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충돌 (2)
황궁 어전.
높은 옥좌에 앉은 황제 아래에 대신들이 모여 있었다.
“제국을 좀먹는 해악.”
황제가 대신들을 내려다보며 읊조린다.
어전 회의를 하겠다며 대신들을 소집하고는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 갑자기 꺼낸 말이다.
“반역자.”
황제의 말이 이어진다. 언뜻 권태로움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 단어에 담긴 무게감은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 대신들은 모두 귀를 세우고 황제에게 집중했다.
“그대들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겠는가?”
황제가 묻는다.
옥좌에 기대어 앉은 황제의 눈이 좌중을 훑자, 대신들은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몸을 잔뜩 움츠렸다.
한때 철혈의 황제라 불렸던 인물이다. 그의 이명에 포함된 피는 당시 그에게 맞섰던 수많은 제후의 것이었다. 황제의 몸은 노쇠하였으나 젊은 날 전장을 호령하던 기세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폐하, 천년 제국에 불손한 마음을 품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색출하여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재상 아비엘 요크가 고개를 숙이며 불편한 침묵을 끊었다.
황제는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길게 올리더니 답했다.
“베니에르라 했다더군.”
베니에르의 봉신들이 제 주인을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을 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
그들은 결국 베니에르군에 진압당했고 반란은 실패했다. 그들의 영지는 베니에르에 귀속되었으며, 비로소 베니에르 백작도 제 영지의 전령을 접하며 마음을 놓았다.
대신들은 비로소 황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바일 베니에르 백작, 그대는 제국을 좀먹는 해악이며 반역자인가?”
끝나지 않은 황제의 질문에 대신들은 다시 한번 긴장했다.
베니에르 백작에게 줄을 댄 이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반대로 후작파의 이들은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질문을 받은 베니에르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제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잠시 숙고하던 베니에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짐이 그대를 반역자라 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말인가?”
“저는 언제나 제국과 폐하의 안녕을 바라며 지금까지 그것을 위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제국에 해악을 끼치고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베니에르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침통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그렇다면 반역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어전이 술렁였다. 대신들의 눈동자도 바쁘게 움직였다.
베니에르 백작은 황제를 응시하며 다시 한번 덤덤히 말을 이었다.
“무능한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제국의 발전을 막고 미래를 가로막았다면, 그 또한 반역이라 불려야 할 것입니다.”
재상 요크의 눈썹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참으로 달변이 아닐 수 없다. 베니에르 백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수완가이며, 지금 제국에서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과연 누가 그에게 분에 넘치는 자리를 차지했다고 비난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표적인 황제파의 인물이니 황제가 일부러 그를 쳐낼 이유도 없다.
요크는 이제야 황제의 의도를 눈치챘다.
이는 처음부터 베니에르 백작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황제가 만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제 그릇 이상을 욕심내는 것 또한 반역이라…. 틀린 말도 아니군.”
황제가 피식 웃었다.
그 반응에 요크는 확신했다. 황제와 베니에르의 문답이 사전에 계획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 꽤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다.
“실상 반역자라 불릴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이베닐과 할튼이다.”
지금껏 옥좌 옆에 삐딱하게 기대어 있던 황제의 몸이 바로 섰다.
건조한 목소리에 한층 위엄과 무게가 담겼으며, 어전을 내려보는 두 눈에는 분노마저 서렸다.
“놈들은 감히 황가의 일원에게 창검을 겨누었다, 내 피를 이어받은 제국의 황녀에게!”
황제의 말에 대신들의 눈알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베닐와 할튼에 맞선 베니에르의 군대에 황녀가 포함되었다는 소문은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확실한 정보를 가지지 못했다.
요크는 후작파 대신들을 향해 눈썹을 찡그렸다.
“하오나 폐하, 그것은 아직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소문입니다.”
재상의 신호를 알아챈 한 대신들이 조심스레 의견을 냈다.
언뜻 신중을 기하는 듯한 발언이나 결국 황제의 말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러하옵니다. 황녀께서 베니에르가의 여식과 친분이 두텁다 하여 떠도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소문에 휘둘리기보다 사실 파악을 먼저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작파 대신들이 같은 뜻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황제는 입을 다문 채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눈은 마치 지금 입을 연 자들의 모습을 담는 듯했다.
끼익-!
닫혀 있던 어전 회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들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소문이라고요? 글쎄요. 당사자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확실하지 않을까요?”
어전을 울리는 낭랑한 목소리.
들어선 이는 드레스를 입은 은발의 소녀와 건장한 남성이었다.
‘3황녀가 아닌가?’
‘어째서 황녀가 이곳에…? 아카데미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후작파 대신들이 당황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당황하기는 재상 요크도 마찬가지.
게다가 지금 황녀의 곁에 호위 기사처럼 붙어 함께 등장한 인물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함께 온 자는 슈멜린 백작 아닌가?’
카르파 슈멜린.
그의 등장에 재상 요크를 비롯한 후작파 인물들은 말을 잃었다. 아카데미의 사건 이후 낙향해 모습을 감춘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난다는 말인가.
“천년 제국 아슐렌에 영광이 있으라. 유리아 드메이르 폰 아슐렌이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그사이 황제의 앞에선 유리아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예를 표했다.
마치 황비의 젊은 시절을 빼다 박은 듯한 모습에 대신들의 눈이 홀린 듯 고정됐다.
요 몇 년간 유리아는 자신의 궁에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했다. 공식적인 행사에도 거의 몸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장성한 황녀가 어전에 얼굴을 비춘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리아.”
“예, 폐하. 하문하시옵소서.”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오는 길인지 설명하라.”
유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전에 가득한 대신들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들의 표정과 감정을 하나하나 읽으며 기억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베니에르 가문과 황녀의 우호 관계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유리아가 황태자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공식화 한 것과 같으니 기존 황제파 귀족들도 그 추세를 따를 것이다. 반대로 후작파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된다.
‘더는 피하지 않겠어.’
과거에는 그것을 피하기만 했다. 적을 만드는 것이 두려워 언제나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도망치려고만 했다.
이제는 아니다. 제국에서도 열 손가락에 꼽히는 5서클의 배틀 메이지라면 더 이상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황권과 관계없이 자신을 도울 우호 세력도 있다. 그러니 더는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다.
“황가의 깃발을 향해 창검을 들이댄 반역자, 이베닐과 할튼을 처리하고 오는 길입니다.”
유리아의 목소리는 느릿하지만 청명히 울렸다.
동시에 재상 요크를 비롯한 후작파 인물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이제 황제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에.
“감히 황가의 깃발에…!”
“그것이야말로 명백한 반역입니다!”
황제파 대신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쯤 유리아가 말을 이었다.
“또한 할튼은 죽은 자의 시체 수백을 일으키는 사령술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제국이 엄격히 금하고 있는 흑마법이니, 이번 기회에 제국에 섞인 악마 숭배자를 색출하여 처단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는 옥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가의 일원에게 무기를 들이댄 세력이 악마 숭배까지 일삼았다니, 무엇 하나 가벼이 넘어갈 수 없는 죄목이다.
“슈멜린 백작, 그대를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한다! 역도의 세력을 샅샅이 색출하고 모두 멸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폐하!”
어전이 술렁였다.
특히 재상을 포함한 후작파 대신들은 창백히 질렸다.
제국군의 총사령관.
수도 메프람을 포함하여 제국령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제국군의 군권을 가지는 지위.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 있어 오랜 기간 공석이었던 자리가 부활했다. 그리고 카르파 슈멜린 백작은 그 자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 * *
무무카가 이끄는 바이스만의 병력이 헤르만령에 입성했다.
베니에르와 함께 전투를 치른 덱스도 중간에 합류했다.
“슈멜린 백작이 총사령관이 되어 켈시온령으로 향하고 있다고?”
카르파는 곧바로 켈시온을 배후로 지목했다.
다소간의 반발도 있었지만 이미 군권을 틀어쥔 그는 재상 요크도 막을 수 없었다.
제국군에 더해 베니에르군도 합류한다는 소문도 있다. 그들에게도 명분은 충분했으니까.
“역시 노련한 양반이야.”
레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었다.
[몸을 숨기고 있다가 때가 되면 움직여 함께 행동할 것.]
지난 아카데미 교류전의 사건 후, 슈멜린 백작에게 제안했던 내용이다.
그는 훌륭하게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를 알고 있었다.
“준비는 다 됐겠지?”
레오는 친구이자 바이스만의 기사인 둘을 향해 물었다.
켈시온을 향한 싸움에 더 이상 명분은 필요 없다. 그가 악마의 하수인인 것은 이미 드러났다. 이것은 단순한 영지전이 아니라 악마 숭배자를 처벌하는 전쟁이다.
“물론입니다. 병사들도 푹 쉬었으니 당장이라도 출발할 수 있습니다.”
“으음, 올빼미들도 한층 날카롭소.”
패트릭과 무무카의 든든한 대답.
공적인 회의이니 군신의 관계를 보이겠다는 둘이었다.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좌중을 바라봤다.
“켈시온 백작의 전력은 최소 일천 이상. 브뤼쉬나 헤르만에서 일을 생각하면 마물과의 싸움도 의식할 필요가 있겠지.”
일천 이상의 병력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다. 그 정도 전력과 전면전을 벌일 수 있는 것은 반다이트나 메르윈 수준의 백작급 대귀족이 아니면 꿈도 못 꿀 일.
게다가 마물화되며 강력한 힘을 발휘한 듀발, 헤르만 자작 부인을 생각하면 또 어떤 상대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바이스만 남작의 병력은 고작 사백.
그럼에도 불안감은 없다. 소드 마스터와 5서클의 배틀 메이지, 거기에 상급 기사 수준의 소트 엑스퍼트가 둘이나 있는 남작령은 제국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이는 제국군의 출진 소식이 없었을 때 이미 결정된 진군이었다.
“여신께서 함께하시는 성전이니 승리는 당연합니다.”
테레사가 단호한 목소리로 거든다. 그녀도 평소 사제복이 아니라 곳곳에 철판을 덧댄 갑옷을 입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레오가 선언했다.
“오늘 새벽, 동이 트는 대로 출진한다.”
켈시온과 싸움의 눈앞이다.
회귀 전 놈에게 배신당해 마물의 먹잇감이 됐다.
드디어 갚아 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조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