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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110화 (110/127)

110. 축출 (2)

“천년 제국 아슐렌에 영광이 있으라! 카르파 슈멜린이 제국의 태양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파 슈멜린 백작의 목소리가 어전에 울렸다.

함께 어전에 들어선 레오와 줄리앙, 테레사가 차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황제에게 예를 표했다. 긴장한 줄리앙과 테레사에 비해 알현 경험이 있는 레오는 한결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모두 일어나 고개를 들라.”

레오는 이내 얼굴을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옥좌의 황제는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는다. 일전의 차갑고 딱딱하기만 했던 첫인상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다.

어전에 들어선 대신들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극명하게 엇갈려 있다. 누가 황제파이고 누가 후작파인지, 낯빛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당신도 별수 없군.’

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재상도 마찬가지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있는 듯 했지만 굳은 입꼬리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남부를 지배하는 요크 후작의 동생, 재상 아비엘 요크.

중앙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후작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데에는 요크 재상의 역할도 컸다.

‘황제가 단단히 마음먹었다면 가만둘 리 없겠지.’

과도하게 세력이 커진 후작파를 확실하게 누를 기회.

황제가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재상은 아마 그 첫 번째 타깃이 될 것이다.

한편, 여유롭게 어전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레오의 옆에서.

줄리앙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폐하의 앞이다, 폐하의 앞이다, 폐하의 앞….’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전에서 황제를 알현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고개를 들라 했지만 이렇게 황제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아도 되는 것일까?

멀지 않은 곳에 아버지 베니에르 백작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마주친 베니에르 백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줄리앙은 아버지의 모습이 이렇게까지 안심되었던 적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불손한 세력을 물리치고 제국의 안정에 기여한 공훈을 황제의 이름으로 치하하는 바이다. 큰 공을 세운 그대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내려야 할 터.”

황제는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떼면서 가장 먼저 카르파 슈멜린에게 시선을 보냈다.

“슈멜린 공,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제국군 총사령관으로 눌러앉히고 싶다만 그대라면 필시 거절하겠지. 안 그런가?”

“폐하께서 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시니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면 그대가 바라는 것을 기탄없이 말하라.”

카르파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직을 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으로 바라는 것을 말하라니.

문득 눈이 마주친 황제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흥미진진한 얼굴이다.

‘여전히 짓궂으시군.’

황제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만 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걸 감안한 제안이리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카르파는 이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게 감히 청하오니, 신을 황립 아카데미의 말석 교수로 삼아 주십시오. 후학을 기르는 것이 소신의 유일한 보람입니다.”

“…전사 학부장을 맡았던 그대가 말석 교수라니 말이 되는가?”

“한 번 스스로 물러났던 자리입니다. 어찌 다시 그 자리를 탐할 수 있겠나이까.”

“학부장 자리는 다시 받지 않겠다는 건가?”

“황공하오나 받을 수 없습니다.”

황제가 눈썹을 찡그렸으나 카르파는 고집을 물리지 않는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불편한 분위기에 줄리앙은 커다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만 했다.

“그대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는군. 학부장 자리는 정 안 되겠다는 말이렷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여전히 물러날 생각이 없는 카르파의 대답.

황제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렇다면 다른 자리를 만들면 되겠군.”

“…?”

“황립 아카데미에 최고 직위인 총장직을 신설하겠다. 슈멜린 공은 아카데미의 총장이 되어 제국의 후학 양성에 매진하라!”

카르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황립 아카데미는 황실의 직속 기관이다. 사실상 황제 직할이라고도 할 수 있기에 지금까지 아카데미에는 수장의 직위가 없었다.

그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 총장직을 만들었다는 것은 총장에게 황실에 비견되는 권위를 주겠다는 것과 같았다.

“폐, 폐하!”

“학부장 자리가 아니면 된다고 그대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설마 황명을 거역할 셈은 아니겠지?”

“하지만 폐하…!”

“황립 아카데미는 제국의 기둥을 양성하는 중요 기관이다. 앞으로 내가 직접 현황 보고를 받을 테니 총장은 매달 입궐하도록 하라.”

숨길 생각도 없이 당했다는 얼굴을 하는 카르파.

황제는 공식적으로 매달 그를 불러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레오는 극명하게 가린 두 사람의 표정을 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슈멜린 공,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내도록 하지. 이제 토벌 과정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듣고 싶다만.”

이어서 노련하게 주제를 바꾸는 황제.

카르파는 이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켈시온의 군세는 천이백. 용병까지 포함하면 천육백에 달했습니다.”

카르파의 보고가 시작되자 황제는 물론 대신들도 모두 귀를 기울였다.

전령에게 대략적인 소식은 들었으나 전투를 진두지휘한 총사령관의 상세한 보고와는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적 선봉대와 첫 충돌에서 대승을 거둔 장면에서 황제는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어린 나이에 큰 공을 세우다니 참으로 용맹하고 영민하구나.”

“화, 황공하옵니다.”

칭찬받은 줄리앙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베니에르 공은 걱정이 없겠구려. 첫째도, 둘째도 이리 잘 자라 주었으니.”

“과찬이십니다, 폐하. 그저 제 앞가림이나 할 뿐이지요.”

“하하하! 공의 말에 뼈가 있는 것 같군. 하긴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작자들이 한가득이긴 하지.”

크게 웃음을 터트린 황제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후작파 대신들은 그 날카로운 눈빛에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말이 꼭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았으니까.

“선봉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으나 여전히 남은 적은 많았기에, 이어진 전투에서는 열세에 처했습니다. 삼면이 포위당해 패색이 짙던 와중 바이스만 남작이 때맞춰 도착하였습니다.”

“그것은 미리 이야기되었던 것인가?”

“남작은 오래 전부터 켈시온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켈시온의 수하 브뤼쉬와 헤르만이 악마 숭배를 한다는 것을 직접 밝혀낸 이후, 배후에 켈시온이 있으리라 확신하고 제국군과 발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호오, 사실인가?”

황제는 짐짓 놀랍다는 듯 레오를 바라보았다.

직접 밀서까지 내린 당사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저렇게 말하다니, 레오는 그 연기에 감탄하면서 황제의 말에 입을 맞춰 주었다.

“슈멜린 공의 말대로입니다. 일전에 보고를 올렸다시피 켈시온의 수하인 브뤼쉬와 헤르만에서 흑마법사의 본거지를 발견했습니다. 또한 신전에서 파견된 이단 심문관도 켈시온을 주시하고 있었으니 그를 깊이 의심할 수밖에요.”

“그렇군. 그대가 신전의 이단 심문관인가?”

“예, 중급 사제 테레사라 합니다.”

비교적 담담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답하는 테레사.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르파는 말을 이었다.

차원문을 통해 마물이 나타난 장면을 이야기하자 숨을 들이켠 황제는, 마침내 켈시온이 상급 악마의 모습을 취한 부분에서 크게 탄식하며 숨을 토했다.

“…하여, 켈시온이 네발 달린 짐승의 형상으로 변했으니 그 머리에 일곱 개의 뿔이 자라 있었습니다.”

“허어…!”

이때를 기점으로 어전의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황제는 카르파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크게 반응했지만, 후작파 대신들은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악마 숭배라는 것이 켈시온 토벌의 명분이라 여겼던 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에게는 악마의 뿔이 자랐느니, 네발 달린 짐승으로 변했느니, 하는 것이 과해도 너무 과한 이야기였다.

“그 뒤는 제가 설명 드려도 되겠습니까?”

레오가 나서자 황제는 눈빛이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밀서를 전하며 악마 숭배자 토벌을 요청했던 황제다. 황제도, 레오도 그 상대가 켈시온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켈시온은 어떤 대가를 바치고 일시적으로 악마의 격을 높이는 사술을 사용했습니다. 그 대가란 바로 인간의 영혼입니다. 본래 그는 네 개의 뿔을 가진 악마였으나, 전장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영혼을 바치며 일시적으로 더 큰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개의 뿔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레오는 좌중을 둘러보며 숨을 한번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때문에 악마 숭배자들은 일부러 갖가지 사건을 일으켜 왔습니다. 아카데미의 사고, 보르트의 침공, 각지의 반란…. 모두 켈시온을 비롯한 악마 숭배자가 그 배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강한 힘을 얻기 위해 수많은 제국민을 희생시켜 그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며 제국의 안녕을 어지럽혔습니다.”

레오의 시선이 재상에게 향했다.

요크 재상의 낯빛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다. 어리둥절하던 후작파 대신들도 재상의 얼굴을 보고 이것이 단지 허무맹랑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바이스만 남작, 폐하의 앞에서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거요? 장황히 설명하지 않아도 악마 숭배자가 암적인 존재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소. 그런데 지금 하는 이야기는 너무 과하지 않소?”

이때 재무 대신이 나섰다.

일전에 소드 마스터가 된 레오에게 남작 위가 과하다 했다가 핀잔을 받은 후작파의 일원이었다.

“과하다니요?”

“나는 결코 악마 숭배를 두둔하지 않소. 당연히 악마 숭배는 제거해야 할 악이라 생각하오. 하지만 지금 남작의 말대로라면 그 모든 것이 악마 숭배자들의 음모라는 말이지 않소? 영혼을 흡수하여 악마의 힘을 얻었다니, 애초에 악마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이 맞소?”

“물론입니다. 켈시온이 그 악마의 힘을 받아 직접 악마가 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어찌 믿는다는 말이오? 남작은 악마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소? 저잣거리의 광대가 할 만한 이야기를 폐하께 드리고 있으니 내가 어이가 없어 하는 말이오!”

황제는 악마 숭배자라는 혐의로 켈시온에게 토벌령을 명했다. 그런데 제국군은 한술 더 떠 그가 악마 그 자체였다고 말하고 있다.

영혼을 바치고 짐승으로 변했다고? 켈시온의 수급에 달린 저것도 뿔인지 혹인지 알 수 없다.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제 덫에 제가 걸렸구나. 악마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재무 대신은 말을 뱉으면서도 내심 통쾌했다.

이런 상황에서 재무 대신은 악마 숭배에서 악마 그 자체로 논점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악마를 증명할 수 없다면 지금 제국군의 말이 허황된 거짓이나 다름없다. 자연히 황제의 토벌령도 명분을 잃을 것이며 이후 후작파에 대한 공격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도 그렇군요.”

“제국군을 이끈 슈멜린 공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나 그 말을 모두 믿기 힘든 것이 사실이오.”

“사람이 네 발 달린 짐승으로 변하다니, 그것을 어찌 믿어야 할지….”

재무 대신의 속내를 눈치챈 후작파 대신들이 동조했다.

어전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악마를 토벌한 제국의 영웅들이 공적에 취한 거짓말쟁이로 뒤바뀌고 있었다.

“하긴, 사람은 직접 겪지 않은 것은 쉬이 믿지 못하는 법이지요.”

하지만 레오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빙긋 웃어 보이며 대꾸할 따름이었다.

“켈시온에게 영혼을 상납 받던 악마라도 불러내 증언하라하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나는 악마를 불러낼 방법 따위는 알지 못합니다. 악마 숭배자가 아니니까요.”

“되도 않는 말장난을 하지 마시오. 폐하의 앞이오.”

“하지만 여신이라면 증명이 되겠군요.”

“뭐요? 지금 무슨 말을…?”

재무 대신은 미처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레오의 품속에서 성스러운 빛이 일더니 어전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내 음성이 들리느냐.]

직후, 따뜻하고 온화하지만 위엄이 깃든 목소리가 울렸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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