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충돌 (3)
켈시온 백작의 집무실.
제국군이 영지에 근접하고 있다는 소식이 켈시온의 귀에 들어갔다.
“바이스만과 제국군이라고?”
두 군대가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에 켈시온은 차갑게 답했다.
바이스만의 군대가 헤르만령에 주둔했을 때부터 그들과의 전쟁을 예상했지만 제국군까지 움직일 줄은 몰랐다.
“흠, 둘 다 부수면 그만이다.”
과거의 켈시온이었자면 이렇게 단호히 결정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국군과의 일전은 명백히 제국의 적으로 돌아서겠다는 뜻. 당연히 교섭으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도 이리 나올 수 있는 것은 압도적인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분의 권능을 얻었다. 이를 기회로 제국을 무너트리고 중부 대륙의 패자가 되겠다.’
제국군이 움직인 것은 오히려 기회다.
어쩌면 방어군으로서 그들을 멸하고 남하하면 수도를 위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창 내부 정리에 바쁜 메르윈과 베니에르는 제국의 큰 힘이 되지 못할 것이며, 중부에서 가장 병력이 많은 반다이트도 국경 방어에 소홀히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게 중부 대륙의 패자가 되면 남부 대륙의 요크 후작에게 꿀릴 것이 없다. 오히려 넘어설 수 있을지 모른다. 전쟁 중에 또다시 많은 영혼을 바칠 수 있을 테니.
“크크큭…! 그렇지, 이건 기회야.”
킥킥거리며 웃는 켈시온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준비는 모두 끝났겠지? 용병은 얼마나 모았나?”
“예, 주군. 용병 사백을 고용했습니다. 그들을 전위에 세울 예정입니다.”
“나쁘지 않군.”
켈시온이 건조하게 답했다.
단기간에 끌어모은 숫자치고는 만족스럽다. 질보다 머릿수에 집중하라 했기에 어중이떠중이까지 전부 끌어모은 것이지만 상관없다.
“팔란, 선봉을 맡기겠다. 승리를 가져와라.”
“맡겨만 주십시오, 주군께 승리를!”
유일한 기사 팔란이 켈시온군의 선봉을 맡았다.
소드 엑스퍼트 중급에 겨우 들어선 기사. 실력으로는 백작령의 군을 이끌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우직한 성격 때문에 중용받는 이였다.
팔란은 기병과 보병이 혼합된 영지의 병사 이백에 용병 사백을 더한 총 육백의 병사를 이끌 것이다.
그것만 해도 대규모 병력인데 중군에는 백작이 직접 이끄는 일천이 더 남아 있다. 총 일천육백의 병력이었다.
“백작님, 말씀하신 약도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기사 팔란이 방을 빠져나가자 남아 있던 흑마법사 스캇이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경구로 섭취하면 빠르게 기분이 고양되면서 폭력성이 배가되고 판단력이 흐려지는 약이다.
전장의 병사에게 두려움을 줄이고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지만, 과량으로 섭취하면 뇌가 망가져 약효가 떨어진 후에도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다.
“싸움 직전, 선봉 전원에게 먹여라.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정도로.”
“명을 따르겠습니다.”
켈시온 백작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집으로 가득해 비대했던 몸은 거구의 근육질로 바뀌어 있었다. 단기간의 변화에 그를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들은 악마와 계약이라도 한 것 아니냐며 수군거렸을 정도다.
‘어쩌면 사실일지도….’
켈시온의 뒤를 따라 집무실을 빠져나온 스캇은 그렇게 생각했다.
백작은 변했다. 단지 외모뿐만이 아니다. 줄곧 영지 외부 임무를 수행하다 이번 소집으로 오랜만에 그을 대면했을 때의 소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에게 느껴지는 마기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 탐욕 가득했던 백작의 눈은 때때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이질적인 안광을 뿌렸다. 진득한 마기는 인간보다 마물에 더욱 가까웠다.
그러니 악마와 직접 계약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것도 당연했다.
“스캇 님, 다녀오셨습니까.”
별채에 들어서자 십여 명의 사내들이 스캇을 맞았다. 언뜻 통일성 없는 가지각색의 복장이었으나 음울해 보이는 분위기만은 전부 같았다.
모두 켈시온 휘하의 흑마법사, 소위 까마귀들이다.
영주성에 소집되었다 하나 그 존재를 대놓고 드러낼 수 없기에 별채에 숨다시피 지냈다. 그들 중 스캇만이 백작의 명령을 직접 받았다. 그가 가장 오래된 까마귀였으며 유일하게 4서클에 오른 이였기 때문에.
“백작께서는 그분의 권능을 받으신 것이 틀림없다.”
“오오오-!”
흑마법사들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마가 또 한 사람에게 권능을 나누어줄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회복했다는 뜻이다. 악마의 부활이 더욱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곧 우리의 세상이 온다.”
스캇의 입매가 호선을 그었다.
그간 핍박 속에 숨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켈시온 백작이 독립하는 데 성공한다면 드디어 음지에서 양지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악마까지 부활한다면 흑마법사로서 완벽한 환경이다.
악마의 권능까지 받은 지금의 백작이라면 분명 성공할 것이라고, 스캇은 확신했다.
* * *
켈시온령 미레인 평야.
전장으로 낙점된 곳은 얼마 전 수확이 끝난 밀밭 한가운데였다.
짧은 밑동만 남은 황금벌판에 켈시온 백작의 군대와 카르파가 이끄는 제국군과 줄리앙이 지휘하는 베니에르의 연합군이 맞닥뜨렸다.
“태양이 가장 높은 시간에 맞붙기로 했다.”
지휘 막사에서 제국군의 총사령관 카르파가 전투 개시 시간을 알렸다.
그의 부관으로 참석한 제국군의 젊은 기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근 십여 년간 제국은 작은 내전 한번 없이 평화로웠다. 대부분 실전 상대는 몬스터였으니 당연히 젊은 기사들에게 이런 대규모 전쟁은 처음이었다.
제국 기사들의 얼굴을 훑은 카르파의 눈동자가 줄리앙에게 향했다.
“줄리앙, 긴장되나?”
“딱 좋을 정도로요.”
그에 줄리앙은 씨익 웃으며 답한다.
정신없이 치렀던 첫 전투가 불과 일주일 전이다. 경험이 아예 없는 것과 단 한 번의 경험 차이는 컸다.
“좋은 긴장감이다. 저쪽이 두 배도 넘어 보이는군. 실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켈시온 백작의 군세 일천육백.
제국과 베니에르의 연합군 칠백.
숫자부터 완벽한 열세였지만 카르파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기대감이 묻어났다.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에 제국의 젊은 기사들도, 베니에르의 지휘관으로 참석한 이들의 불안감도 다소 옅어졌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배틀 메이지까지 있지 않은가. 실로 든든하기 그지없군.”
카르파의 장난스러운 말에 세실도 빙긋이 미소를 보였다.
그저 긴장을 풀려는 농담만은 아니다. 4서클의 배틀 메이지는 상급 기사에 준할 정도로 든든한 전력이니까. 실제로 이전 싸움에서는 할튼에게 벼락을 떨어뜨리며 전투를 결정짓지 않았는가.
“베니에르에게 우익을 맡겨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사령관님. 맡겨만 주십시오.”
줄리앙이 즉답했다.
일반적인 회전에서 우익의 역할은 돌파와 분쇄다. 아군의 좌익이 적의 우익을 막아 내는 동안, 적의 좌익을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부수는가에 따라 전투의 향방이 결정된다.
카르파는 그런 막중한 역할을 줄리앙에게 맡기고자 한 것이다.
“좋다! 제국군 기병 오십을 우익에 더하겠다. 아실란, 네가 베니에르를 돕도록 해라!”
“예, 사령관님!”
아실란이라 불린 한 젊은 기사가 목청 높여 답했다.
제군국의 기병대를 이끌고 있으며 개인으로는 엑스퍼트 중급의 성취를 이룬 기사다. 아실란의 기병대가 더해지면 베니에르의 돌파력을 한층 강력해질 것이다.
“빠르면 오늘 중으로 바이스만군이 합류할 것이다. 첫 승리는 우리가 황제 폐하께 바친다!”
“아슐렌에 영광을!”
“제국에 승리를!”
잠시 후 정오.
마침내 양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군한다! 제국의 적을 처단하라!”
뿌우-!
카르파의 호령에 이어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어서 제국군과 베니에르군이 함께 진군했다. 맞은편 팔란이 이끄는 켈시온의 선봉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척, 척, 척.
다가닥, 다가닥, 다가닥.
적과 가까워질수록 전열 보병의 진군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기병도 그에 보조를 맞추며 언제든 돌격할 준비를 한다.
쉬이이익-!
전열이 맞붙기 전 화살과 투석이 양군 사이를 날았다.
무장과 훈련 상태가 좋은 제국군은 기계적으로 방패를 들어 방어하고 이내 화살로 돌려주었다.
으아악-!
켈시온 진영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다. 주로 무장이 부실한 용병들의 비명이었다.
화살 비에 멈칫할 만도 한데 그들은 동료가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돌격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으음?”
그 광경에 카르파의 눈썹이 비틀렸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본능이다. 잘 훈련된 병사도 그것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다. 하물며 급조된 용병들은 더할 것이다.
“이히히! 사지를 찢어 주마!”
“죽여! 죽여! 죽여!”
적병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병사와 용병을 가리지 않았다. 저들은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동료를 주저 없이 밟으며 돌격해 왔다.
실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쾅-!
마침내 양군이 맞붙었다.
가까이에서 무기를 맞대고 나서야 제국과 베니에르의 병사들은 적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케헤헤헤! 안 아파! 안 아파! 죽어랏!”
“으히힛! 피가 난다!”
그들은 너도나도 웃고 있었다. 눈동자의 초점이 사라져 어디를 응시하는지도 알 수 없다.
죽음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라도 한 듯, 그저 전진밖에 모르는 병사들. 단순한 용맹이나 전장의 광기로 치부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뭐, 뭐야!”
“이 자식들 전부 왜 이래! 전부 미친 것 아냐?”
복부에 창이 꽂히면 스스로 깊숙이 당기며 상대에게 검을 내지른다. 자신의 팔 하나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내주며 적의 목을 벤다. 동료의 몸을 방패 삼아 적과 함께 꿰뚫어 버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전투 방식에 제국군 사이에 동요가 일었다. 동요는 금방 공포가 되어 곳곳에 퍼졌다.
당황한 것은 제국군뿐만이 아니었다.
우익을 맡은 베니에르의 군대 또한 기세에서 밀리며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파블로! 니앙!”
“알았어!”
줄리앙의 외침에 파블로와 니앙이 나섰다.
두 사람은 줄리앙이 원정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베니에르에 찾아왔다. 반란군과 전투 때는 부득이 참여하지 못했지만 이번에야말로 함께 싸우겠다면서.
“아쿠아!”
파블로와 니앙의 마법.
적의 좌익 곳곳에 물벼락이 떨어지며 그들을 흠뻑 적셨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효과다. 찬물을 뒤집어썼다고 피해를 입는 것도 아닐뿐더러 과량으로 복용한 약 기운도 그대로였으니까.
당연히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라이트닝!”
세실의 영창과 함께 수 개의 전격이 적군을 헤집으며 달렸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한 전격 마법이라면 5서클의 체인 라이트닝이 대표적이지만, 그녀의 경지는 아직 그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물을 조합한 상태에서 다수의 라이트닝을 사용한다면 감전 효과만큼은 비슷하게 구현할 수 있다.
으아아아아-!
짐승처럼 달려들던 적의 좌익이 라이트닝의 감전 효과에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마약으로 공포를 거세시켜도 전격에 의한 마비에는 저항할 수 없다. 불과 몇 초에 불과한 마비 효과지만 전장에서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