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충돌 (1)
헤르만 자작과 자작 부인의 사망.
더욱이 이단 심문관이 악마로 변한 자작 부인을 직접 참살하였다는 소문은 현장을 목격한 시종들로부터 금세 헤르만령에 퍼져 나갔다.
“이단 심문관께서 악마로 변한 자작 부인의 머리를 직접 깼다고 하더구먼.”
“그러면 영주님은 악마를 부인으로 데리고 살았다는 말인 게야?”
“부인이 악마인 줄도 몰랐다니, 어찌 이리 끔찍한 일이!”
그 때문에 헤르만령에 들어선 레오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여 곧장 영주성으로 향할 수 있었다.
“레오!”
영주성에서는 테레사와 패트릭이 사후 처리에 한창이었다.
테레사는 브뤼쉬 때와 마찬가지로 신전과 황궁에 보낼 보고서를 만드느라 바빴고, 패트릭은 그런 테레사를 호위하며 혹시 모를 남은 위험에 대비했다.
다행히 헤르만의 가신들은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군을 해한 악마를 없앤 두 사람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헤르만 자작도 정리가 된 모양이지? 내용은 오다가 대충 들었어.”
패트릭이 레오에게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는 사이.
테레사는 심상치 않은 눈으로 레오를 바라봤다.
“…당신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레오에게서 성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급 사제이자 부교주인 르프람을 가볍게 뛰어넘을 정도의 강력한 성력이.
“이거 알지? 아마 본 적 있을 거야.”
피식 웃은 레오는 품속에서 방울을 꺼내 테레사 앞에 보였다.
“예배당에 걸려 있던 성자의 방울이군요. 부교주님께서 내주신 건가요? 하지만 그것은….”
성자의 방울.
성자의 유품이기에 신전의 상징적인 물건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그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능적인 면만 보자면 테레사가 들고 다니는 성법구가 훨씬 뛰어나다.
그런 성자의 방울을 예배당의 문에 걸어 놓은 것도 과거 여신의 말씀에 따른 것이라고만 알고 있다.
“…성자의 방울에 어째서 이 정도의 성력이 담긴 거죠?”
그렇기에 테레사는 경악했다.
레오의 말대로 성력의 출처는 성자의 방울이 맞았다.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거대한 성력을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임무를 위해 신전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그저 낡은 방울에 불과했던 것이다. 도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여기에는 여신의 일부가 담겨 있다.”
더욱 커다랗게 눈을 뜨는 테레사.
스스로 봉마석이 되어 있던 여신을 강제로 깨웠다. 그 덕분에 여신이 짧게나마 현신할 수 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가 한계. 그나마 이 방물을 매개로 하면 조금 더 인간계에 간섭이 수월해진다 했다.
간단히 설명했지만 테레사는 쉬이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역시 이게 필요한가.”
레오는 품속에서 르프람의 편지를 꺼내 들었다.
그 자리에서 편지를 펼친 테레사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바이스만 남작을 통해 네 소식을 들었다. 잘해 주고 있구나.]
따뜻하게 안부를 전하는 부주교의 인사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 지은 테레사.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심각해졌다.
[안부를 더 묻고 싶지만 사안이 급박하다.
여신께서 현현하셨다. 어리석은 이들이 사라진 여신을 원망하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제 몸을 던져 악마로부터 이 세계를 보호하고 계셨으니 모두가 응당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분께서는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며 바이스만 남작과 함께 할 것을 밝히셨다.
바이스만 남작은 여신과 뜻을 함께하며 악마와 대적할 대리자이니, 그의 뜻을 곧 그분의 뜻이라 여겨도 되리라. 그러니 테레사 사제, 그대에게 신전을 대표하여 바이스만 남작을 도울 것을 명한다.
항상 조심하고 건강하거라.]
여신의 현현이라니!
고대했던 일이고 축복해야 할 사건이다.
그런데 바이스만 남작이 여신의 대리자이고 그의 뜻이 곧 여신의 뜻이라니, 그것만큼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테레사의 미간을 굳힌 채 편지를 몇 번이고 읽었다.
혼란스러운 내용뿐이었지만 편지의 진위는 의심할 수 없다. 르프람의 필체임이 분명했으며 무엇보다도 편지에 미약한 성력이 담겨 있었으니까. 이는 가짜 편지를 가리기 위한 신전 사제들만의 비밀이었다.
‘그가 여신의 대리자….’
방울에서 뿜어지는 성력과 르프람의 편지.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테레사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안에는 레오를 신의 대리자로 인정하고 따르겠다는 결심도 포함됐다.
그사이 레오는 패트릭과 중부의 반란에 대한 건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중부는 괜찮을까?”
“메르윈 백작이 허투루 당할 인물은 아니지. 그리고 베니에르에는 슈멜린 백작이 있어.”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일어난 중부의 반란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켈시온의 마지막 패일 것이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반란 자체는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메르윈은 분명히 반다이트에 지원을 요청할 것이다. 일전에 메르윈에 빚진 반다이트라면 기꺼이 응하겠지.
또한 고립되어 인접에 도와줄 세력이 없는 베니에르는 경험 많은 슈멜린 백작이 어떻게든 해낼 것이라 믿는다.
‘켈시온은 어떨까?’
이번 계획을 위해 켈시온도 꽤 무리했음이 틀림없다.
브뤼쉬와 헤르만을 잃으면서 이미 손발이 잘렸고, 반란까지 실패하게 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궁지에 몰릴 터.
“우리는 직접 켈시온을 친다.”
결단을 내렸다.
공세로 전환하기 딱 좋은 시점이다.
* * *
하늘 높이 떠올랐던 달이 어느새 많이 기울었다.
어두운 집무실에서 켈시온 백작은 초조한 얼굴로 새벽 내내 통신 마도구를 바라봤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까마귀들에게 전혀 연락이 없다. 집합소를 폐쇄하고 소거 플랜을 이행하라 했으나 그것이 연락이 끊어질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소거 플랜.
헤르만령을 대상으로 이 계획을 시행할 것을 명했으니 도시 내부에서만 최소 수백의 영혼을 회수할 수 있었으리라.
이를 실패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멍청한 놈들, 그것 하나 제대로 이행 못 한 것인가.”
켈시온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망자들이 일어나 도시를 습격해야 할 시간이다. 환각초에 취한 영지민들도 서로를 죽이며 피해를 확산시켜야 한다.
…성공했다면 진작 연락이 왔어야 한다.
“이번에도 그 두 연놈들이겠지….”
뿌드득-!
실패를 확신한 켈시온은 이를 갈았다.
헤르만의 소거 플랜은 레오 바이스만 남작과 이단 심문관 테레사의 발을 묶는 것이 목적이었다며 애써 자위했다. 영혼 수확에 실패해도 둘의 발만 묶는다면 성공이나 마찬가지라고.
놈들이 헤르만에서 사태를 수습하는 사이, 중부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메르윈과 베니에르가 승리하든, 반란을 일으킨 봉신들이 승리하든 전쟁의 결과는 상관없다. 노리는 것은 전쟁 중 얻게 되는 영혼이었으니까.
켈시온의 눈길이 집무실 구석의 작은 거울로 향했다.
요크 후작과의 통신 마도구다. 지난 통신 이후 후작에게 추가적인 연락은 없었다.
“요크 후작….”
후작의 싸늘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 눈빛을 보며 언제든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것은 수년간 충성을 바친 켈시온의 마음에 다른 불씨를 댕겼다.
며칠 후.
밤늦은 시간 켈시온의 영주성에 몇 명의 흑마법사가 들어섰다. 싸움이 끝난 전쟁터에서 영혼석을 회수해 온 까마귀들이었다.
“잘했다, 다음 임무를 줄 때까지 당분간 성에 머물며 쉬도록 해라.”
까마귀들을 내보낸 켈시온은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갔다.
벽장 뒤로 손잡이를 당기자 벽장이 통째로 회전하며 그의 몸을 숨겨진 공간으로 이끌었다.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 켈시온은 영혼석을 작은 제단에 올리고는 차가운 돌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몸을 숙였다.
“위대하신 분께 영혼을 바치겠나이다.”
영혼석 하나에 최대한 담을 수 있는 영혼의 숫자는 일백.
중부의 전쟁으로 가득 채운 영혼석 다섯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요크 후작의 요구를 늦지 않게 아슬아슬 맞출 수 있게 됐다.
우우웅-!
영혼석이 번쩍 희게 빛나더니 그 빛이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고 같은 방식으로 영혼을 바쳐 보았기에, 켈시온은 그 빛이 완전히 잦아들면 영혼석이 텅 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비어 버린 영혼석을 회수한 뒤에 요크 후작에게 보고를 올릴 생각이었다.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구나.]
악마의 음성.
켈시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년간 같은 방식으로 영혼을 바쳐 왔지만 그분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은 처음이다. 저도 모르게 돌바닥에 엎드리며 외쳤다.
“위, 위대하신 분!”
[그렇다, 나의 종복아.]
“오오오…! 직접 음성을 들려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켈시온은 감탄사를 터트리며 몸을 떨었다.
위대하신 분과 직접 대화하다니!
[이번 공물은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만족스러우셨다니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하여 네게 상을 내리고 싶다. 어떠냐. 나의 권능을 받을 생각이 있느냐?]
권능!
켈시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요크 후작은 자신이 유일하게 그분의 권능을 하사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직접 권능을 받게 된다면 더 이상 요크 후작에게 휘둘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찮은 종복인 제가 어찌 감히 위대하신 구원자의 뜻을 거스르겠나이까.”
[네 충심이 갸륵하도다.]
악마의 권능을 받는 것은 자신의 영혼 일부를 악마에게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상 서로의 것을 교환하는 계약이며, 인간은 내어준 영혼의 양만큼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켈시온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금은 요크 후작과 동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사아아-!
영혼석의 흰빛이 빠르게 사그라들고 대신 붉은 빛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켈시온은 망설임 없이 붉게 빛나는 영혼석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아아아…!”
켈시온은 탄성을 질렀다.
손바닥을 통해 흘러 들어온 악마의 힘이 그의 신경과 세포를 자극했다.
머리가 멍하고 기분 좋은 부유감. 그 속에서 느껴지는 자극은 지금까지 경험한 어떤 쾌락보다도 강했다.
“흐어어어….”
눈을 까뒤집은 켈시온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서 폭죽이라도 터지는 듯한 쾌락의 항연이 이어졌다.
[좋을 만큼 가져가도 좋다.]
악마의 음성이 달콤하다.
좋을 만큼이라니, 어찌 이 쾌락을 도중에 멈출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켈시온은 영혼의 절반을 내주고서야 영혼석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이런 형식의 계약으로 낼 수 있는 영혼의 최대치였다.
[켈시온, 너의 영혼과 이름을 기억했다. 앞으로 나를 더욱 만족시키기를 기대하마.]
“반드시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켈시온은 심장에 요동치는 힘을 느끼며 입꼬리를 주욱 늘렸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순수한 마기였다. 여태껏 흑마법으로 쌓아 온 것들이 애들 장난같이 느껴질 정도로….
이윽고 그가 비밀 공간에서 나왔을 때, 집무실 창밖에서 동이 터 왔다.
붉은 햇살이 만든 그의 그림자 머리 부분에는 전에 없던 뿔 세 개가 돋아나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