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악마 켈시온 (3)
지금 이 순간에도 마물을 뱉어 내는 차원문.
‘이래서는 의미가 없어!’
레오는 눈앞의 마물을 베어 넘기며 와락 인상을 썼다.
차원문을 통해 마물 수는 계속 늘고 있다. 저 차원문을 닫거나 파괴해야 하는데 방법을 모르니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생각의 접근을 바꾸니 의외로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결국 마물이 늘어나지만 않으면 되는 거였어.’
오러의 돌풍을 차원문 앞에 세운다.
그것이 새로운 전략이었다. 차원문 밖으로 고개만 내밀어도 족족 분쇄되도록 만든다면 결국 문은 있으나 마나 할 테니까.
쿠구구구구궁-!
오러 돌풍이 진격하는 마물 무리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날카로운 예기에 휩쓸린 마물은 저항할 틈도 없이 갈가리 찢겨 돌풍 속으로 사라졌다.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돌풍은 마치 지우개처럼 꿈틀거리는 마물 무리를 깨끗이 지워 나갔다.
키에에에엑-!
돌풍에 휩쓸린 크고 작은 마물들은 저항 한번 못하고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재해와 같아 한 인간의 힘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리도 강해지다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르파가 중얼거렸다.
처음 레오가 오러 블레이드를 깨우쳤을 당시가 떠올랐다. 지금의 돌풍은 그때 아카데미에서 보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밀하고 날카로웠다.
“흐아압-!”
그사이 무무카가 달려 나가며 대도를 휘둘렀다.
콰지직-!
무무카는 앞을 가로막는 마물을 가리지 않고 베고 부수며 전진했다. 그의 괴력에 마물의 전열이 산산이 부서지자 뒤를 따르던 올빼미들도 용기백배했다.
“저것 봐! 놈들도 결국 죽는다고! 대장의 뒤를 따라 돌격해!”
“아악!”
발트란의 외침과 함께 바이스만의 병사들도 검은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겨우 일백의 병사였지만 그 용맹함은 여느 기사단 못지않다. 또한 개개인의 실력과 연계도 결코 간과할 수 없었으니 적은 숫자로 오히려 마물을 압도했다.
“저것이 바이스만의 올빼미…!”
“저 웨어울프를 보라고, 마물이 힘도 못 쓰고 당하고 있어! 소문으로 듣던 야수의 기사임이 분명해!”
감탄하며 바라보는 제국과 베니에르의 병사들.
미지의 존재였던 검은 마물이 바이스만 병사에게 무너지는 광경을 보며 어느덧 그들 얼굴의 두려움이 가셨다.
결국 놈들과 몬스터와 별다를 것 없다. 창검을 찔러 넣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그런 확신이 생긴 것이다.
바뀐 분위기를 눈치챈 카르파가 검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너희는 이 싸움을 저들에게 모두 맡길 셈인가!”
바이스만군의 용맹에 그저 감탄하던 병사들이 눈빛을 바꾸었다.
그럴 리 없다. 직전까지 켈시온의 군대와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은 자신들이다. 적의 선봉대를 궤멸시켰으며 본대까지 상대한 전투에서도 승리가 목전이었다
“제국을 지키고, 나아가 제국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 너희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병사들이 화답했다.
전투의 끝을 남의 손에 맡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기를 쥔 병사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과 절망은 찾아볼 수 없다.
“창을 잡아라! 검을 들어라! 제국의 적에게 그 창검을 겨누어라!”
와아아아와-!
일백의 올빼미 뒤로 연합군이 합류했다.
다시 한번 미레인 평야에 대규모 전투가 시작됐다.
* * *
콰직, 콰직-!
마침내 차원문까지 도착한 오러 돌풍은 제 자리에 머무르며 마물이 넘어오는 족족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스캇! 저 돌풍을 치워야 한다!”
켈시온이 다급히 외쳤다.
구원이라며 바이스만군이 나타났을 때까지만 해도 여유로웠다. 오히려 수집할 영혼이 늘어 기뻤을 정도다. 소드 마스터인 레오 바이스만이라 해도 무수히 늘어나는 마물을 혼자서 막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콰지지직-!
그런데 저런 방법으로 차원을 넘는 마물을 막아 버리다니. 비싼 대가를 치러 불러낸 차원문이 무용지물이 된 꼴을 보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화력을 집중하면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틈이 생길 것이다. 일제히 공격해라.”
스캇은 수하의 흑마법사 십여 명과 동시에 레오를 노리기로 했다.
저 오러 돌풍은 분명히 굉장한 힘이다. 하지만 저 돌풍이 나타난 이후 소드 마스터는 제자리에서 주변에 다가오는 마물만 처리하고 있다.
어쩌면 저 오러 돌풍 때문에 큰 행동에 제약이 생긴 것은 아닐까.
“윈드 커터!”
“파이어 볼!”
“파이어 애로우!”
2, 3서클 흑마법사들이 화염과 바람 조합의 공격 마법을 발동했다.
‘쯧.’
동시에 날아드는 십수 개의 마법에 레오도 미간을 굳혔다.
하나하나 파훼하기에는 수가 너무 많다.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그랬다가는 차원문을 막고 있는 오러 돌풍을 유지할 수 없다.
스캇의 추측대로였다.
‘역시 피하지 못하는구나!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마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 방법이 없겠지.’
스캇이 입꼬리를 올리며 4서클 마법을 준비했다.
역시 그는 발이 묶여 있다. 오러 돌풍을 포기하고 피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몸으로 버텨 낼 것인가. 만약 후자를 선택한다면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릴 셈이었다.
퍼버버벙-!
레오는 마지막까지 피하지 않았다.
으득! 어금니를 악물며 정면으로 날아드는 화염을 노려봤을 뿐이다.
몇 번의 폭발이 이어졌다. 연이어 터지는 화염과 뿌연 연기에 레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 그 연무를 뚫고 윈드 커터마저 날아들었다.
“레오!”
후방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줄리앙이 소리를 내질렀다.
마법사가 아닌 이상 저 마법 공격을 모두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법사라 해도 얼마나 막아 낼 수 있을까. 적어도 줄리앙은 자신이 없었다.
“스톤 스파이크!”
동시에 스캇의 마법도 완성됐다.
두두두-!
땅속에서 암석이 송곳처럼 솟구쳐 레오가 서 있던 반경 수 미터를 꿰뚫는다. 근처에 있던 마물은 영문도 모르고 꼬챙이에 꽂힌 신세가 됐다.
그 또한 4서클에 이른 마법사다. 마법의 경지로만 보면 악마와 계약하기 전의 켈시온 백작보다 우위였다.
“어떠냐! 하하하핫!”
성공을 확신한 스캇이 외쳤다.
절대로 막아 낼 수 없는, 최고의 타이밍과 방향을 노린 마법이라 확신했다. 제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해도 최소한 치명상을 입었으리라.
“소드 마스터도 별것 아니군, 크흐흐흐!”
스캇은 크게 웃으며 연무 속을 살폈다.
분명 중상으로 쓰러져 있을 레오의 모습을 기대하면서.
“…?”
뿌연 연무가 잦아들면서 광대에 닿을 듯 치켜 올라갔던 스캇의 입꼬리가 뚝 떨어졌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레오의 모습이 드러났다.
“역시 덱스야.”
레오는 혼잣말을 뱉으며 씨익 웃었다.
주변 지면은 이리저리 파여 엉망이었지만 정작 그가 서 있는 곳은 멀쩡하다. 지형뿐만 아니라 그 또한 흙먼지 하나 뒤집어쓰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다.
스캇은 그제야 그를 감싼 배리어의 존재를 확인했다.
“누구냐? 어느 틈에 배리어를?”
스톤 스파이크마저 깔끔하게 막아 낸 배리어라니.
적어도 4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펼쳤다는 뜻.
스캇의 눈동자가 바삐 움직였다.
도대체 누구지? 베니에르 진영의 적 마법사들은 모두 마력이 소진되었음을 확인했다. 아까의 파이어 볼이 그들이 마지막으로 짜낸 마법이었을 터.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바이스만 진영은 기사와 병사들이 전부 아니었던가?
쉬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마력 반응.
번쩍 정신이 든 스캇이 반사적으로 방어벽을 펼쳤다.
“배리어!”
정면을 방어하자마자 강한 충격이 터지며 배리어가 크게 흔들렸다.
십자 형태로 중첩된 윈드 커터.
반응이 조금만 느렸다면 몸이 네 조각 났을 법한 매서운 공격이었다.
“에? 그걸 막았네?”
마력이 담긴 목소리.
스캇의 고개가 향한 곳에 메이스를 쥔 기사가 장난스레 웃고 있었다.
‘저자는 바이스만의 기사가 아니었나?’
메이스를 들고 달려왔으니 당연히 바이스만의 기사라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앳되다. 그런데 저자가 마법사였다고?
스캇이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덱스의 메이스가 하늘을 향한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보자.”
맑은 하늘에 빠르게 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짙어지는 하늘을 보며 스캇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이 정도 규모의 마력 운용은 4서클인 자신도 불가능했다.
‘설마 저자는 5서클을 이룬 것인가?’
제국의 5서클 마법사는 기껏해야 열이 안된다. 저런 어린애가 5서클의 경지라니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몸은 이미 압도적인 격차를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네놈은 누구냐! 정체가 뭐냐!”
그 두려움을 부정하듯, 목이 터져라 외친 스캇의 목소리는 덱스에게 닿지 않았다.
콰르르릉-!
하늘이 번쩍이더니 천둥이 울었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면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동시에 십수 개의 벼락이 동시에 흑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이놈!”
스캇이 반사적으로 배리어를 펼쳤으나.
쩌저적- 쾅!
내리친 벼락은 배리어를 가볍게 부수며 스캇의 정수리에 꽂혔다.
“으아아악!”
전신을 태우는 고통 속에서 스캇의 시야는 이내 암전하고 말았다.
* * *
“저건 콜 라이트닝이잖아…!”
후방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세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력으로 구름이 모여들 때까지만 해도 설마설마했다. 덱스가 아무리 5서클에 올랐다 해도 4서클 마법 다수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특히 전격 마법은 화염 마법에 비해 컨트롤이 어렵다. 그중에서도 높은 상공에서 떨어트리는 콜 라이트닝은 위력과 정확도가 반비례한다고 할 정도다.
그런 콜 라이트닝 십수 개를 동시에 정확한 좌표에 떨어트린다고?
‘아니야, 좌표가 문제가 아니지. 일단 저만한 수를 동시에 운용하는 게 가능해?’
두 개 정도라면 어찌어찌 동시 발동을 시도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이상은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다. 당장 마력부터 감당 안 될 것이 뻔했으니까. 셋 이상을 시도하면 분명 마력 탈진으로 쓰러지겠지.
“덱스, 넌 도대체 얼마나 괴물인 거니….”
흑마법사를 모두 태워 버린 덱스는 어느새 앞장서서 전장을 누비고 있다. 메이스를 들고 전장 한가운데서 치고받는 그의 얼굴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세실은 결국 피식 웃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적 마법사가 모두 죽었다!”
“역시 교관님이야!”
올빼미들도 환호했다.
신경 쓰였던 적군 마법사들이 한 번에 처리되자 마음 놓고 마물과 치고받았다.
거기에 연합군까지 합류하면서 대번에 전세가 뒤집혔다. 오히려 마물이 포위당해 뒤로 밀리면서 그 숫자도 빠르게 줄기 시작한 것이다.
으드득-!
켈시온 백작이 어금니를 물었다.
중요한 전력이었던 흑마법사들이 전부 벼락에 맞아 검은 숯덩이가 됐다.
더구나 스캇은 분명 배리어를 둘러 방어했다. 그런데 그것을 부수는 콜 라이트닝이라니.
같은 서클의 공격과 방어 마법이 부딪히면 일반적으로 방어 마법이 우세한 것이 보통이다. 이번 결과는 그만큼 상대 마법사의 마력이 압도적이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공격하라! 베니에르의 병사들이여!”
“제국에 영광을!”
“악-!”
바이스만까지 참전한 연합군은 더욱 거세게 돌격했다.
차원문을 넘어온 검은 마물은 빠르게 수가 줄어, 이제 거의 힘을 쓰지 못할 정도.
‘이대로 결착을 지어야 해.‘
전장을 바라보는 레오의 입이 굳게 닫혔다.
남은 마물도 거의 없다. 이대로 돌격해 켈시온만 잡아내면 싸움은 끝난다. 하지만 놈이 이대로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강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