다.

영주의 의중과 흑마법사와의 관계를 아직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남을 길을 확보해야 했다.

“관리인님, 경비대에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무슨 일이냐?”

병사의 보고에 율브렌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3구역의 잡화점에서 소란이 일어 출동했는데, 이단 심문관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일단 대기 중이라는 내용입니다.”

“3구역의 잡화점?”

정신이 번쩍 들었다.

3구역이라면 도시 구석이다.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그곳을 급습한 모양.

이단 심문관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율브렌은 서둘러 영주성을 빠져나왔다.

영주보다 먼저 그들을 만나야 살길이 열릴 것 같았기에.

* * *

“여기 있다가 수상한 놈들 오면 알려 줘.”

캉!

슈니를 잡화점에 둔 레오는 지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끝에 열쇠도 걸려 있지 않은 헐거운 문이 나타났다. 경보 마법으로 추정되는 술식이 걸려 있는 문이다. 마력으로 암호를 해제하지 않고 그냥 문을 열면 경보가 작동되는 방식이겠지.

‘나름대로 머리를 많이 썼군.’

레오는 오러안으로 간단히 술식을 해제한 다음 문을 지났다.

이윽고 둥근 천장의 지하 굴이 나타났다. 자연 동굴이 아니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든 굴이다.

“누군가 있다.”

앞서 걷던 레오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벽 너머에 느껴지는 인기척. 청각을 집중하자 말소리가 들렸다.

[…할당량을 갑자기 늘리면 어쩌라는 거야.]

[까라면 까는 거지, 별수 있냐?]

[몬스터 각성제를 만드는 것도 돈이 많이 들어. 뭐 좋은 방법 없을까?]

[몰라! 씨발, 어디서 전쟁이라도 터져 주지 않으려나.]

[에이 썅…!]

벽 너머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놈들은 최소 세 명.

구불거리는 지하 통로를 조심스레 이동했다. 조금 더 접근하니 테레사에게도 말소리가 또렷이 들리기 시작했다.

레오는 잠시 여기서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손짓했다.

[돈을 더 받아 내 보는 건 어때? 급행료 명목으로.]

[누구한테? 그분에게?]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당연히 자작에게 받아야지.]

[그 욕심 많은 새끼가 돈을 줄까?]

[지금껏 그놈이 우리 활동비를 얼마나 떼어먹었겠냐? 이번에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그 새끼도 별수 없어. 이번에 급한 건 그 새끼라니까?]

[그럴듯한데? 크크큭…]

테레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활동비라니?

이들은 단순히 브뤼쉬의 도시 안에 자리 잡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브뤼쉬 자작의 지원 아래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겠어.’

레오에게는 희소식.

황제는 그에게 악마 숭배자 세력을 처단해 달라고 했다. 어차피 켈시온 백작을 치기 위해서는 손발이 되는 봉신부터 처리해야 하는바.

그런 면에서 브뤼쉬 자작을 칠 이보다 확실한 명분은 없었다.

[산맥 아래 마을은 구에로 녀석이 작업했을 테고…. 이번에는 동쪽으로 가 봐야겠다. 한동안 안 갔으니 몬스터도 꽤 늘었겠지.]

[그러면 내가 서쪽 숲으로 가지. 거기 봐 둔 마을이 있어.]

[지들끼리 편한 곳을 선점하고 지랄이야. 공평하게 갈라!]

[크크크, 늦은 새끼가 병신이지.]

법구를 쥔 테레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놈들은 마치 점심 메뉴를 고르듯 태연하게 어느 마을을 궤멸시킬지 정하고 있다.

‘우리 마을도 그렇게 정해졌던 걸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런 장난 같은 결정으로.

테레사는 레오를 바라봤다. 이단을 멸하는 것이 이단 심문관의 역할.

이제라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었다.

“뜻대로 해.”

레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테레사가 앞으로 나섰다.

망토를 풀어 헤치고 흰 사제복을 드러낸 그녀는 한 손에 법구를 쥔 채 작은 기도문을 읊었다.

“여신이시여, 어리석은 당신의 종을 인도하소서. 당신의 뜻을 행하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기와 힘을 내리소서.”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어두운 굴 안에 웅웅 울렸다.

“인간이란 본디 어리석으니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아니하는 날이 없도다. 그럼에도 어리석음을 탓하기보다 감싸고 보듬어 스스로 깨닫게 할지어다.”

고저 없는 목소리가 한걸음 한걸음에 이어진다.

낮고 조용히 시작된 기도문은 점차 크고 또렷해졌다.

“사악한 힘을 탐구하는 이에게는 단죄를 서슴지 말라 하셨으니….”

“뭐야! 누구냐!”

테레사의 목소리가 마침내 그들에게 닿았다.

흑마법사들은 이윽고 드러난 새하얀 사제복을 보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썅! 이단 심문관이다!”

“죽여!”

테레사의 기도가 끝났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성력이 폭발했다.

“단죄의 시간은 폭풍우처럼 몰아치리라.”

두 눈에서 뿜어진 황금빛이 어두운 공동을 환히 밝혔다.

손에 쥔 얇은 법구가 우웅- 하는 작은 공명음과 함께 두께와 길이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믿음직한 몽둥이가 됐다. 성력으로 활성화된 법구의 본래 모습이었다.

“으악! 내 눈!”

갑자기 밝아진 빛에 오랜 시간 어둠에 익숙했던 녀석들은 시력을 빼앗겼다.

황금색 빛 속에서 나풀거리는 흰 사제복이 희미하게 보일 뿐.

콰직!

테레사가 양손으로 쥐고 휘두른 법구에 한 흑마법사의 머리가 통째로 깨졌다. 거칠게 뜯긴 목의 단면에서 핏물에 튀었고, 토마토처럼 깨진 머리통은 벽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컥!”

옆구리를 강타당한 흑마법사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테레사의 괴력의 성법은 중급 몬스터와 능히 맞설 정도다. 그 몽둥이질에 옆으로 몸이 접히더니 반대쪽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척추가 부러지고 내장이 바닥을 더럽혔다.

쾅!

바닥이 움푹 파이며 돌이 튀었다. 테레사의 세 번째 공격이 빗나갔다.

간신히 몸을 굴려 목숨을 건진 흑마법사는 희미하게 돌아오는 시력에 의지하며 주문을 영창했다.

“라이트닝!”

전격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테레사를 덮쳤다.

좁은 거리라서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는 사지를 바들바들 떨면서도 흑마법사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씨발!”

살아남은 마지막 녀석이 욕설과 함께 모퉁이를 돌았다.

라이트닝으로 벌어 낸 몇 초가 목숨을 살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 헤르만에 합류해야 한다.

“어딜 도망가려고.”

멱살을 잡혔다 느낀 순간 공중을 날고 있었다.

바닥을 구른 흑마법사는 얌전히 테레사 앞으로 배달되듯 되돌아갔다. 그 머리 위에 피 묻은 몽둥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으아악-!”

콰직.

비명은 짧았다.

뭉개진 머리로는 더 이상 소리를 낼 수 없었으니.

“후우….”

테레사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라이트닝에 직격당해 화상을 입은 왼팔에 치유의 성법을 사용하자 아픔이 가시기 시작했다.

전격 마법에 당해 틈을 내주다니, 역시 실전과 훈련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느꼈다. 또한 라이트닝에 마비당하지 않도록 반복 훈련을 통해 내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브뤼쉬 자작이 이들과 직접 연루되었다니….”

“오히려 잘됐어, 직접 자작을 몰아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어쩔 거지?”

“자작에게 가겠어요.”

흑마법사들에게 들은 내용을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자작이 순순히 죄를 인정할까? 그건 모르겠다. 어쩌면 무력 시위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

테레사는 법구를 더욱 강하게 쥐었다.

“내가 말했지? 우리는 목적이 같다고. 브뤼쉬는 내가 친다. 사제는 그 명분이 되어 주는 걸로 충분해.”

“…도움 감사해요.”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 것 같네.”

레오와 테레사는 지하 굴을 거꾸로 이동해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다.

지하 계단을 모두 올라와 잡화점 내부에 들어서자 바닥에 주저앉은 한 남자가 그들을 맞았다.

“이놈은 뭐야?”

캉!

잡화점에 들어왔다가 슈니에게 잡힌 걸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걸 보니 슬쩍 슈니가 본 모습을 보인 모양이다.

“이, 이단 심문관님이십니까?”

낯익은 얼굴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오가 이내 그를 알아봤다.

“이게 누구야? 영지 관리인 아니신가?”

“저를 아십니까?”

“잘 알지. 반년 전에 봤잖아? 줄리앙밖에 기억 안 나려나?”

“…아앗!”

율브렌도 이내 레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베니에르 백작의 아들과 같이 있던 아카데미 생도 중 한 명, 분명 평민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저를 찾아온 겁니까?”

테레사가 나섰다.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진 그녀의 하얀 사제복을 보며, 율브렌은 이미 한바탕 일이 있었음이 직감했다.

“이단 심문관님, 저는 브뤼쉬의 영지 관리인 율브렌이라 합니다.”

“브뤼쉬 자작이 보냈습니까?”

회유 또는 적대.

테레사는 브뤼쉬 자작의 반응이 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어느 쪽이라도 해도 일단 영주성 내로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이단 심문관과 적대하는 모습을 영지민들에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닙니다, 제 독단으로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저 율브렌은 이단 심문관님을 돕겠습니다!”

“예?”

“뭐라고?”

예상치 못한 답변.

두 사람의 반응도 한 템포 늦었다.

“영지 관리인 율브렌, 그대는 지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까?”

“물론 알고 말고요. 곧 브뤼쉬 자작이 기사와 병사를 이끌고 올 겁니다. 이단 심문관님을 겁박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 또한 여신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진실을 결코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레오도 테레사도 말문이 막혔다.

결국은 제 주인을 배신하겠다는 건데 청산유수로 명분을 들먹이니 뭐라 반박할 수가 없다.

[어쩌지.]

테레사의 눈빛.

[뭘 어째. 제 발로 우리 편이 되겠다는데.]

그렇다면 써먹어 줘야지.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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