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92화 (92/127)

92. 때를 준비하는 이들 (1)

브뤼쉬의 영주성.

“장부를 찾았습니다!”

탐욕 그득한 브뤼쉬 자작을 보좌하며 영지 관리를 해 왔다는 율브렌은 생각보다 더 유능했다.

반나절 만에 자작의 이중장부를 발견하더니 흑마법사를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자금 흐름까지 잡아내 정리를 끝냈다.

레오와 테레사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여 각각 황실과 신전에 보고 서신을 보냈다.

황제는 즉시 브뤼쉬령을 회수하겠다고 선포했다. 엄밀히 따지면 브뤼쉬령에 대한 권리는 켈시온 백작에게 있었으니, 이는 굉장히 이례적이고 과감한 결단이었다.

“생각보다 켈시온의 반발이 없군요.”

“괜히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는 거겠지.”

다른 것도 아닌 악마와 관련된 일이다. 켈시온 백작도 일단은 몸을 뺄 수밖에 없었을 터.

이후 사흘간 둘은 브뤼쉬 성에 더 머물렀다.

자작의 방과 집무실을 집중적으로 수색했지만 추가적인 수확은 없었다. 그동안 패트릭이 브뤼쉬에서 합류했다.

“브뤼쉬 자작이 악마의 종을 부리고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소문이야?”

“그래, 딱 그 말대로였어.”

“이분은… 혹시 소문의 이단 심문관님이신가요?”

브뤼쉬 저잣거리는 악마의 종을 베었다는 소드 마스터와 이단 심문관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 한 명이 레오였으니, 사제 복장의 테레사가 이단 심문관임을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단 심문관 테레사예요.”

“여신의 종이 이단 심문관님을 뵙습니다. 패트릭 마이어라 합니다.”

“마이어라면 혹시…?”

“예, 저는 그 마이어 가문의 차남입니다.”

“항상 많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 만남 또한 여신의 안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테레사가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북부 대륙에 남은 마지막 신전이 유지되는 것은 오직 신도들의 헌금 덕이다.

그중에서도 마이어 가문의 헌금은 최근 수십 년간 신전의 생명줄이었다. 그러니 테레사가 패트릭에게 호의적인 것도 당연했다.

“이제 출발하지.”

셋은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목적지는 신전이었다.

* * *

레오가 혼자서 수도를 떠나고.

바이스만으로 돌아갈까 고민하던 덱스는 당분간 수도에 남기로 했다.

막 서클을 하나씩 추가한 유리아, 세실을 가르치며 함께 마법 공부를 하는 것은 의외로 즐거웠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그간 당연히 여긴 것의 원리를 새로이 깨닫고, 그것이 지식으로 확장되는 경험은 신선하면서도 중독적이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몸이 찌뿌둥하단 말이지.”

휴식기의 아카데미는 고요했다. 기숙사에 남아 있는 생도는 덱스를 포함해 열 명도 채 안 될 것이다.

덱스는 아침부터 메이스를 들고 홀로 연무장에서 몸을 풀었다. 그래도 답답함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이렇게 했던가? 이렇게?”

덱스는 가상의 적을 상상하며 청강 때 연습했던 움직임을 반복해 보았다.

전투 기술이란 참으로 오묘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마법도 마찬가지이지만 전투 기술은 더욱 그렇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감각적으로 판단해 정답에 가까운 대응을 찾아야 한다.

그 재미를 알아가던 중 진급 시험이 다가온 탓에 덱스는 꽤 감질난 상태였다.

“안녕, 덱스. 좋은 아침이야.”

“일찍 나왔네?”

곧 아카데미 기숙사에 함께 남아 있던 유리아와 세실이 합류했다.

최근 매일 반복하는 시간이다. 서로 고안한 술식을 공유하고 함께 보완하는 공부는 굉장히 큰 도움이 됐다.

“진작 이런 식으로 공부했다면 좋았을 텐데, 왜 마법사는 서로 술식을 공유하지 않는 거야?”

덱스는 그것이 궁금했다.

지금까지 마법사가 자신의 술식을 밝히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었다.

같은 마법이라 해도 술식의 큰 틀만 같을 뿐 세부 술식은 모두 저마다 달랐으니, 스승과 제자라 할지라도 완벽하게 자신의 술식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마치 요리사가 자신만의 요리 레시피와 노하우를 보물처럼 여기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아카데미의 수업도 일반적인 이론 수업과 각자 실습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제야 그렇게 느껴. 네가 5서클의 깨달음을 알려 준다고 했을 때도 믿기지가 않았지.”

유리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말처럼 지금 마법사 간의 정보 교류는 너무 폐쇄적이다. 충분히 함께 발전할 여지가 있음에도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것 같다.

“결국 다들 당장 손에 쥔 것을 아까워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겠지.”

“그런 분위기를 바꿔야지. 그러면 분명 다 같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그 말이 맞아.”

마법이란 선택받은 이들의 것이라는 특권 의식.

그것이 더욱 폐쇄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개인의 발전 기회를 막고 있었다.

그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세실이 조용히 입을 뗐다.

“…얘들아, 나 줄곧 고민하고 있던 게 있었는데 말이야. 이 모임에 오라버니도 함께하면 안 될…까?”

“줄리앙을?”

“안 될 것 없지! 오히려 환영이야! 안 그래, 덱스?”

“어? 뭐, 그렇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데 세실이 그런 말을 꺼낸 게 의외네. 줄리앙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세실이 줄리앙에게 유독 쌀쌀맞게 대하는 것은 별로 비밀도 아니다. 덱스마저 학기 초에 눈치챘을 정도니까.

“그, 그냥 요즘 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래 세실 잘 생각했어!”

“흐흥, 그래도 오라비라고 챙기는 거 봐라.”

“챙기긴 뭘 챙겼다고 그래!”

“그리고 보니 줄리앙 녀석 보고 싶네. 그래도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인데.”

세실은 여전히 발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였다.

줄리앙의 변화를 주의 깊게 보기 시작한 것은 본가에서 저녁 식사를 한 이후부터였다. 언제나 주변을 휘두르며 주목받으려 하던 철없는 행동이 점차 사라졌다. 지난 휴식기 동안 본가에서 얌전히 지냈다는 말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내게는 한 번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었지….’

그 실망스러운 모습에 어느 순간부터 오라버니를 멀리했다. 줄곧 무시로 일관했고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줄리앙은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힘든 황궁 생활의 원망을 그에게 돌린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본가에서 함께 공부하는 건 어때?”

“너희 집? 어디든 상관없긴 한데….”

“나도 좋아. 세실에게 처음 초대받은 거네.”

“그러면 오후에 출발하자. 미리 연락해 놓을게.”

베니에르령은 메프람에서 가장 가까운 영지다. 오후에 출발하면 저녁 무렵에는 도착할 정도로.

오랜만에 본가에 들를 생각에 세실도 조금 들떴다.

* * *

아카데미의 진급 시험 며칠 전부터, 베니에르 백작가는 꽤나 수선스러웠다.

“침구는 새것으로 준비되었지요? 의복은 어떻게 되었나요? 재단사에게 다시 한번 일정을 확인하세요.”

하녀장은 날카로운 눈으로 줄리앙의 방을 점검하며 지시를 내렸다.

줄리앙 공자가 돌아온다.

지난 휴식기에는 기적적으로 조용히 지냈던 공자이지만 방심하기에는 이르다. 지난 수년, 그의 변덕과 짜증에 시종들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러니 하녀장을 비롯하여 시종들이 잔뜩 긴장하는 것도 당연했다.

비로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줄리앙 공자가 돌아온 날.

집사와 하녀장이 저택 입구에서 그를 맞이했다.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몇 달 사이에 더 어른스러워지셨군요.”

“뭐 대단한 일이라고 다들 모였어.”

노집사 필립의 인사에 줄리앙은 슬쩍 인상을 쓰며 손을 내저었다.

하녀장은 흠칫 긴장했지만, 필립만큼은 그것이 쑥스러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오랜만에 본가에 오셨으니 편하게 푹 쉽시오. 다들 공자님을 기다렸답니다.”

“기다리긴…. 아버님은?”

“당분간 수도의 저택에 머무르실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신 모양입니다.”

“안 바쁘실 때가 있기나 했던가.”

후우-!

줄리앙은 영주성 입구에서 습관처럼 심호흡했다.

몇 달 전 본가에 왔을 때는 그렇게나 가슴이 갑갑했는데, 지금은 그리 괴롭지 않다.

“엘린도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입구에 들어서던 줄리앙은 고개를 숙이고 서 있던 하녀장 엘린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

철없던 시절 집사 필립만큼이나 고생시킨 이가 하녀장이었으니… 괜히 보기만 해도 미안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엘린.

그녀는 줄리앙 공자가 이제 철이 든 것 같다는 집사 필립의 말을 쉬이 믿지 않았다. 지금껏 그런 희망이 한두 번이었던가.

“그럼요, 공자님도 건강해 보이셔서 기쁩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스쳐 지나는 줄리앙.

과거처럼 위태로움이 가득했던 눈동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필립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엘린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공자님, 지금 본가에 손님이 한 분 머무르고 계십니다.”

“그래?”

줄리앙은 집사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백작의 손님이 저택에 머무르는 일 정도는 흔한 일이다. 오히려 한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이 더 의외일 정도.

“그분이 여기 계신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아마 공자님께서 아시는 분일 겁니다.”

“누구길래 그래?”

“슈멜린 백작이십니다.”

“…카르파 슈멜린 백작?”

속삭이는 듯 낮은 대답에 줄리앙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했다.

아카데미 학부장직을 내려놓고 사라졌다는 슈멜린 백작이 이곳에 있다고? 그것도 비밀리에?

“별채에 머무르고 계신가?”

“그렇습니다. 저택에서 그분의 신분을 아는 이는 가주님과 제가 유일합니다. 다른 시종들에게는 멜린 남작이라는 거짓 신분을 알렸습니다. 공자님께서 돌아오시면 이것을 꼭 미리 언질하라 하셨기에….”

“그런가.”

줄리앙의 미간이 굳어졌다.

거짓 신분까지 만들어야 할 정도라니 무슨 일일까? 생각보다 단순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먼지 한 톨 없을 것 같은 방에서 혼자 식사를 마친 줄리앙은 이내 방문을 나섰다.

‘아무래도 한번 만나 보는 게 낫겠지.’

별채의 손님이 계속 신경 쓰였다.

갑자기 떠난 전사 학부장 카르파에 대한 소문은 한동안 아카데미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건 마법 학부 생도들 사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걸 차치하더라도 베니에르 가문의 후계자로서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는 법.

줄리앙은 거침없이 별채로 향했다.

도중에 만난 시종의 안내를 받아 도달한 곳은 별채에 딸린 연무장.

그곳에서 카르파는 웃통을 벗은 채 아주 느린 속도로 검을 연마하고 있었다.

“으음? 누구신가?”

일부러 멀찍이 서서 다가가지 않았음에도 카르파는 금방 줄리앙의 기척을 눈치챘다.

검을 내린 그의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줄리앙 베니에르입니다.”

“오늘 돌아오신다던 베니에르가의 장자셨군.”

줄리앙은 카르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몸은 쉰을 훌쩍 넘긴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다.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검사였으니까.

“남작님이라 부르는 게 나을까요?”

“그리해 주겠나? 이곳에서야 우리 둘뿐이니 상관없지만 실수는 줄이는 편이 좋겠지. 마법 학부 1학년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네. 진급 시험이 끝나 본가에 돌아온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으니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흐음….”

카르파의 눈이 날카롭게 줄리앙을 훑었다.

다소 의아함이 깃든 눈빛.

“왜 그러시는지….”

“자네 말이야. 들은 것과 조금 다르군.”

“하하… 부끄럽습니다.”

줄리앙은 멋쩍게 웃었다.

베니에르 가문의 장자가 철없는 망나니라는 소문은 몇 년째 사교계에 파다했다. 황궁을 떠난 지 오래인 카르파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면 귀족가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카르파가 느낀 줄리앙은 그런 소문과 꽤 달랐다.

물론 이제 대화 몇 마디가 전부였지만 진짜 몹쓸 망나니는 말을 섞어 볼 필요도 없이 바로 눈에 띄는 법이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참입니다. 많은 과오를 저질렀으나 하나씩 고쳐 가려 합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네. 당연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아주 훌륭한 첫걸음을 떼었구먼.”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더 노력해야지요.”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내가 도와주지.”

“별말씀을… 예?”

목뒤를 긁던 줄리앙의 손가락이 멈췄다.

도와주다니 갑자기 이건 무슨 말인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 매일 아침저녁, 식사 후에 이곳으로 오게.”

“아, 아닙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그리고 저는 마법사이고…!”

“신세를 지고 있으니 이 정도는 갚게 해 주게! 한동안 무료했는데 덜 심심하겠구먼, 하하핫!”

줄리앙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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