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93화 (93/127)

93. 때를 준비하는 이들 (2)

“사양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카르파는 거절은 절대 받지 않겠다는 듯 완고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때 황궁 근위 기사단 단장을 했던 카르파 슈멜린이다. 검사로서 그의 가르침을 받는 기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줄리앙이 검사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그의 체면을 생각하면 줄리앙도 더 이상 거절하기 힘들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반강제로 줄리앙의 훈련이 시작됐다.

당연히 처음부터 검을 쥐는 건 무리. 기본적인 신체 단련부터였다.

“비실비실한 마법사치고 기초 체력은 나쁘지 않구먼.”

“하악- 하악-!”

이걸 덱스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줄리앙은 지난번 덱스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체력 단련의 필요성을 새삼 느꼈다.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그 요상한 체조를 해 왔다.

“그것참 좋은 운동법이야.”

유리아와 세실이 매일하고 있다는 그 체조.

시범을 보이자 카르파도 손바닥을 치며 흥미를 보였다.

이러다가 아카데미에 공식 체조로 지정되는 건 아니겠지? 줄리앙은 잠깐 그 생각에 불안해졌다.

이후 휴식기 동안 본가에서 푹 쉬려 했던 줄리앙의 일정은 오히려 훈련으로 가득 찼다.

“이제 검도 한번 쥐어 볼까?”

“예에? 검요? 이렇게 빨리 검을 들어도 되는 겁니까?”

“정해진 것이 어디 있겠나? 전장에는 어제까지 농사를 짓던 자도, 장사만 하던 자도 있다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마법사인데요?”

“마법사라고 맨몸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적은 자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아.”

카르파의 정론.

어쨌든 고작 열흘 만에 줄리앙은 검을 들었고, 그렇게 한창 검술의 기초를 닦기 시작할 때, 메퀸토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다.

매일 이어지던 훈련이 처음으로 중단됐다.

꼬박 하루를 식사도 없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카르파는 다음날 다시 평상시처럼 훈련을 지속했다.

카르파는 메퀸토의 추모식에도 불참했다. 베니에르가에 비밀리에 몸을 의탁한 것을 허사로 만들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아카데미의 휴식기가 한 달가량 남은 시점.

베니에르에 손님이 찾아온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세실 아가씨가 황녀님을 모시고 온다고?”

유리아 황녀의 방문 소식.

언제나 여유롭던 노집사 필립도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 *

켈시온 백작의 집무실.

책상에 붙어 있던 동그란 철제 장식이 은색에서 붉은색에서 변하며 은은한 빛을 냈다.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통신 마도구에서 내보내는 수신 신호였다.

‘붉은색, 헤르만인가.’

켈시온은 고개를 갸웃하며 붉은색으로 빛나는 장식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기다리던 연락은 브뤼쉬의 노란색 신호다. 그런데 이쪽에서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반응이 없던 차에 뜬금없이 헤르만에서 연락이 오다니 별로 예감이 좋지 않다.

“뭐지?”

[백작님,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다급한 목소리.

자연히 켈시온의 미간이 틀어진다.

“무슨 일 말이냐? 너희에게는 대기하라 명령했을 터.”

[백작님, 브뤼쉬 자작이 이단 심문관에게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일단 까마귀를 보냈습니다만, 들려오는 소문이 아무래도 거짓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뭣이! 브뤼쉬 자작이 죽어?”

[이단 심문관에게 즉결처분당했다 합니다.]

“브뤼쉬가… 즉결처분을…? 그 계집에게?”

켈시온 백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한동안 들러붙어 귀찮게 하던 이단 심문관 계집. 그년이 주변을 맴돌지 모른다는 생각은 충분히 했다. 그런데 하필 그 마을에 계집이 있었을 줄이야…!

부득!

이를 갈던 켈시온은 이내 고개를 털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작의 옆에는 듀발이 있었을 터. 아무리 이단 심문관이라 해도 마수화한 듀발의 상대는 될 수 없다.

“…그 계집 혼자였나?”

[예?]

“이단 심문관 계집이 혼자서 듀발을 상대했냐고 물었다!”

[확인된 바는 아니나 바이스만 남작이 함께였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레오 바이스만! 또 그놈인가!

켈시온은 부르르 주먹을 떨었다.

아카데미 교류전도, 반다이트 국경의 건 보고서에도 그자의 이름이 올라왔다.

이번에도 그가 연루됐다고? 바이스만의 영주가 때마침 까마귀가 작업 중이던 브뤼쉬에서 이단 심문관과 합류한 것이 우연일까?

그럴 리 없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다. 그자는 뭔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브뤼쉬의 집합소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 즉시 확인하도록. 그리고 이단 심문관과 바이스만 남작의 행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백작님.]

까드득.

통신을 마친 켈시온 백작은 손톱으로 책상을 긁어 냈다.

요크 후작에게 받은 유예는 이제 스무날도 남지 않은 상태. 이렇다 할 실적도 없는 상황에서 계획은 어그러지고만 있다.

‘만약 지금까지 내 계획을 망친 주범이 레오 바이스만이라면….’

퍼즐을 모두 맞출 시간은 없다. 하지만 본능적인 감각은 이미 바이스만을 가리키고 있다.

켈시온이 손바닥을 가져다 대자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는 마도구.

이번 통신처는 헤르만의 까마귀 집합소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지금 당장 집합소를 폐쇄하고 소거 플랜을 이행하라. 최우선 순위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까드득.

백작의 손톱에 목제 책상에 흠집이 깊어졌다.

헤르만령에 까마귀를 심는 데 들인 공이 만만치 않았다. 그것을 폐기하려니 속이 쓰렸다.

‘아깝지만 별수 없지. 지금은 영혼 수집이 먼저다.’

켈시온은 결심을 굳혔다.

헤르만에 소드 마스터와 이단 심문관을 정면에서 상대할 전력은 없다. 그래도 발을 묶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의 손이 다시 통신 마도구로 움직였다.

* * *

“카르파 슈멜린이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백작께서 이곳에 계실지 몰랐군요.”

베니에르 가의 별채에서 유리아는 카르파를 만났다.

독대를 요청한 쪽은 카르파였다. 그저 아카데미 남은 휴식기를 이곳에서 보내려던 유리아가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학부장직을 내려놓고 사라진 그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굳이 제게 만남을 청한 이유가 있겠지요?”

짧은 침묵 끝에 카르파가 무겁게 입을 뗐다.

“제국에 악마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악마라니요?”

“이것을 읽어 주십시오.”

유리아는 카르파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었다.

속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유려한 서체가 매우 익숙했다.

“이건 스승님의 글씨….”

“그렇습니다. 그가 제게 남긴 것입니다.”

추모식으로부터 불과 이주일.

스승의 필적을 알아본 유리아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읽어 내려갔다.

안에 담긴 내용은 무겁기만 했다.

아카데미 교류전에 나타난 마물과 수상한 마도구.

보르트의 침공과 그 인근에서 발견된 흑마법사의 마도구와 영혼석.

그 모든 것의 배후로 추측되는 후작파와 2황자.

더불어 카르파에게 뒷일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계셨군요. 그러네요. 정신체로 악마를 쫓다니, 너무도 무모하셨어요….”

“하지만 그 덕분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이스만 남작이 봉마석이 있는 신전으로 향한 것이군요.”

유리아는 이제야 레오의 행보를 납득했다.

일개 평민이 영주가 되었다. 단숨에 격상한 지위에 취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영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의 움직임에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다. 오히려 영지나 영주의 지위 같은 건 그저 도구로 생각하는 듯했으니까.

바이스만 남작.

유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는 모든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아카데미 교류전에서 가장 먼저 마물과 싸운 것도 그였고, 반다이트를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흑마법사를 발견한 것도 그였으며, 메퀸토에게 조사를 의뢰한 것도 그다.

레오 바이스만이 아니었다면 악마 숭배자에 대한 것들을 이만큼 밝혀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반대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어째서 그는 이리도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마치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백작께서 몸을 숨기고 있는 이유. 그것은 적을 꾀어내기 위함이었군요.”

유리아는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말했다.

악마 숭배자로서 제국을 전복을 노리는 적, 후작파.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황제파의 힘을 깎아내리고자 할 것이다.

눈엣가시였던 메퀸토가 죽었고, 카르파도 사라졌다. 반다이트 백작은 제 영지에 있으며, 또 다른 소드 마스터인 바이스만 남작도 수도를 떠나 있는 상황.

그들에게는 수도가 비어 있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말씀대로입니다. 놈들은 벌써 몇 차례나 실패했습니다. 대규모 영혼 수집을 위해 조만간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내용을 아는 사람은 또 누가 있습니까?”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도 알고 계십니다. 필요할 경우 황궁 근위 기사단을 동원할 예정입니다.”

“만약 지난번처럼 수도 한가운데 마물이 발생한다면….”

“그 또한 최악의 상황 중 하나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베니에르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줄리앙을 가르치고 계셨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카르파 슈멜린 백작이라 해도 다른 귀족의 사병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줄리앙을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영지를 자주 비우는 베니에르 백작 대신, 필요한 경우 줄리앙이 지휘관이 되어 주어야 했기 때문.

“그렇다면 손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요?”

“예?”

“애당초 저희는 줄리앙과 함께 마법을 수련하려고 이곳에 왔어요. 제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지만, 저를 포함해서 덱스, 세실 모두 우수하답니다.”

4서클만 되어도 전장에 발휘하는 영향력이 크다. 5서클은 말할 것도 없다.

다만 둘이나 5서클에 이르렀다는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송구한 말씀이지만 생도는 생도일 뿐입니다. 그들의 빛나는 재능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으나, 제국의 미래를 이끌 이들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카르파는 단호히 답했다.

아카데미의 생도는 우수하다. 그들이 전장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하리라는 것 또한 안다.

그러나 희생도 분명히 발생할 터. 다음 세대를 이끌어야 할 이들을, 미처 개화하기도 전에 전장에 내몰 수는 없는 법.

“그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전력이 된다면 배제할 이유도 없겠지요. 만약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저를 포함하여 세실과 덱스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단독 행동을 할 바에는 제대로 된 지휘 체계 안에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

카르파는 침묵했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백작님, 한번 시험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시험이라니요?”

“직접 수준을 판단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마지못해 답하는 카르파.

그 뚱한 대답에 유리아는 방긋 미소 지었다.

카르파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었기 때문에.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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