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악마 켈시온 (1)
“지금이다! 밀어붙여!”
우와아아아아-!
줄리앙의 명령과 함께 베니에르 병사들의 함성을 지르며 적을 헤집었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적을 찔러 넘기며 순식간에 기세가 반전됐다. 적의 좌익을 단번에 밀어내며 공세에 나선 것.
“아쿠아!”
“라이트닝!”
세실은 적재적소에 전격을 사용하며 병사들을 도왔다.
할튼에게 사용했던 콜 라이트닝이라면 확실한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지만 마력은 크게 고갈된다. 그렇기에 부족한 살상력을 병사에게 맡기는 효율적인 전투 운영을 택했다.
무엇보다 켈시온 백작이 아직 중군에 건재했으니까.
“파이어 볼!”
줄리앙도 마법으로 힘을 보탰다.
밀집된 적 병력 한가운데에 화염구가 폭발하며 진형이 붕괴됐다. 뒤에서 받쳐 주지 못하니 전열도 힘을 쓰지 못했다.
“별것 아닌 놈들이야! 밀어붙여!”
“으야아아압!”
침착함을 되찾은 베니에르 병사들.
이내 단단히 연계해 적을 빠르게 밀어내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콰과광-!
줄리앙의 마법에 연이어 화염이 폭발한다. 그 덕에 적 좌익에 완전히 틈이 벌어졌다.
“아실란 경! 지금입니다!”
“기다렸습니다!”
줄리앙의 신호에 아실란이 답했다.
지금껏 기병 돌격 기회만 보고 있던 그다. 숭덩숭덩 구멍이 뚫린 적 보병진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돌격하라! 적을 완전히 분쇄한다!”
두두두두-!
아실란을 선두로 오십 기의 기병이 전장을 크게 돌아 달려 나갔다.
이내 속도를 붙인 기병대가 그대로 적의 옆구리를 들이치자, 보병들은 손쓸 틈 없이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히며 뭉개졌다.
“공간을 없애고 진형을 정비하라!”
팔란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에게 두려움을 없애는 약을 먹이겠다 했을 때, 불안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과 첫 충돌 때 직감했다. 약 때문에 지휘는 오히려 힘들어질 것을.
“뭉쳐라! 공간을 허용하지 말…!”
좌익을 지휘하며 팔란의 명을 전파하던 부관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순식간에 돌파해 들어간 아실란이 그의 목을 베었기에.
“제기랄!”
부관의 목이 허공을 나는 광경에 팔란은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었다.
제국군의 단단해진 방어에 우익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좌익은 지휘관을 잃고 이미 절반 이상 괴멸되었다. 이대로는 필패다.
중군에서 지켜보던 카르파도 그러한 전황을 읽어 낸 것은 마찬가지.
“중군과 좌익은 공세로 전환하라!”
지금껏 방어를 단단히 하던 제국군의 중군과 좌익이 일시에 몸을 펼쳤다.
우익을 맡은 베니에르가 적의 좌익을 거의 분쇄한 상황이다. 이제 적의 중군은 정면에서 제국군과 싸우며 베니에르군에 옆구리를 내주어야 할 것이다.
“조금만 버텨라! 곧 구원이 올 것이다!”
팔란은 고래고래 목을 높였다.
위기를 맞이했지만 아직 희망은 있다. 본대가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병력을 추슬러 퇴각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어째서 움직일 기미가 없는가?’
팔란은 언뜻 뒤를 돌아보았다.
후방의 본대는 구원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용병이 섞였다 하나 선봉대에는 켈시온의 정예병도 이백이나 섞여 있다. 지금이라도 본대가 참전하면 저들도 일단 물러날 터. 피해를 줄이며 남은 군을 수습할 수 있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는다니, 정녕 이들을 모두 포기할 셈이란 말인가?
‘설마 처음부터 버림 패였단 말인가? 도대체 왜?’
팔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백작의 의도를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두두두두두-!
그사이 적의 좌익을 완전히 통과한 아슬란의 기병이 팔란이 지휘하는 중군의 뒤를 급습했다.
“후퇴, 후퇴한다!”
앞, 뒤, 옆. 삼면에서 들이치는 적. 결국 팔란은 후퇴를 명했다.
어찌 됐건 이대로 버티면 전멸이다.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용맹하기는 하나 판단이 늦군.”
그런 팔란의 앞을 가로막으며 반백의 기사가 나타났다.
“네놈은 누구냐?”
“카르파 슈멜린이다. 네 이름은?”
“…당신이 상대였던 것인가. 팔란이다.”
한때 제국 모든 기사의 우상이라 일컬었던 카르파 슈멜린.
그의 이름을 모를 리 없는 팔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기사 팔란, 덤벼라.”
카르파의 검에 오러가 휘몰아쳤다.
좋게 쳐도 중급 기사 수준의 팔란이 그 검을 막아 내는 것은 무리였다.
뎅겅-!
검을 섞은 지 서너 합 만에 팔란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기사 팔란의 목을 베었다!”
와아아아아-!
제국군과 베니에르군의 함성이 평야를 울렸다.
“피해 상황을 확인하라!”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켈시온의 본대를 경계하며, 카르파는 재빨리 병력을 수습했다.
확정된 패배에도 끝까지 저항한 적 때문에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다. 대략 2할이 전사했고 1할 이상 전투 불능의 중상을 입었다.
“남은 병사는 오백이 안 되는가.”
이에 크게 승리했음에도 카르파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여전히 병력 차는 두 배 이상. 그것도 저쪽은 체력조차 소모하지 않은 상태.
게다가 전투 내내 적 본대의 움직임을 주시했지만 기이할 정도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붉게 얼룩진 평야 너머를 바라보는 카르파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 * *
“선봉대가 당했다…!”
“모, 모두 죽은 거야?”
“백작님은 어째서 보고만 있는 거야? 구원하러 갈 수 있었잖아?”
켈시온 백작 본대의 병사들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봉으로 출진한 아군 육백이 전멸당했다. 하나뿐인 영지의 기사마저 죽었다. 그 광경을 뜬 눈으로 지켜보기만 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켈시온은 그런 동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작님, 여기 있습니다.”
한차례 전투가 끝나고, 스캇은 아홉 개의 영혼석을 모아 켈시온의 앞에 바쳤다.
방금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영혼이 담긴 것이다. 영혼석 아홉 개중 여덟 개가 가득 찬 상태였다.
“팔백이 조금 넘는가.”
켈시온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늘이며 영혼석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악마의 권능을 나누어 받으면서 직접 영혼을 흡수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영혼을 바치기만 했던 것에 비하면 커다란 변화였다.
스으으윽-!
손을 통해 영혼이 빨려들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흑마법사 스캇은 켈시온의 마기가 한층 거세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으음….”
켈시온은 만족스러운 듯 낮은 신음을 토했다.
권능을 나누어 받은 후 이렇게 다량의 영혼을 직접 흡수하는 것은 처음이다. 미식을 맛보는 듯한 쾌락. 저절로 눈이 감기고 모자 속에 숨긴 뿔이 간질간질했다.
악마에게 뿔의 개수란 격을 나타내는 가장 직관적인 지표다. 크기와 모양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브뤼쉬의 기사 듀발은 크고 두꺼운 뿔 하나를 가졌다. 하지만 아무리 멋지고 웅장해도 하나의 뿔은 최하급 악마를 가리킬 뿐이다.
마찬가지로 켈시온이 가진 뿔은 기껏해야 손가락 반 마디 정도로 짧았지만 세 개였다. 듀발과 격이 다른 것이다.
‘영혼의 사용법?’
한 번에 수백 명분의 영혼을 흡수한 지금, 켈시온에게 새로운 지식이 각인되고 있었다.
1천 명분의 영혼을 소모하면 마계와 이어지는 최하급 차원문을 열 수 있고, 그 위 등급인 하급 차원문을 여는 데는 3천 명분의 영혼이 필요하다니. 또한 여는 것과 별개로 유지하는 데에도 꾸준히 영혼이 필요하다는 내용 등.
아마도 일정 수량 이상의 영혼을 흡수했을 때 각인되는 지식 같다.
‘차원문 개방에 사용하는 건 아직 이르겠군.’
차원문 개방은 장단점이 명확했다.
소모되는 영혼량이 어마어마하지만 차원문을 통해 건너온 악마와 마물이 수확한 영혼을 일정 비율로 자동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직은 시기상조다. 하급의 격을 가진 켈시온은 최하급 차원문만 개방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영혼이 부족했다.
‘영혼을 소모해 격을 높일 수도 있다니! 이거다!’
오백 명분의 영혼으로 뿔 하나를 더 늘릴 수 있다니.
격을 높일 수 있다는 내용에 켈시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뿔 네 개부터는 중급 악마의 격이다. 일곱 개의 뿔은 상급, 아홉 개의 뿔은 최상급 악마로 분류된다. 열 개의 뿔을 가진 존재는 모든 악마의 정점, 마신이라 불렸다.
켈시온에게 힘을 나누어 준 악마 게르베는 아홉 개의 뿔을 가진 악마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켈시온은 곧바로 영혼을 소모하여 격을 높이기로 했다.
영혼 흡수로 늘어난 마기가 전신을 몇 바퀴 순환하더니 머리로 모여들었다.
쑤욱-!
이마 위쪽에 또 하나의 뿔이 솟았다.
“흐흐흐흐…!”
네 개의 뿔을 가진 중급 악마.
격이 높아진 것이 체감됐다. 이것으로 차원문을 열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도 충족했다. 이제 필요한 영혼만 더 수집하면 될 일이다.
“스캇, 나머지 병사들에게 모두 약을 먹여라.”
켈시온은 말고삐를 당겨 터벅터벅 본대 앞으로 나아갔다.
밀밭 너머 진을 친 병사들의 목숨을 취할 생각에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모두 서둘러라!”
레오의 목소리에 바이스만 군대는 더욱 행군 속도를 높였다.
켈시온의 군대가 미레인 평야를 전장으로 삼았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출정했지만 뒤늦을 수밖에 없었다.
개전일은 바로 오늘.
곧 정오가 다가온다. 어쩌면 벌써 전투가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오, 더 속도를 높이는 건 무리야. 후미에 낙오하는 병사들이 생기고 있어.”
“젠장! 이래서는 이미 전투가 끝나 버릴지도 모른다고!”
레오는 마음이 급했다.
카르파 슈멜린이 제국군을 이끈다 해도 두 배 이상의 병력 차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켈시온이 또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감은 커졌다.
병사들을 닦달해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이 속도라면 오후 늦게나 미레인 평야에 도착할 터.
“무무카! 올빼미 백인대를 맡아서 나를 따라와! 나머지 병사들은 패트릭에게 맡길게!”
결국 레오는 군을 쪼개기로 했다.
지금 행군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은 대부분 신병이다. 바이스만에서 가장 정예로 평가받는 올빼미들이라면 속도를 높일 여유가 있다.
“금방 따라갈게.”
“음,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덱스는 곧장 후미의 패트릭에게 명령을 전하러 이동했다.
무무카도 곧 백인대를 이끌고 행군의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
“행군 속도를 더 높이겠다!”
“악!”
무무카가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하자 올빼미들도 그 뒤를 따랐다.
“뒤처지지 마라! 처지는 놈들은 덱스 교관에게 추가 훈련을 받는다!”
“히이이익! 악!”
1번 올빼미 발트란의 한마디에 올빼미들은 바람처럼 무무카의 뒤를 쫓았다. 마치 바람의 정령의 가호라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슈니, 우리도 가자.”
레오가 타고 있던 슈니의 목덜미를 툭툭 쳤다. 혼자서라도 먼저 전황을 확인할 셈.
파앗.
지면을 박찬 슈니가 속도를 붙였다.
사람이 걷기 힘든 지형을 무시하며 일직선으로 달려 나가는 슈니.
딸랑- 딸랑-!
레오의 몸이 거세게 흔들리면서 허리춤에 달고 있던 성자의 방울이 소리를 냈다.
평야에 가까워질수록 방울 소리에서는 점차 불안한 음색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레오의 불안감도 고조됐다.
[…악마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여신의 음성.
신전에서와는 달리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다.
슈니의 목덜미를 잡은 레오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