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악마 켈시온 (4)
“배, 백작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몰려오는 연합군을 바라보며 켈시온 진영의 부관이 덜덜 떨며 말했다.
단 한 명 있던 기사와 다른 부관들이 모두 전사했기에 켈시온 백작을 제외하면 그가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켈시온.
부관을 한 번 쳐다보고 미간을 굳히더니 다시 덱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복병이 있었구나.’
중급 악마의 격은 결코 낮지 않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 한 명이었다면 능히 싸움을 벌여 볼 만했다. 그런데 고위 배틀 메이지까지 있었다니.
콜 라이트닝의 위력을 보면 아무리 적게 보아도 4서클 끝자락. 아니, 사실상 5서클로 보는 편이 맞다.
이대로 맞붙는다면 승리를 자신할 수 없다. 중급 악마의 힘으로도 소드 마스터와 배틀 메이지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사용할 수 있는 패는….’
중급 악마로 격을 높여 최하급 차원문을 여는 데에만 천오백에 달하는 영혼을 소모했다.
이제 남은 영혼은 불과 삼백이 조금 넘는 정도.
‘빙의뿐이군.’
빙의.
영혼 오백을 소모해 한 단계 상위 악마의 힘을 부르는 방법.
상급 악마의 힘이라면 저 둘을 상대할 수 있으리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켈시온은 차원문을 유지하던 영혼 소모를 멈추고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네게 기사의 작위를 내리겠다. 전 병력을 이끌고 바이스만에 맞서 돌격하라. 내가 마법으로 지원하겠다.”
“예? 예! 목숨을 걸겠습니다!”
기사 작위라는 말에 부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평범한 병사를 이끌어 소드 마스터와 배틀 메이지를 향해 돌격하라니, 그것은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기사 작위에 부관은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백작이 직접 마법을 지원하겠다 장담했고, 이것이 남은 병력 전부이니 결코 개죽음으로 몰아갈 리 없다고 멋대로 단정한 것이다.
“전군 돌격하라!”
부관이 착각에서 깨어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무카와 덱스를 앞세운 연합군의 공세에 금방 밀리기 시작했고, 기다리던 백작의 마법 지원은 없었다.
당연했다.
켈시온이 원하는 바는 그들의 죽음 그 자체였으니.
“어, 어째서…!”
부관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이 떨어졌다. 남은 병력도 순식간에 연합군에게 녹아내렸다.
동시에 켈시온은 빙의를 위해 필요한 오백 영혼을 채웠다.
“흐흐흐, 이제야 조건이 채워졌군. 상급 악마의 힘을 빌리겠다!”
기다렸다는 듯 영혼 소모를 외치는 켈시온.
스으으윽-!
탈력감과 함께 흡수한 영혼이 사라진다. 동시에 강대한 마기의 존재가 자신의 몸에 덧씌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오오! 과연 이 힘이라면!”
이것이 상급 악마의 힘인가!
중급과 상급의 격차는 상상 이상이었다. 끓어오르듯 흘러넘치는 마기가 전신에 폭발한다. 넘치는 힘과 고양감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으하하하! 모두 덤벼라, 벌레 같은 놈들아!”
켈시온이 포효했다.
지금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짓밟고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차원문이 서서히 닫혔다.
더 이상 마물을 뱉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레오는 오러 돌풍을 거두었다.
“저놈, 뭔가 했군.”
혼자 남은 켈시온 백작이 눈을 까뒤집고 미친놈처럼 웃고 있다. 동시에 그의 마기가 한층 짙어진다.
레오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요. 저건 중급 악마의 힘이 아니에요. 격을 넘어서고 있어요!]
당황한 듯한 여신의 목소리.
“악마의 격을 높인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나?”
[그럴 리 없죠. 뭔가 대가를 치른 것이 틀림없어요.]
“대가라…. 역시 영혼을 바친 모양이군.”
레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마지막 병사들까지 내버린 것이었나.
“끄윽- 끅-!”
흰자를 드러낸 채 광소하던 켈시온이 몸을 굽히고 괴상한 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몸 전체가 기형적으로 부풀면서 거대하게 자랐다. 입고 있던 의복이 찢어지고 갑옷이 부서져 떨어졌다. 전신에 잿빛 털이 자라더니 머리에는 수사슴처럼 긴 뿔이 돋아났다. 퉁퉁하게 살쪘던 얼굴은 어느새 길게 늘어나 말 머리처럼 변했고, 땅을 짚는 두 손은 발굽처럼 갈라졌다.
그으으으윽-!
그에게서 짐승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형상이었다.
“뿔이 일곱.”
레오는 켈시온의 머리에 돋아난 뿔을 세었다.
분명 뿔의 개수가 중요하다 했지. 일곱이면 꽤 많지 않나?
[상급 악마의 격이에요.]
상급 악마라, 갑자기 거물이 되셨구먼.
오스스 소름이 일었다. 놈에게 풍기는 마기에 레오도 긴장을 놓지 못할 정도였다.
크르르르-!
곁에 있던 슈니도 털을 바짝 세웠다.
슈니의 덩치도 굉장했지만 짐승처럼 변한 켈시온은 그런 슈니보다 배는 더 커 보였다.
“병사들을 모두 물려!”
레오는 뒤를 향해 소리쳤다.
소드 마스터인 자신도 위협을 느낄 정도의 마기이다. 일반 병사들은 휩쓸려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놈이 영혼을 수집하는 것을 안 이상 더욱 조심해야 한다.
“콜 라이트닝!”
콰릉-!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다시 한번 벼락이 내리쳤다.
덱스의 마법이 정확히 놈의 정수리를 관통했지만 잿빛 털이 조금 그슬리는 것이 전부.
악마는 고개를 털더니 천천히 몸을 펼쳤다.
“이걸 맞고도 멀쩡해? 너무 튼튼한 거 아냐?”
“자그마치 상급 악마가 되신 듯하다.”
“제기랄, 무슨 악마가 이렇게 흔해? 동네마다 하나씩 숨어 있는 것 같잖아.”
어느새 레오의 곁으로 다가온 덱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그 또한 처음으로 마주한 상급 악마의 위용에 두려움을 억누르고 있었다.
가아아아아악-!
켈시온이었던 악마가 길게 포효한다.
거대한 네발짐승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 정체는 마물도, 몬스터도 아닌 상급 악마.
놈의 포효에 병사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피어(Fear)다!”
병사를 지휘하던 카르파가 탄식했다.
피어는 최상위 포식자만이 가지는 능력. 오러나 마력을 가진 이들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악마의 피어에 그대로 노출되어 정신을 놓아 버렸다.
“모두 전장에서 벗어나라!”
지휘관들의 명령에도 군은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이미 제국과 베니에르 병사의 7할이 기절했고 나머지도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올빼미는 병사들을 수습해 뒤로 물러나라!”
“악!”
무무카의 명령에 바이스만의 올빼미만큼은 제대로 대답했다.
다행히 그들은 정신을 잡고 있었다. 조금씩이라도 오러를 깨우친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올빼미들은 서둘러 기절한 연합군 병사들을 챙겨 가며 후방으로 물러났다.
“젠장…!”
기절해 버린 병사들 한가운데서 줄리앙은 입술을 짓씹었다.
악마의 포효에 몸에 힘이 쭉 풀렸지만, 순간적으로 마력을 동원해 어찌어찌 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최상위 포식자의 피어는 의지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또 도망쳐야 하는 건가.’
거대한 악마와 그에 맞서는 레오 일행을 눈에 담으며, 줄리앙은 탄식했다.
마력은 이미 다해 탈진 직전이다. 지휘할 병사도 없다. 설사 마력이 충분했다 해도 도움이 못 되었으리라. 적은 덱스의 콜 라이트닝에 맞고도 멀쩡했으니까.
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 아직 너무도 부족하다.
시오프 산맥에서 한 번 느꼈던 좌절감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있다니, 그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오라버니, 우리도 물러나야 해요.”
“줄리앙!”
줄리앙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였다.
잘근 씹힌 입술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
카르파의 목소리에 눈앞이 뿌옇게 되었다.
고개를 떨군 줄리앙의 걸음 아래 점점이 눈물 자국이 남았다.
* * *
“힘이 넘친다! 뭐 하느냐 덤비지 않고! 아까의 기세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이냐! 크하하핫!”
짐승의 형태가 된 켈시온은 고개를 흔들며 웃더니 목을 쭈욱 앞으로 늘였다.
지지지익-!
이내 뿔 사이에 검은 마력이 뭉쳐 들기 시작했다.
모여든 마력은 이내 검은 전격이 되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콰르릉-!
재빨리 배리어를 펼쳐 막아 낸 덱스.
묵직한 공격에 그의 얼굴도 사뭇 진지해졌다.
“체인 라이트닝인가. 이거 일대일로 붙어도 장담 못 하겠는데.”
켈시온이 뿌린 것은 5서클의 광역 전격 마법, 체인 라이트닝. 덱스도 아직 깨우치지 못한 마법이다.
그의 배리어 뒤에서 빠져나온 레오와 무무카의 얼굴도 함께 어두워졌다.
“병사를 안 물렸으면 죄다 죽어 나갔겠어.”
레오는 오러안을 활성화하여 켈시온을 바라보았다.
일곱 개의 뿔 중에 유독 세 개만 흐름이 달리 보인다. 마치 별개의 생명체를 갖다 붙여 놓은 듯한 어색한 흐름이다.
본체의 핵은 보이지 않는다. 흐름으로 보건대 몸통의 가장 깊숙한 부분으로 추측될 뿐이다.
‘아까 대가를 치르고 격을 높인 것 같다고 했지?’
[맞아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중급에서도 낮은 편이었던 격이 이렇게 단시간에 높아질 수 없어요.]
‘그러면 저 뿔만 잘라 내는 건 어때?’
[쉽지 않을 거예요. 접근하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쉽게 잘려 나갈 리 없어요.”
영혼을 매개로 맺은 계약은 다른 어떤 계약보다도 우선한다.
그만큼 저 상급 악마의 힘은 강하게 켈시온에게 귀속되었을 것이다. 그 계약이자 힘의 상징인 뿔이 그리 쉽게 끊어질 리 없다.
‘그게 제일 자신 있거든.’
여신의 염려와 달리 레오는 자신만만했다.
켈시온의 본체와 뿔의 경계가 확실하게 구분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저 경계면을 노리면 깔끔하게 뿔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지지직-!
그사이 다시 한번 켈시온의 뿔 사이에 마력이 뭉쳤다.
‘그래, 그래서 저 모양이군.’
레오는 마력의 흐름을 관찰하며 확신했다.
저 마법은 켈시온의 것이 아니다. 본체와 관계없이 온전히 뿔 세 개에서 흘러나온 마기로 형성된 마법이었다. 뿔만 잘라 내면 고위 마법을 쓸 수 없을 터.
“덱스, 한 번만 더 막아 줄 수 있겠어?”
“어쩔 셈이야?”
“저 뿔부터 자르려고.”
덱스가 눈썹을 찡그리더니 작게 끄덕였다.
그래, 마법도 파훼하는 레오의 검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막아 내자마자 달려들게? 공격 이후에 반드시 틈이 생긴다는 보장은 없어.”
“그렇다면 미끼도 있는 편이 좋겠군.”
이번에는 무무카가 나섰다.
자청하여 양동작전의 미끼가 되겠다는 것.
“그때 생각나네. 프로인 숲에서 오우거하고 싸울 때 말이야.”
레오가 피식 웃었다.
오우거와 전투는 셋이 덤벼도 열세였다.
덱스가 견제하고 무무카가 시선을 끌며 몇 번이고 치명타를 노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슈니가 목숨 걸고 반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던 싸움이다.
그리고 지금 상대는 그때의 오우거보다 훨씬 더 강할 것이다.
‘상관없어. 우리도 그만큼 강해졌으니까.’
레오도 덱스도 무무카도 그때와 다르다.
캉!
거기에 슈니도 있다.
레오의 의도를 읽은 슈니는 언제든 전속력으로 달리겠다는 듯 앞발을 단단히 지면에 박아 넣었다.
파지지지직-!
다시 한번 켈시온이 뿌린 검은 전격이 번쩍이며 날아들었다.
“온다!”
덱스의 신호에 다들 그의 뒤로 몸을 숨긴다.
전격은 사방으로 퍼졌던 아까와 달리, 레오 일행이 있는 곳에 집중해 일직선으로 뻗어 왔다. 사방으로 퍼지던 체인 라이트닝이 한곳에 집중되었으니 그 위력도 한결 강했다.
쾅-! 쾅-! 쾅-!
다섯 겹으로 두른 배리어가 하나씩 깨져 나갔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