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99화 (99/127)

99. 반란 (2)

“뭐?”

얼빠진 얼굴을 하는 줄리앙.

“너, 내 실력 모르냐? 도망치라 말할 게 아니라 도와 달라고 해야지. 안 그래?”

“알아, 네 실력.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줄리앙도 모를 리 없다.

세실도 훌륭한 마법사지만 유리아와 덱스는 그보다 한 수위다. 두 사람이 5서클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찌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 마법사가 있다면 이번 전쟁은 훨씬 단기간에 마무리 지을 수 있겠지만….

“왜 안 되는데?”

“나는 베니에르의 가주 대리이고, 덱스 너는 바이스만의 마법사야. 게다가 유리아는 제국의 황녀이기까지 하지. 그러니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야.”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쓰는데?”

“나도 상관없어!”

유리아도 언성을 높였다.

도와 달라는 말도 없이 입을 꾹 닫고 있는 세실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친구라면 도와 달라고 해야 할 것 아냐!

“하아…!”

줄리앙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은 영지의 일이고 자신은 고작 가주 대리에 불과하다. 책임질 수 없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하니 도저히 도와 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세실과 함께 밤새 고민한 결론이 그것이었다.

“간단하네. 내가 바이스만의 마법사가 아니면 되는 거잖아?”

“뭐?”

“그냥 우연찮게 식객살이 하던 마법사면 되지 않냐고. 뭐, 가면이라도 하나 쓸까? 넌 어떻게 할래?”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냐는 덱스.

줄리앙은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까지 숨을 필요 있나?”

유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씨익 미소 지었다.

“감히 제국의 황녀가 있는 곳에 싸움을 걸어온다고? 내가 여기에 있는 이상, 놈들은 베니에르의 배신자로 끝나지 않아. 제국의 역적이지.”

“오…! 그것도 그렇네!”

덱스가 손뼉을 쳤다.

줄리앙과 세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황녀를 전선에 세운다니, 그것은 두 사람이 감당할 범위를 넘어선다.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놈들이 제국의 역적이 될 각오가 되어 있는지.”

황녀는 전혀 그 결정을 무를 생각이 없다.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지? 줄리앙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그날 오후, 베니에르 백작이 보낸 전서구가 도달했다.

[네 판단을 믿는다.]

내용은 짤막했다.

* * *

사흘 후, 로웬 평야에 양 군세가 마주했다.

서로를 향해 대치한 진영.

수백의 용병을 전위에 둔 반란군의 숫자는 얼핏 보아도 베니에르군을 압도했다.

“항복할 줄 알았는데 싸움을 받아들이다니, 역시 애송이로군.”

“이번 기회에 제대로 부수는 것도 좋지 않겠소?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지. 하하핫!”

이베닐과 할튼은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이날을 위해 준비된 정예병의 예기는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이름난 용병대를 고용해 압도적인 병력을 완성했다.

상대는 기사는 물론이고 제대로 된 지휘관도 없을 터. 단 한 번 충돌에 떨어져 나갈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면 다녀오겠소.”

말에 올라 있던 이베닐 자작이 호위 기사 한 명을 대동하고 앞으로 나섰다.

베니에르 측에서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영웅이 되고 싶은 어린놈과… 그 옆은 누구지?’

기사나 병사라고 하기에는 체구가 작다. 투구의 재질과 모양으로 봐서는 마법사로 추측되었다.

이베닐은 흥, 코웃음을 쳤다.

마법에 재능 있다는 여동생인 모양. 그래도 고작 3서클 마법사 한 명으로는 이 병력 차이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서로의 거리가 스무 걸음 정도에 이르자 이베닐 자작이 먼저 외쳤다.

“들으라! 베니에르 백작은 제 영달을 위해 영지민을 억압하고 핍박하며 재물을 탐했으니 그 죄가 하늘에 닿을 지경이다! 이에 나 리포인 이베닐은 할튼 자작과 함께 군을 일으켜 의를 행하고 영지민을 구원하고자 하니! 베니에르는 얌전히 철퇴를 맞으라!”

이베닐은 2서클 마법사였다. 마나를 담은 목소리가 평야를 쩌렁쩌렁 울렸다.

“하!”

줄리앙은 기가 찼다.

전쟁에 명분이 중요하다지만 그가 지껄이는 소리는 허무맹랑했다.

제 주군을 배신한 시점에서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열이 뻗쳤다.

“이베닐, 할튼, 배신자의 혓바닥이 참으로 길다! 어떤 미사여구로 꾸미더라도 네놈들은 주군을 배신한 반역자이며, 제국에 칼을 들이댄 역적일 뿐이다! 지금 이곳에서 역0적 놈들을 멸하리라!”

제국의 역적.

그 말에 이베닐 자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감히 베니에르가 역적을 논한단 말이냐! 제국을 좀먹는 네놈들이야말로 간신이며 반역자가 아니더냐!”

“지금 누가 누구에게 반역자라 하는 거지?”

이베닐의 역성에 줄리앙의 곁을 조용히 지키던 이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맑고 고운 여성의 음성. 그 또한 마나가 담겨 평원의 모든 병사에게 똑똑히 퍼졌다.

이베닐은 그녀가 베니에르가의 차녀 세실이라고 확신했다.

“제국에 해악이 되는 베니에르 네놈들이 반역자다! 나 이베닐은 제국의 안녕을 위해 이 자리에서 반역자 베니에르를 처단할 것을 천명하겠다!”

“틀렸어. 반역자는 네놈들이지.”

차분한 분노가 서린 음성.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투구 속에 가려져 있던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어깨에 떨어진다. 이윽고 나타난 은회색 눈동자가 이베닐을 똑바로 응시한다.

동시에 베니에르 군에 새로운 깃발이 나타났다.

백색 바탕에 그려진 황금빛 용.

오직 황족에게만 허락된 문양.

“나는 유리아 드메이르 폰 아슐렌.”

“…아?”

“감히 제국의 황녀에게 검을 들이대는 자들이 반역을 논하는가?”

황녀가 왜 여기에 있지?

이베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이럴 리 없는데…?”

가짜가 아닐까? 은색 머리칼이 흔하지는 않지만 진짜 황녀라는 법은 없다.

대역을 구했나? 염색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그런데 진짜 황녀라면 어쩌지?

황녀를 직접 알현한 적 없는 이베닐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유리아는 굳어 버린 이베닐에게 코웃음을 치고는 소리 높여 외쳤다.

“용병들은 들으라! 너희를 고용한 이베닐과 할튼은 제국의 반역자이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전장을 이탈하면 너희의 죄를 묻지 않겠다!”

반란군의 용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쪽에 황녀님이 있다고? 이런, 씨발! 말이 다르잖아! 이러다가 우리가 역적이 될 판이라고!”

“가짜 아냐? 진짜 황녀님 맞아?”

“에라이, 병신아! 가짜 황녀를 내세웠다면 저쪽도 목이 날아가겠지! 저기 황가의 깃발 안 보여?”

단순한 영지전이라 생각하고 고용된 용병대들이다.

그런데 상대편에 황족이 있다고? 완전히 다른 문제다. 돈 몇 푼 벌어 보려다 제국의 공적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린 빠지겠어!”

가장 앞줄에 있던 용병대 하나가 전장을 이탈했다.

겨우 십수 명 수준의 소규모 용병대 하나가 빠져나간 것뿐이었지만 효과는 컸다.

“나도 빠진다!”

“우리도!”

우르르 용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에 움직이는 용병이라지만 목숨이 더 소중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멈춰! 멈춰라, 이놈들! 어딜 마음대로 이탈하느냐!”

본대에 남아 있던 할튼 자작이 당황하여 고래고래 목청을 높였지만 소용없다.

“가짜다! 이 황녀는 가짜야!”

이베닐 자작의 뒤늦은 외침도 허공에 흩어졌다.

용병들은 순식간에 한쪽으로 빠져 새로운 무리를 형성했다. 평야 한구석에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중립 그룹이 생겨났다.

“이이익…!”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이베닐 자작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줄리앙와 유리아를 노려봤다.

이런 변수가 생기다니. 하지만 이제 뒤로 돌아갈 곳은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이 전투에서 이겨야 한다.

망명하든, 도망치든… 뒷수습은 그다음. 그러기 위해서는 저 황녀부터 죽여야 한다…!

“파이어 애로우!”

기습적으로 발사된 화염 화살이 유리아의 얼굴을 향했다.

2서클의 가장 기본적인 공격 마법이지만 서로의 거리는 겨우 스무 걸음 내외.

이베닐은 이 거리라면 무조건 타격을 줄 자신이 있었다.

파앙-!

“으읏…!”

작음 폭발음이 울렸지만 이베닐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기습은 실패했다. 화염 화살이 줄리앙이 펼친 실드에 막혀 산산이 흩어진 것.

“역시 반역자에게 명예로운 싸움은 어울리지 않겠지.”

화르륵-!

화염 화살과 비교도 안 되는 열기.

유리아의 어깨 위에 나타난 붉은 화염의 창이 이베닐을 향했다.

“으히익! 실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거리.

이베닐은 서둘러 실드를 두르며 말 머리를 돌렸지만, 쏘아진 화염의 창은 실드를 부수고 그의 몸을 불태웠다.

“플레임 스피어! 4서클 마법이야!”

“그러면 황녀님이 맞다는 거였네!”

유리아의 마법을 알아본 일부 용병들의 외침.

그에 반란군 병사들 사이에도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우, 우리가 역적이라고? 아니야! 몰랐다고!”

“개죽음당할 수는 없어!”

“황녀님! 저희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이베닐의 병사들은 하나둘 무기를 던졌다.

제 주인은 이미 죽었다.

더 이상 싸울 이유도 없거니와 제국의 반역자가 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푹-!

“으억!”

무기를 버린 이베닐의 병사 하나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푹- 푹-!

비명은 곳곳에서 이어졌다.

할튼의 병사들이 이베닐의 병사들를 찔러 죽이기 시작한 것.

“뭐, 뭐야! 같은 편이잖아!”

“젠장! 이 새끼들, 왜 이러는 거야!”

등을 보이고 있던 이베닐 군은 힐튼 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기습적인 공격에 절반이 넘는 수가 저항도 못 하고 쓰러졌으며, 나머지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평야에 이베닐 병사들의 피가 붉게 흘렀다. 베니에르 군조차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멍청한 놈 같으니.”

할튼 자작이 얼굴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황녀가 등장한 것은 변수지만, 이베닐이 이렇게 멍청하게 당할 줄은 몰랐다.

싸울 의지가 없는 병사들을 모두 처리했으니 이제 그들을 써먹을 차례. 할튼은 품속의 검은 구슬을 깨트리며 나직하게 영창했다.

“일어나라.”

검은 구슬에서 뿜어진 기운이 병사들의 시체에 들러붙었다. 곧 죽어 나자빠진 시체가 덜그럭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광경에도 할튼의 병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붉게 충혈된 눈과 굳은 표정. 할튼의 병사들은 이미 이지(理智)를 잃고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꼭두각시 같았다.

“사령술?”

“힐튼, 저자가 흑마법사였다니…!”

줄리앙와 유리아도 흠칫 몸을 떨었다.

죽은 자를 일으키는 사령술이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으스스한 광경이었다.

“괴, 괴물…!”

“저런 것들과 어떻게 싸워야 해?”

베니에르의 병사들도 마찬가지.

죽었던 시체가 다시 일어나는 광경에 병사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퍼졌다.

“다들 침착해라!”

뒤늦게 줄리앙이 나섰지만 한번 일어난 동요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피범벅으로 무기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시체들. 그 기괴한 움직임에 베니에르 병사들의 혼란은 빠르게 전염됐다.

“으음….”

“잠깐만요.”

지켜보던 카르파가 나서려던 차에 그 앞을 막는 이가 있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또 한 명의 마법사, 덱스였다.

“시체하고 싸우는 건 몇 번 해 봤거든요.”

“…그런가? 한번 지켜보지.”

조용히 걸어 나와 줄리앙의 곁에 서는 덱스.

맞은편 시체들은 생전의 병사들처럼 오와 열을 맞추고 있었다.

“어쩌려고?”

“선수필승. 나 믿지? 지휘관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다.”

“…부탁할게.”

줄리앙이 입술을 깨물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이다. 겁을 집어먹는 병사들에게 제 실력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전투를 위해서는 분위기를 반전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가라, 망자들아! 저들의 생살을 뜯고 피를 마시거라! 카하하핫!”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할튼 자작이 지팡이를 높게 치켜들었고.

이베닐의 병사였던 시체들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온다…!”

줄리앙은 마른침을 삼켰다.

첫 출진의 상대가 되살아난 시체들이라니.

이것이 악몽이라면 꽤나 지독한 축이리라.

“후우….”

몇 걸음 더 나아간 덱스가 짧은 심호흡을 했다.

실전에서 처음 사용하는 5서클 마법.

긴장감은 없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고양감은 기대감에 가까웠으니.

수없이 고치고 수정하여 완성한 파이어 월의 술식은 자다가도 일어나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뇌리에 선명하다.

그리고 덱스는 이 자리에서 파이어 월의 술식을 재배치한 새로운 마법을 시도하려 하고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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