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때를 준비하는 이들 (3)
바이스만에 남은 샤를롯은 이제나저제나 덱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덱스와의 훈련으로 모처럼 3서클에 오른 참이다. 이제부터 어떤 새로운 훈련을 할까 기대하던 차, 다들 메퀸토의 추모식 참석을 위해 다들 수도로 떠나 버렸다. 그러고는 벌써 일주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다.
“블레아 언니, 오늘도 소식 없어?”
샤를롯은 오늘도 영주성의 블레아를 찾아가 물었다.
“없어. 없어. 그러지 말고 직접 수도에 가 보는 건 어때? 입학시험도 몇 주 안 남았다며.”
블레아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내저었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꼬맹이가 귀찮았지만 이제는 꽤 친해졌다.
“후음, 스승님 정말 너무해….”
샤를롯의 눈에서 조용히 불꽃이 튀었다.
그럴 만도 하다. 덱스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자꾸 사라져 버리기만 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장난기가 발동한 블레아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러게. 마법사님도 참 매정하시네. 이렇게 귀여운 제자가 기다리고 있으면 잽싸게 돌아오셔야지.”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나 몰래 다른 제자들까지 만들고 말이야.”
“혹시 다른 제자들 때문에 수제자를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어?”
샤를롯은 머리가 멍해졌다.
지금껏 자신이 첫 번째 제자임을 당연히 여겼다. 너무도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사실.
그런데 스승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까?
“스, 스승님은 그럴 사람이 아니야!”
“혹시 모르지, 아름다운 황녀님과 백작가 영애 사이에서 판단력이 흐려졌을지. 마법사님도 일단은 남자잖아?”
“그, 그런 거야?”
발끈했던 샤를롯의 목소리가 이내 파르르 떨렸다. 얼굴은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고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러면서도 울지 않으려 잔뜩 인상을 쓰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블레아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마법사님은 대단한 분 맞지?”
“엄청 대단하지, 그래서 스승님으로 삼은 건데….”
“아마 다른 사람이 봐도 마법사님은 대단할 거야. 그만큼 인기도 많지 않을까?”
“…어, 어떡하지? 그러면 스승님이 나를 버리는 거야?”
“샤를롯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나?”
샤를롯은 덱스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저 아버지의 평범한 손님이라고 생각했다.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한다는 말에 조금 흥미가 일었고, 어느새 매일 아침 뒷마당에서 이어지는 대련을 구경하게 됐다.
그는 매일같이 지기만 했다. 분해서 씩씩거리는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한 번이라도 이기겠다며 온몸으로 오기를 부렸다.
마침내 레오에게 한 판을 따냈을 때, 저도 모르게 제자로 삼아 달라고 했다.
“…어디 안 가고 내 스승님만 했으면 좋겠어.”
오호라!
블레아는 귀까지 붉어진 샤를롯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단순한 독점욕이 아니다. 어리지만 어엿한 소녀의 연심인 것이다. 지금껏 긴가민가했던 것을 확신한 블레아는 아직 자기 마음을 잘 모르는 꼬맹이의 등을 슬쩍 밀어주기로 했다.
서류를 놓고 샤를롯에게 바짝 상체를 굽히는 블레아.
“내가 생각할 땐 말이야. 샤를롯이 좀 더 확실히 할 필요가 있어.”
“확실히?”
“그렇지, 이 사람은 내 거다! 하고 공표해야 한다는 말이야. 아니면 지금 같은 일이 계속 일어날걸. 그래도 좋아?”
샤를롯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리지만 그 안에는 어엿한 상인의 피가 흐른다. 바보처럼 제 것을 빼앗길 성격이 아니라는 뜻.
“그건 절대로 싫어.”
당연하게도.
두 손 놓고 있다 스승님을 빼앗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 * *
별채 연무장.
카르파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황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의아했다. 전사 학부도 아니고, 마법 학부 생도를 대련이라는 형식으로 시험해 달라니.
“자네는 마법사가 아니었나?”
“마법사 맞습니다.”
상대는 마법 학부 1학년 수석 덱스.
별난 녀석이라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메이스를 들고 대련에 임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이곳이 아카데미였다면 따끔하게 혼을 냈을지 모르는 일.
“…상관없겠지.”
하지만 카르파는 입을 닫았다.
이 대련의 목적은 저들의 역량을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니까.
실전에서 모든 판단에 대한 결과는 스스로 져야 한다. 그것이 비록 죽음일지라도.
“그럼 시작하지.”
카르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진검을 쥔 그에게서 흉흉한 기세가 뿜어진다.
은퇴했다고는 하나 그는 여전히 맹수였다,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저게 진짜 살기….’
지켜보던 줄리앙도 마른침을 삼켰다.
살기를 이겨 내는 것이 실전의 첫 번째 과제다. 그 또한 몬스터과 처음 마주했을 때 흉악한 살기에 겁부터 집어먹었다.
지금 카르파에게 느껴지는 살기는 몬스터의 것과 결이 달랐다. 날카롭게 벼린 서늘한 칼날이 목 아래 드리워진 듯 몸을 꿈쩍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자, 어찌할 테냐.’
뿜어내는 날카로운 기세와 달리 카르파는 내부는 아주 평온했다.
시험은 이미 시작됐다. 이 정도 살기에 몸이 굳는다면 전장에서는 눈 깜짝할 사이 시체가 된다.
하지만.
카르파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 낸 덱스는 씨익- 미소를 보였다.
벌써 몇 번이고 전장의 공기를 겪은 덱스다. 몬스터와 인간 그리고 되살아난 시체의 머리까지 깨부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이 정도 살기는 이미 익숙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모르는 사이 카르파의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덱스.
그는 지면을 차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더니 묵직한 메이스로 카르파의 머리를 노렸다.
가볍게 쳐내며 곧바로 역공을 가하는 카르파.
그 검을 흘리며 거리를 벌렸다가 다시 달려드는 덱스.
카가가강-!
순식간에 서너 합이 교차한다.
‘생각보다 기초는 잡혔군.’
카르파는 내심 감탄했다.
마법사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술 기초가 잘 잡혀 있다. 몸놀림이 잽싸고 전투 센스도 좋은 편이다. 적어도 겉멋으로 메이스를 든 것이 아니란 건 알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법사이면서 오러로 신체를 강화한 기사의 힘과 속도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
‘보조 마법을 활용한 것인가?’
추측대로 스트렝스와 헤이스트 덕이다.
마법을 잘 모르는 카르파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오히려 지켜보는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어떻게 된 거야?”
“…저 공격을 받아 낸다고?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세실과 줄리앙이 입을 떡 벌렸다.
마법사는 오러를 쓰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오러를 다루는 기사와 대등한 신체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덱스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카르파의 공격을 대등하게 받아 내고 있었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를 중첩해서 신체 능력을 향상시켰어.”
그에 비해 유리아는 비교적 침착했다.
이러한 덱스의 모습은 이미 숲에서 한 번 경험한 바 있었기에.
“중첩? 서로 다른 두 가지 마법을 중첩해서 유지하고 있다고?”
“…덱스 녀석, 생각보다 더한 괴물이었구나.”
세실은 혀를 내둘렀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는 신체 능력을 곧바로 향상시키는 대표적인 보조 마법이다.
이론적으로 이를 중첩하면 마법사의 생존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지만, 실전에서 쓰이지 않는 이유는 명백했다. 이 두 가지 마법을 중첩해서 쓰면 다른 마법은 거의 쓸 수 없기 때문.
그렇게 되면 마법사의 존재 의미가 없다. 차라리 전위에게 방어를 맡기고 원거리 공격에 치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조금 강도를 높여 봐도 되겠군.”
“…부탁드립니다.”
카르파의 입꼬리가 휘었다.
덱스에 대한 평가는 이미 첫인상과 많이 달라졌다.
마법으로 신체 강화를 한 것은 둘째치고, 기본적인 신체 단련 수준이 훌륭하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마법사가 아니라 아직 오러를 쓰지 못하는 기사 지망생이라 여겼을 정도다.
카가강-!
오러가 실린 카르파의 검이 다시 한번 덱스를 쫓았다.
덱스는 이를 악물고 몸을 틀며 검을 쳐 냈다.
‘조금 더 해도 괜찮겠어.’
카르파는 틈을 주지 않으며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대략 하급 기사의 수준으로 그를 상대하고 있다.
상대가 전사 학부 1학년이라면 평균 정도라 평가하겠지만 그는 마법사다. 하급 기사와 대등하게 치고받는 마법사? 그런 건 지금까지 들어 본 적도 없다. 더욱이 그는 아직 다른 마법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조금 더 오러 출력을 올렸다.
더 빠르고 강한 공격에 덱스의 눈과 팔이 점차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가 한계인가?’
수준을 파악했으니 이제 평가를 끝낼 시간.
카르파의 검이 덱스의 빈틈으로 찔러 들어갔다.
동시에 덱스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으음.”
카르파가 침음과 함께 미간을 굳혔다.
무언가 뒷발을 슬쩍 당기는 미미한 방해.
그것이 찰나의 빈틈을 만들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 덱스.
“드디어 마법을 쓰기 시작한 건가? 재미있군.”
발에 엉겨 붙은 나무줄기를 털어 내는 카르파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현역 시절, 전장에서 만난 적군 마법사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말 힘들었던 상대는 서클이 높은 놈이 아니라 끝까지 비장의 한 수를 숨겨 둔 녀석들이었다.
마지막 순간 마법으로 위기에서 탈출하는 덱스에게 그런 녀석들의 냄새가 났다.
우웅-!
카르파가 오러를 완전히 활성화했다. 농밀한 오러 소드가 검에 깃들었다.
한때 소드 마스터에 가장 근접했다고 불린 몸. 은퇴했다고 하나 그 실력은 여전히 제국 다섯 손가락에 든다고 평가받는다.
“칫!”
덱스 또한 정면 승부는 위험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카르파가 쇄도하기 전에 더욱 거리를 벌리며 라이트닝을 뿌렸다.
파지직-!
좌우로 움직이며 피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그대로 오러 소드로 뚫고 들어오는 카르파.
레오처럼 마법을 파훼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오러 소드로 전격을 후려친 것이다.
물리적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해도 감전 효과는 그대로 남는다. 하지만 카르파의 몸놀림은 전혀 느려지지 않았다.
“으읏!”
덱스가 처음으로 당황한 얼굴을 내비쳤다.
카르파의 검을 직접 받아 내려는 듯 메이스를 꾹 쥐는 모습.
언뜻 마법을 포기하고 정면 대결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또한 연기였다.
‘일단 거리부터 벌려야 해.’
카르파가 본 실력을 드러낸 이상 정면 대결에 승산은 없다.
방심을 유도하여 공격을 받아 내고, 그 힘으로 거리를 벌리며 역공할 속셈.
오러 소드를 받아 내기 위해 메이스에 삼중으로 배리어를 중첩하고 부유 주문까지 사용했다.
스트렝스, 헤이스트, 레비테이션. 세 개의 보조 마법을 중첩해 유지하려니 마력 컨트롤이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정면으로 받을 셈이야?”
“무모하잖아!”
적어도 줄리앙과 세실에게는 의도를 들키지 않았지만 카르파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덱스의 발이 불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카르파의 거친 손이 메이스를 단단히 잡았고.
“앗!”
퍼억-!
덱스의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복부에 주먹이 꽂혔다.
희미해지는 시야 사이로 카르파의 얼굴이 보였다.
…….
“허억-!”
덱스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얼마 후였다.
복부가 아직도 얼얼했다.
“야, 괜찮냐?”
줄리앙의 목소리에 부스스 일어난 덱스.
분명 멀끔했던 줄리앙의 몰골이 말이 아니다. 꼭 땀에 절어 흙바닥을 몇 번 뒹군 모양새다.
유리아와 세실도 꽤나 초췌해진 얼굴.
“나 오래 기절해 있었어?”
“대충 십 분?”
“그사이 뭘 했길래 너희들 꼴이 이 모양이 됐냐?”
“…너 때문이야, 인마.”
덱스를 눕힌 카르파는 다른 이들도 직접 평가해 보겠다고 나섰다.
다들 카르파에게 역부족인 것은 마찬가지. 더욱이 덱스 때문에 눈이 높아진 카르파가 더 거칠게 몰아붙인 덕에 평가는 순식간에 끝났다.
“정신이 들었나? 생각보다 더 튼튼한 몸이군.”
“으, 기절시킨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지 않아요?”
“그냥 칭찬으로 듣게.”
“…그래서 어땠는데요?”
본래 대련의 목적.
카르파는 주위를 휘둘러보고는 입을 뗐다.
“굳이 확인할 것도 없다. 다들 애송이다.”
덱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분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마법사의 싸움을 했더라도 결과가 변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하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쓸 만해질 것 같군. 매일 반나절씩 내가 지도하겠다.”
풀 죽었던 유리아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그에게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덱스, 너는 전사가 되고 싶은 거냐?”
“그렇게 거창하진 않은데요. 그냥 뒤에서 마법만 뿌리는 건 성격에 안 맞아서….”
“이미 마법사의 길에 들어섰으니 마법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일. 하지만 기본적인 무기술을 익힌다 해서 나쁠 것 없겠지. 내가 지도해 주마.”
“정말요?”
덱스의 입이 헤 벌어졌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