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악마 켈시온 (2)
‘그 악마가 저쪽에 있다는 뜻이야?’
레오가 긴장한 듯 되물었다.
메퀸토가 남긴, 악마가 나타나면 반응할 것이라는 보석을 확인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어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그건 아니에요. 게르베보다는 한참 격이 낮지만 중급의 격을 이룬 악마예요.]
‘다른 놈이라는 뜻이군. 중급의 격이라는 건 뭐지?’
레오는 여신에게 악마의 격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었다.
일전에 싸웠던 듀발이 가장 낮은 격의 악마라는 것. 악마의 뿔이 없는 마물은 그저 몬스터나 짐승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도.
‘너와 싸웠다는 게르베라는 그놈은?’
[게르베는 과거 아홉 개의 뿔을 이루었던 악마. 만약 그때 게르베를 꺾지 못했다면 열 개의 뿔을 이루어 마신이 되었을 거예요.]
‘마신을 앞둔 놈이었다니, 거물이라고 해야 하나?’
거센 맞바람을 뚫고 두 개의 언덕을 지났다.
레오는 마침내 평야가 보이는 장소에 도달했다.
“젠장!”
내려다보이는 광경에 욕설이 튀어나왔다. 어째서 안 좋은 예감은 항상 잘 들어맞는 걸까.
두 무리의 군이 치열한 전투 중이었다. 그중 한쪽은 삼면을 포위당해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카르파, 줄리앙과 세실, 파블로와 니앙까지.
포위당한 군대 안에 분투하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레오는 곧바로 검을 빼 들고 슈니의 목덜미를 당겼다.
“바이스만이 왔다!”
가파른 언덕을 달려 내려오며, 레오는 오러를 담은 포효를 내질렀다. 적군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끌기 위해서다.
평야가 쩌렁쩌렁 울리는 포효.
치열한 전투 중에도 몇몇 병사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저 짐승은 뭐지?”
“사람이 타고 있잖아?”
레오와 슈니를 발견한 제국과 베니에르 병사들이 오히려 동요하기도 했지만.
“바이스만 남작이 신수와 함께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노련한 카르파의 한마디가 금방 혼란을 잠재웠다.
“구원이 왔다! 신수가 제국을 돕는다!”
“소드 마스터 바이스만 남작이 참전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버티면 살 수 있다!”
소드 마스터와 신수라는 기대하지 않던 구원의 등장.
그 덕분에 패색이 짙던 제국군과 베니에르군은 다시 힘을 짜낼 수 있었다.
퍼버벅-!
그사이로 슈니가 난입했다.
일반 병사의 창검으로는 상처도 낼 수 없는 단단하고 거대한 몸. 묵직한 앞발과 채찍처럼 휘두르는 긴 꼬리에 켈시온 병사들이 허공에 비산했다.
“으아아악-!”
“저 짐승 새끼를 죽여!”
압도적인 상대에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만 약에 취한 병사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레오도 금방 적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항복을 받아 희생을 줄이는 선택지는 없다. 아군 병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적을 빠르게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슈니의 등에서 뛰어내린 레오.
길게 늘인 오러의 검날이 적군의 갑옷과 무기를 두부처럼 가른다. 한 번의 번득임에 수명의 병사들이 썰려 나갔다.
후우우웅-!
이어지는 오러 블레이드의 돌풍.
단번에 수십의 몸이 찢기며 공간이 트였다. 빈 공간으로 몸을 던진 레오가 다시 한번 검을 뿌리니 사방에서 선혈이 비산했다.
“우측 포위망이 뚫렸다! 조금만 더 버티면 밀어낼 수 있다! 다들 힘을 내라!”
한쪽 포위망이 무너지자 카르파도 이에 호응했다.
“라이트닝-!”
“지금이다! 밀어내!”
세실은 마력을 짜내어 한 번 더 전격을 뿌렸다.
때에 맞추어 병사들은 감전되어 덜덜거리는 적군을 밀어냈다.
“으윽….”
몸에 힘이 쭉 빠진 세실이 휘청였다. 마력 탈진이다. 이제 더 이상 마법에 의지할 수 없다.
“세실! 후방으로 빠져!”
“하지만 오라버니!”
“걱정하지 마라, 레오가 왔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알겠어요.”
줄리앙은 세실에게 호위를 붙이고는 다시 전열로 앞서 나갔다.
줄리앙도, 파블로와 니앙도 마력이 바닥난 지 오래다. 그들은 이미 검을 들고 병사들과 섞여 싸우고 있었다.
‘이래도 병사를 물리지 않을 셈인가!’
레오는 저 멀리 말에 올라타 있는 켈시온 백작을 힐끗 확인했다.
켈시온은 불과 이백 가량의 병력만 남기고 전군을 밀어 넣었다. 레오의 등장으로 전세가 뒤집히고 있으니 일단 군을 물리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이다.
그런데도 놈은 침착하다. 아니, 희미한 미소마저 보인다.
‘마치 이들 모두가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영혼 수집.
레오는 그제야 거기에 생각이 닿았다.
놈의 관심은 처음부터 전투의 승패가 아니었다.
오직 가장 많은 희생이야말로 놈이 원하는 것.
카아아악-!
군대 한가운데서 날뛰는 슈니의 모습이 보였다.
“포위망이 무너졌다!”
“제국에 승리를!”
진형이 완전히 무너져 힘을 쓰지 못하는 적군.
절반가량 줄어든 병력으로 제국과 베니에르의 연합군이 공세를 취한다.
비명과 함성이 난무하는 혼란스러운 전장.
모든 것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레오의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불길한 예감.
[레오!]
여신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레오는 반사적으로 켈시온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탐욕스럽게 웃고 있는 켈시온의 앞에.
마기를 뿜는 검은 원이 그 면적을 넓혀 가고 있었다.
‘저것이 마물을 불러들이는 차원문인가…!’
진득한 마기를 내뿜는 지름 2미터가량의 검은 원.
레오는 그것이 차원문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최하급 차원문이에요. 이 전장에서 흡수한 영혼을 대가로 문을 연 것 같네요.]
‘최하급이라니 차원문에도 등급이 있다는 뜻인가? 뭐가 다르지?’
[최하급 차원문은 뿔 하나의 악마와 그보다 격이 낮은 마물만 통과할 수 있어요. 악마는 자신보다 격이 낮은 차원문만 열 수 있으니, 중급 악마의 격을 이룬 저자는 하급 차원문까지 열 수 있어요.]
‘자신보다 격이 높은 것들은 불러올 수 없다는 뜻이군.’
[바로 그 말이에요.]
여신의 설명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뿔 하나였던 듀발이 떠올랐다. 혼자 상대하는 데야 거뜬하겠지만 그만한 악마가 수백 수천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아아-!
그사이 차원문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오오오…! 마계의 문이 열리다니!”
“그분의 힘이 느껴진다!”
스캇과 휘하의 흑마법사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비록 최하급 차원문이지만 그들에게는 이 광경 자체가 신비의 끝이나 마찬가지다. 마계의 존재와 직접 접촉하는 것은 흑마법사라면 누구나 가지는 숙원이었으니까.
“흐흐흐…!”
켈시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차원문을 여느라 대량으로 소모했던 영혼이 또다시 보충되고 있다.
크르르-!
이윽고 검은 공간 너머에서 마계의 존재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흐릿한 검은 연기 같던 것들이 차원문을 빠져나오며 형체를 완성해 갔다. 인간계의 몬스터나 동물을 본뜬 생김새로 두 발 또는 네발로 땅을 디딘다. 모습은 갖가지였으나 핏빛 눈동자와 검은 몸뚱이를 가진 것만은 모두 같았다.
“너희들의 먹잇감은 저쪽이다. 마음껏 날뛰어라!”
사방을 둘러보던 붉은 안광이 한 방향을 가리킨다.
차원문은 여전히 꾸역꾸역 마물을 뱉어 냈다. 그 숫자는 어느덧 수십을 넘어 백 단위에 들어섰다.
카아아아-!
검은 마물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서로를 밀치고 짓밟으면서 오직 한 방향을 향했다.
“검은 마물!”
레오는 으드득- 이를 갈았다.
회귀 전 제국 북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던 그놈들이다. 놈들과 맞서다 결국 붉은 이리 용병대 전원은 목숨을 잃었다.
검은 마물이 풍기는 음울한 마기와 함께, 묻어 두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기억이 선명히 되살아났다.
“괴물이다!”
“흑마법사가 괴물을 불러냈어!”
뒤늦게 차원문과 마물을 발견한 병사들이 소리쳤다.
켈시온의 팔백 병력은 이미 전멸 직전이다. 수적 열세 속에서도 가까스로 전황을 뒤집은 연합군은 승리에 기뻐할 틈도 없이 새롭게 나타난 적에 긴장해야 했다.
“저 괴물들은 뭐지?”
“교류전에 나타났던 그놈들 아니야?”
“젠장, 하필 이런 때…!”
줄리앙과 세실, 파블로와 니앙은 검은 마물을 금방 알아봤다.
축제였던 아카데미 교류전을 망친 주범들이니 잊을 턱이 없다. 다만 마력이 바닥난 지금은 저들을 상대할 힘이 없다는 것이 뼈아팠다.
“전군! 진형을 정비하라!”
카르파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으나 금방 냉정함을 찾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놈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놈들의 수준이 가늠된다면 이쪽에서 치고 들어갈 테지만 지금은 섣불리 달려들 수 없다.
병사들도 연이은 전투로 피로가 극에 달해 있다. 지금은 제자리에서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다.
카아아아-!
어느덧 마물 무리가 가까워진다.
인간도 몬스터도 아닌 존재를 적으로 맞게 된 병사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그 눈동자는 이미 절망이 가득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이다. 살아남을 수 없다고, 정면을 응시하는 병사들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레오가 나섰다.
어느새 그의 곁에 돌아와 올라타라는 듯 몸을 낮추는 거대한 신수.
‘아니야.’
레오는 슈니에게 고개를 저었다.
단신으로 마물 무리에 뛰어들어 싸우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래서는 등 뒤의 동료와 병사들을 지킬 수 없다. 이미 싸울 기력이 바닥난 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레오, 무리할 필요 없어.”
“…줄리앙.”
“아무도 네게 전부 짊어지라고 하지 않아.”
그런 레오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줄리앙.
지쳐 덜덜 떨리는 손끝이 어깨를 통해 전해진다.
“그 말이 맞다. 엄밀히 말해서 이 병사들의 목숨은 총사령관인 내 책임이지.”
카르파도 곁에 나란히 서며 레오의 등을 툭 친다.
“학부장님.”
“지금은 총사령관이네만.”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요. 농담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걸 보면.”
“뭐, 소드 마스터가 날뛰는 모습을 보면 저들도 힘이 나지 않겠나?”
“그것도 말 되네요.”
레오는 훌쩍 뛰어 슈니에게 올라탔다.
검은 마물을 없앤다. 처음부터 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았다.
“바이스만의 올빼미가 왔다!”
“아악-!”
그때 우렁찬 괴성과 함께 한 무리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무카가 이끄는 바이스만의 정예 올빼미들이 도착한 것.
전장을 파악할 것도 없었다. 인간을 향해 달려드는 검은 마물이 적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도 명확했으니.
“나도 왔다고!”
덱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몸이 달았던 나머지 병사들을 패트릭에게 맡기고 온 모양이다.
“바이스만군이야! 올빼미라고 했어!”
“이길 수 있는 거야? 살 수 있는 거야?”
절망에 가득했던 병사들의 눈에 희망이 돌아온다.
소드 마스터 레오 바이스만, 그리고 소문이 무성한 그의 올빼미 부대.
그들이 있다면 저 마물과 싸워 볼 만하지 않을까…!
“좋아! 너희에게 뒤를 맡기겠다!”
화색이 된 레오.
이제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슈니의 등에 올라타 마물 무리를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레오의 머리 위로 수 개의 화염이 앞서갔다. 볼 것도 없이 덱스의 지원이다.
퍼버버버벙-!
마물 한가운데에 수 개의 화염의 창이 폭발했다.
케에에에엑-!
플레임 스피어의 화력에 갈가리 찢겨 폭사하는 마물 무리.
놈들이 녹아내리는 광경에 병사들이 환호했다.
곧이어 높게 뛴 슈니가 마물 한가운데에 뛰어들었다.
콰직-!
거대한 앞발에 눌린 마물이 무른 과일처럼 터져 나갔다. 사방에 흩어진 검은 체액은 곧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그사이 땅에 내려선 레오가 검 끝을 하늘로 펼쳐 들었다.
푸른 빛을 넘어 흰빛의 오러가 검신을 감싸 회전하며 나선을 만들어 낸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나선의 검풍이 검신을 넘어 거대한 돌풍을 구현했다.
후우우웅-!
칼날 같은 예기를 가진 오러의 돌풍이 검 끝에 피어났다.
레오가 검을 뿌리자 그것은 지면을 긁어 내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저 차원문부터 해결해야 한다!’
오러의 돌풍이 지금도 마물을 뱉어 내고 있는 검은 차원문으로 향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