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여신 아메리아 (3)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꺼내든 르프람.
“검은 수정 형태의 봉마석이라 하셨습니다.”
레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손가락 정도 길이의 검은 수정. 그러나 실금이 가득해 만지면 금방이라도 산산이 부서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저, 정말로 검은 수정입니다!”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하는 봉마석입니다. 거기에 성력을 불어 넣어 주시겠습니까?”
르프람이 시키는 대로 검은 수정에 성력을 불어 넣었다.
황금색 빛이 수정을 감싸더니 수정의 검은 표면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내부의 투명함이 드러났다. 검은 수정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표면만 검게 변색된 것이었다.
“오오오…!”
르프람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변색된 부분이 먼지처럼 흩어지자 짙은 성력을 머금은 황금빛 수정만 남았다. 수정에서 뿜어진 성스러운 황금빛이 이내 폭발하듯 번지더니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여신 아메리아의 기억이었다.
싸우고 쪼개지고, 다시 합쳐지고 멸망하기를 반복한 인간의 전쟁 역사 속에서, 여신은 줄곧 악마와 싸웠다.
전쟁 속에서 피어난 인간의 악의와 절망은 악마의 먹이가 됐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더욱 신을 찾아 의지했다.
모순적이지만 인간의 고통은 악마와 신 모두에게 양분이 되었다.
‘저 사람은…!’
검은 머리칼의 남자가 보였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왜소한 덩치에 어리숙한 얼굴이 영 미덥지 않아 보이는 자였다.
레오는 그가 메이너드 바이스만이라 직감했다.
허여멀건 얼굴.
검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까 싶은 허약한 팔.
싸움과는 한참이나 멀어 보이는 생김새였지만, 그는 여신의 축복을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유메른 강의 나가 퀸.
프로인 숲의 오우거 워리어.
토쿠르 황무지의 자이언트 바실리스크.
시오프 산맥의 외눈 거인.
남자는 대륙 곳곳에서 이름을 떨치던 몬스터를 사냥하며 명성을 떨쳤다. 모두 악마 게르베의 마기로 비정상적으로 성장한 마물이었다.
수족을 잃은 악마는 마침내 직접 모습을 드러냈고, 남자는 여신의 축복이 어린 성검으로 마침내 악마를 베는 데 성공했다.
끼에에에에엑-!
어느 어두운 숲에서 아홉 개의 뿔을 가진 검은 악마는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재가 되었다.
하지만 악마의 영혼을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일부가 여전히 마계에 남아 훗날을 기약하고 있었기에.
이에 여신은 인간계에 남은 악마의 영혼 조각을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돌려보낼 수가 없어요.]
[기대도 안 했어. 신이라는 놈들이 다 그렇지.]
여신의 말에 짜증스럽게 대꾸하는 남자.
악마를 없애면 원래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됐다니까. 그래서 넌 이제 어쩔 생각이야?]
[악마의 영혼 조각을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대륙의 끝에서 제가 직접 이것을 봉인하겠어요.]
[그러고 나서 돌아오는 건가?]
남자는 여신을 바라보았다.
심연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가 일순 일렁였다.
[오지 못하는군.]
[…미안해요. 하지만 그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어요.]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남은 여신의 성력으로는 이 악마의 영혼을 소멸시킬 수 없었다.
인간계의 악의(惡意)는 악마의 영혼이 자라는 양분이 되기에, 여신 스스로 악마의 영혼을 단단히 감싸 세상과 단절시키는 방법이 유일했다.
[제대로 이것을 봉할 수 있을지…. 저도 자신이 없어요. 가능한 모든 힘을 끌어 써야 해요. 세계 곳곳에 남긴 축복조차도요.]
[내게 주어진 축복도 포함되는 건가.]
[정말 미안해요.]
[됐어. 평범하게 살면 족해.]
[미안해요. 현, 당신에게는 계속 미안하다는 말뿐이네요.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요.]
대륙에서 악마가 사라졌다. 동시에 여신도 잠들었다.
그것이 잠든 여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따사로운 빛이 구석구석을 밝히자 낡은 예배당 내부가 환하게 빛났다.
그 성스러운 기운에 르프람은 감격의 눈물을 글썽였다.
[아아… 당신이로군요.]
예배당에 울리는 목소리.
레오와 르프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아직도 여신의 기억이 계속되는 것인가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이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신의 음성이었다.
르프람은 곧장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현의 아이, 당신이 나를 깨웠군요.]
현.
이현.
레오는 여신의 기억 속에 등장했던 메이너드 바이스만의 또다른 이름을 되새겼다.
그사이 예배당 중앙에 빛이 모여들더니 곧 레오의 몸으로 스몄다. 눈이 부시긴 했으나 별다른 저항감은 없었다.
“아메리아.”
슬쩍 감았던 눈을 뜨며 레오는 저도 모르게 여신의 이름을 불렀다.
한때 온 대륙이 경외했던 여신의 이름. 그것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건 불경하다 할 일이었으나 레오는 그저 덤덤했다.
[현의 아이, 반가워요.]
“내 이름은 레오다. 레오 바이스만.”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잇는 여신과 레오를 바라보며, 르프람은 몸을 움찔했다.
여신을 향한 레오의 태도가 왜 갑자기 바뀐 것인지 알 길이 없으나, 여신께서 화를 내지 않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바이스만. 당연하게도 그의 성을 이었군요. 현은 그 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요.]
“그래, 알고 있어.”
바이스만의 기록에도 쓰여 있었다.
현은 여신과 함께 대륙을 떠돌며 마물을 토벌했다.
당시 대륙은 인간의 전쟁과 곳곳에 횡행한 마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지금의 바이스만령은 당시 마물에 점령당해 버려진 곳이었고, 그곳을 수복하여 스스로 남작을 칭했다.
마물로부터 구원받은 바이스만의 사람들이 그를 현자(Weismann)라 칭하게 된 것 또한 바이스만이라는 성의 유래였다.
하긴 지금처럼 강대한 하나의 제국 치하였다면 여신이 선택한 용사에게 고작 남작 위로 그쳤을 리 없다.
[그는 행복했나요?]
“그다지 좋은 마지막은 아니었지.”
레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여신의 축복과 가호를 잃고 서서히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후 자신에게 겨누어질 창칼을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바이스만을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지켜야 할 것이 있어서일 테지….
결국 영웅 메이너드 바이스만은 인간에게 사로잡혀 죽었다.
[저는 그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본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도, 그를 지켜 주겠다는 약속도….]
여신의 슬픈 음성에 레오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영웅의 최후는 비극적이었으나 이미 과거의 일이다. 애도할 수 있으나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리고 지금 레오가 여신을 찾은 것은 과거를 애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를 구하기 위함이다.
“악마가 부활한 것 같다.”
[…역시 제가 깨어난 것은 그 이유였네요. 잠시 당신의 기억을 들여다봐도 될까요?]
“그래.”
레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배당의 빛 일부가 다시 한번 그의 몸에 스몄다.
[다행히 늦지 않았어요. 저를 찾아 깨운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에요.]
“그래, 그 영감 덕분이지.”
[악마는 아직 인간계에 현현할 만큼 회복하지 못했어요. 과거에는 전란(戰亂)이 놈의 양분이 되었지만 지금은 상대적으로 훨씬 평화로운 세계이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많지는 않아요.]
레오는 그 말에 동의했다.
흑마법사 놈들이 일을 벌이는 빈도가 점차 짧아지는 느낌이다. 그 규모도 심상치 않다.
[오랜만의 현현이라 슬슬 힘에 부치네요. 제가 쉴 곳이 있을까요?]
레오는 르프람을 바라봤고, 르프람은 그 말이 여신이 인간계에 존재를 드러낼 때 사용할 매개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둥지둥 사방으로 고개를 돌리던 르프람의 시선이 예배당 입구에 높이 매달린 방울에 닿았다.
“서, 성자의 방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아! 왠지 그리운 느낌이 든다 생각했어요. 그 아이의 방울이었군요. 충분하답니다.]
예배당을 가득 채운 빛이 방울을 향해 모여들었다.
[레오,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아니, 나는 내 의지로 악마를 없앤다. 그걸 네가 돕는 거야.”
[당신은 상냥하군요.]
“쓸데없는 소리.”
저절로 허공에 떠오른 방울이 레오를 향해 다가왔다.
가슴팍 앞으로 손을 벌리자 그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방울.
“부교주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신의 대리자시여. 여신께서 현현하시어 그대와 함께함을 천명하시었습니다. 그대의 말씀이 곧 그분의 뜻이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레오를 대하는 르프람의 태도가 한층 달라졌다.
눈앞에서 여신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여신의 힘을 빨리 회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세를 불려 주십시오.”
“잘 알겠습니다. 모든 사제들을 내보내겠습니다. 전 대륙에 여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전파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도울 사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신의 힘을 일부 나누어 함께 악마와 그 종에 대적하고자 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테레사 사제라면 어떻겠습니까? 뛰어난 아이이니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예배당을 나서자 십여 명의 사제들이 모여 있었다.
“신의 대리자시여!”
사제들은 레오를 향해 외쳤다.
그들은 예배당 안의 신성을 느끼고 안을 엿봤다. 예배당 안을 채운 거룩한 빛을 보았으며, 자애로운 여신의 음성까지 들었다. 부교주마저도 그를 신의 대리자라 칭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뜨거운 시선들에 레오가 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저만치서 뛰어들어 오는 어린 사제가 보였다.
“부교주님!”
“신성한 예배당이다. 웬 소란이냐?”
“주, 중부 대륙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합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레오가 미간을 움찔했다.
보르트 놈들을 격퇴한 것이 불과 몇 달 전 일이다. 반다이트는 더욱 방비가 강해졌을 것이고, 소드 마스터 부자가 그곳을 지키고 있다.
생각이 있다면 지금은 전쟁을 일으킬 시기가 아니란 것을 알 텐데…!
“자세히!”
레오가 끼어들었다.
“메르윈 백작과 베니에르 백작의 봉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불안감은 이것이었나.
제국 내부에서 전란을 일으키다니.
“부주교님,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군요.”
“예, 테레사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레오가 가방을 툭툭 치자 슈니가 폴짝 뛰어내렸다.
이내 거대화된 슈니에게 올라타고는 곧바로 남쪽으로 달렸다.
* * *
나흘 전 메르윈령.
돌로리아 메르윈 백작의 집무실에 가신들이 모였다.
무거운 분위기에서 백작은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뗐다.
“베눔… 이자가 기어코 일을 저질렀군.”
백작의 손에는 베눔 자작 등이 보낸 선전포고가 쥐여 있었다.
언젠가 베눔과 일전을 벌이게 될지 모른다 생각했다. 하지만 조용했던 길데온과 데카르토 마저 그에 포섭되어 함께 배신할 줄은 몰랐다.
“주군의 말씀대로 뱀 같은 자입니다. 저를 선봉에 세워 주십시오. 배신자의 목을 따 오겠습니다!”
메르윈령의 기사 토레스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다른 가신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토당토않은 명분입니다. 그럼에도 일을 냈다는 것은 뒷배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행정관이 조용히 분노를 토했다.
세 봉신이 주군을 성토하겠다는 명분으로 동시에 배신하다니. 제 주군이 어지간히 폭군이 아닌 이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메르윈 백작은 온화하고 합리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베니에르 백작의 봉신들도 제 주군에게 선전포고했다지? 뻔하지 않은가. 황제파의 팔다리를 자르겠다는 속내일세.”
“몸통은 재상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재상일 수도, 요크 후작일 수도.”
“결국 후작파라는 말씀이군요.”
“슬슬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게지.”
메르윈 백작은 잠시 침묵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가신들에 비해 백작은 지금 꽤나 냉정한 상태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수상한 기미를 포착해 베눔의 행적을 파악해 왔다. 다른 봉신들까지 모두 가세한 것은 예상외였지만 어쨌든 백작의 상비군은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이것 참, 모두 그 친구 덕분이라 해야 하나.’
레오 바이스만 남작.
그가 아니었다면 부인의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당연히 베눔의 본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반란에 대한 대비도 없었을 것이다.
“행정관, 그대는 지금 즉시 반다이트로 가 구원을 청하게.”
“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베눔, 길데온, 데카르토.
세 자작의 정규군을 합치면 대략 일천에 달한다. 거기에 용병까지 고용하면 숫자는 훨씬 불어날 터.
똑같이 용병을 고용한다 쳐도 메르윈의 정규군만으로는 버겁다. 무엇보다 시간이 없다.
하지만 반다이트의 구원이 있다면 해볼 만하다. 반다이트는 일전에 메르윈에게 빚을 졌으니 무조건 구원을 올 것이다.
‘계기를 만든 것도 그 친구로군.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았던 것인가.’
절반은 협박 같았던 그 출병 요구가, 지금은 무엇보다 든든한 보험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니 전혀 불안하지 않다.
“사흘 후 마레스 초원으로 출병한다! 초원을 물들이는 것은 역적의 피가 될 것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메르윈 백작은 반란군을 맞아 싸울 것을 천명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