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축출 (3)
레오의 품에서 뿜어진 성스러운 빛과 기운.
이어지는 여신의 음성.
“여신께서 또다시 현현하시다니!”
테레사가 가장 먼저 반응하며 무릎을 꿇었다.
르프람에게 여신의 현현에 대해 들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은 처음이다. 테레사는 앞에 황제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여신의 기적에 기뻐했다.
“아아!”
다음으로 반응한 이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대신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황제는 스스로 옥좌에서 내려와 양손을 모으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은 마치 신실한 사제와 같았다.
‘정녕 여신께서 부활하신 것이구나!’
황제는 젊은 시절 최후의 성녀가 보인 황금빛 기적을 기억해 냈다.
이 빛과 성스러운 기운은 그때보다도 더욱 강렬하다. 이것이 여신의 힘이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이렇게 하면 되나요?’
‘그래, 이왕이면 좀 더 무게감 있게.’
그 성스러운 빛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레오였다.
악마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이것저것 설명해 봐야 안 믿을 놈은 어차피 믿지 않는다. 차라리 여신이 권능을 보이며 신탁을 내리는 것이 빠르고 간단하다.
[과거 마신이 되려 했던 악마가 봉인에서 풀려났다. 이대로라면 다시 악마가 인간계를 위협할 터.]
여신의 음성이 다시 한번 어전에 울린다. 아까보다 한층 위엄을 갖춘 목소리였다.
“악마가 풀려나다니! 바이스만 공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어…!”
“여신이시여, 어리석은 이들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여전히 혼란에 빠진 대신들이었으나 여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피식자가 포식자를 만나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듯, 이들도 여신의 빛과 음성이 거짓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레오는 어전 가운데서 좌중을 둘러보고는 여신에게 물었다.
‘혹시 이곳에 악마의 기운을 가진 이는 없나?’
지극히 재상을 의식한 질문이었다.
‘악마의 힘을 직접 얻은 자는 없어요. 하지만 저자에게서 사특한 기운이 느껴지는군요. 아마도 악마와 관련된 어떤 물건을 지니고 있는 듯해요.’
여신이 가리킨 이는 역시 재상 아비엘 요크.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래, 알았어. 힘은 이제 갈무리해도 좋을 것 같다.’
[레오 바이스만, 나의 대리자여. 그대는 반드시 악마 게르베의 부활을 저지하고 인간계를 구해 내야 할 것이다.]
여신의 마지막 음성과 함께 어전을 채운 빛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에도 사람들은 은은하게 남은 성스러운 기운에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게다가 여신의 마지막 말은 그들의 뇌리가 강하게 남았다.
‘바이스만 남작, 그가 여신의 대리자라고…?’
특히 재무 대신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지금껏 그의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했다.
그런데 여신이 직접 존재를 드러내다니!
그것도 그를 대리자라 지칭하면서까지!
여신이 직접 악마의 존재를 공언하기까지 했으니 이제 이견을 낼 여지가 없었다.
“여신께서 친히 나아갈 바를 일러 주셨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윽고 몸을 일으킨 황제가 외쳤다.
좌중을 둘러보니 아직까지 벅찬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다. 그중 유독 창백한 낯빛을 한 이가 있었으니 재상 아비엘 요크였다.
레오가 그를 바라보며 입을 떼었다.
“폐하, 여신께서 이르시길 지금 이곳에 악마를 따르는 이가 있다 하셨습니다.”
“지금 이곳에 악마의 하수인이 있다는 말인가? 그자가 누구인가! 당장 처단해야 할 것이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처단하겠습니다.”
“여신께서 그대를 대리자라 칭하셨으니 황제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그대는 여신께서 원하는 바를 자유로이 행하라!”
레오가 손을 내밀자 테레사가 성법구를 쥐여 주었다.
황제 알현이니만큼 모두 무기를 소지할 수 없었지만 테레사의 성법구만큼은 예외였다. 실제로 겉보기에는 그저 짧은 막대에 불과했기에 무기로 보이지도 않았다.
레오가 성력을 주입하자 두 뼘 길이의 성법구가 흡사 몽둥이 크기로 확대됐다.
“아비엘 요크, 달리 할 말이 있는가?”
황금색 몽둥이를 들고서.
레오는 아비엘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어쩌다가 이리된 것이지?’
아비엘은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굴렸다.
켈시온 백작이 토벌당한 것은 의외였지만 이렇게 빠르게 위기를 맞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을 따르는 후작파 귀족들은 여전히 많다. 그 중 몇을 골라 세력을 키워 주면 켈시온의 역할을 충분히 대신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모든 것이 틀어졌다.
갑자기 등장은 여신의 빛과 음성은 거짓이 아니었고 여신의 대리자는 자신을 콕 집어 악마의 하수인이라 했다.
[중앙에서 네 역할이 중요하다. 만약 뭔가 일이 생기면 이 구슬을 삼키거라.]
아비엘은 가슴 속에 숨겨진 목걸이가 기억났다.
위기의 순간에 사용하라며 요크 후작이 보내 준 마도구.
‘이런 때를 위한 것이었나!’
어떤 물건인지 듣지 못했다만 분명 위기를 벗어나게 해 주는 마도구일 것이다. 어쩌면 남부의 요크 후작의 성까지 순간 이동이라도 시켜 줄지 모른다.
아비엘은 망설이지 않고 목걸이에 붙어 있던 작은 구슬을 삼켰다.
레오가 미처 접근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음?”
아비엘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기대했던 순간 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몇 초 후 복부에서 강한 통증이 일었다.
“크헉…!”
아비엘이 몸을 꺾으며 신음을 토했다.
괴로운 듯 몸을 뒤틀며 컥컥거리던 그가 곧 양손으로 제 목을 부여잡았다.
새하얀 피부 아래 여기저기에 푸른 혈관이 툭툭 튀어나오더니, 창백했던 얼굴빛이 어느새 푸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재상? 괜찮으십니까?”
괴로워하는 아비엘의 모습에 재무 대신이 재빨리 달려가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푹-.
살을 꿰뚫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재무 대신의 외마디 신음이 울렸다.
“커헉….”
재무 대신의 등에 검은 촉수가 돋아나 있었다.
그의 가슴과 등을 관통한 촉수가 뱀처럼 움직이더니 이윽고 그의 뒷목에 달라붙었다.
“끄으으윽…!”
재무 대신의 얼굴과 손이 삽시간에 쭈글쭈글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소 통통했던 그의 몸은 수 초 만에 마른 껍질처럼 변했다. 마치 모든 생명력을 빼앗겨 껍데기만 남은 형상이었다.
툭.
뼈와 가죽만 남은 재무 대신의 몸이 풀썩 바닥에 넘어진다.
아비엘과 연결된 촉수는 다음 먹잇감을 찾기라도 하는 듯 허공에 바짝 선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고.
주우욱-!
또 하나의 새로운 촉수가 아비엘의 등에서 돋아나 허공에 자리 잡았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중년이었던 아비엘은 어느새 흐느적거리는 촉수를 가진 푸른 피부의 마물이 되어 있었다.
“마, 마물이다!”
“뭣들 하느냐! 폐하를 보호하라!”
근위병들이 창검을 꺼내 들고 황제의 주변을 감쌌다.
어느새 검을 하나 받아 든 카르파도 황제의 곁을 바짝 지켜 섰다.
쉬이익- 푹-!
어느덧 두개로 늘어난 촉수가 각각 누군가의 목에 머리를 박아 넣었다. 희생양이 된 둘도 재무 대신처럼 후작파의 일원이었다.
“악마의 힘을 부여하는 마도구인가?”
레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이제 마물이 되어 버린 아비엘을 바라보았다.
마도구를 통해 악마의 힘을 부르는 광경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이번 경우는 본인도 스스로 마물이 될지 예상 못 했던 것 같지만.
[그저 마물일 뿐, 악마의 격에도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에요.]
여신의 말대로라면 하나의 뿔을 가졌던 듀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비엘 요크, 네 상대는 여기다.”
레오는 망설이지 않고 아비엘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명의 생기를 빨아들이고도 성에 차지 않은 듯 다음 목표를 찾아 공중에서 흔들거리던 촉수가 레오를 향했다.
쉬이이익-!
정면으로 쇄도해 오는 검은 촉수.
‘악마에 미치지 못하는 격이라는 게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오러를 다루는 전사, 그것도 소드 마스터인 레오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속도다.
촤악-!
오러의 예기를 담은 성법구가 하나의 촉수를 갈라 낸다.
그대로 아비엘에게 접근한 레오는 또 다른 촉수가 접근하기도 전에 그의 상반신을 가로로 길게 베었다.
크에에에엑-!
짐승의 비명이 울리며 양단된 아비엘의 몸뚱이가 넘어졌다. 그러자 하얀 대리석 바닥에 검붉은 꽃이 피어났다.
[아직이에요!]
여신의 다급한 목소리.
힘을 갈무리하려던 레오가 반사적으로 오러안을 발동했다.
아비엘을 몸속에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용수철처럼 몸을 압축하더니 이내 레오를 향해 튀어 올랐다.
“치잇!”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피해 보려 했으나 이미 늦은 상황.
레오는 성력을 주입한 손을 들어 반사적으로 그것을 막아 냈다.
끼에에에엑-!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검은 벌레.
레오의 손아귀에 잡힌 한 뼘 길이의 벌레는 활어처럼 퍼덕거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거렸다.
‘마치 기생충 같군.”
[기생 마물의 일종이에요.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점점 성장하는 타입이죠.]
‘아비엘이 삼킨 게 이것이었나?’
[본인은 몰랐던 모양이지만요.]
퍼석.
벌레가 레오는 손아귀에서 터졌다.
검은 체액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혹시 몰라 오러안으로 아비엘의 사체를 다시 한번 확인했지만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없었다.
“이제 안전합니다.”
아래로 손을 휘둘러 검은 체액을 털어 낸 레오.
어전은 여전히 고요했다.
마물로 변한 재상. 그에게 희생당한 대신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악마의 존재를 부정할 이는 더 이상 없었다.
* * *
어전의 분위기가 수습된 후 논공행상이 이어졌다.
카르파 슈멜린에 대한 건이 끝났으니 다음은 바이스만과 베니에르의 차례.
“바이스만과 베니에르는 제국군을 도와 직접 악마에 맞서며 충성과 희생을 보였다. 나 바란은 황제의 이름으로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황제는 잠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당초 이들의 포상에 대해 대신들의 논의가 끝난 바였으나, 황제는 그것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바이스만 남작에게 헤르만의 영지를 하사하겠다.”
레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황제 직할령으로 귀속되었던 헤르만령을 그대로 포상으로 주겠다니. 단순히 영지의 크기만 보자면 지금 바이스만령과 비슷한 곳이다. 레오의 영지가 두 배로 뻥튀기 된다는 뜻이었다.
파격적인 포상이었으나 반대하는 대신은 없었다.
“또한 베니에르 백작을 새로운 제국의 재상으로 삼겠다. 제 영지의 반란을 제압하자마자 제국군에 합류한 베니에르의 충성은 더 말할 것도 없는 바, 천년 제국을 위해 재상 베니에르는 충언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공석이 된 재상직도 금방 채워졌다.
본래라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을 후작파 대신들도 찍소리 하지 못했다. 켈시온에 이어 재상 아비엘 요크까지 목이 날아갔으니 후작파의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은 모두 사라진 것이다.
“직접 군을 이끈 줄리앙 베니에르에게는 금화를 내려 공을 치하할 것이며….”
가문의 공을 고려한 재상직이었다.
줄리앙의 포상은 금화에 그쳤지만 정작 본인에게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베니에르와 함께 싸운 브루델과 저메인에게도 각기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내리겠노라.”
오히려 두 친구, 파블로 저메인과 니앙 부르델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줄 생각에 기뻐했다.
지금껏 둘의 아버지는 세습할 수 없는 준남작 작위로 베니에르령의 일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이제 두 사람이 남작의 작위와 영지를 받으면서 엄연한 영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각지에 신전을 세울 것을 명한다. 각 백작령은 의무적으로 하나 이상의 신전을 세우고 여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도록 하라!”
제국 곳곳에 신전을 세우라는 칙명을 떨어졌다.
이와 별개로 금화까지 두둑하게 받아 내자 테레사의 입도 귀에 걸렸다.
모든 논공행상이 끝나고.
황제는 레오를 따로 불러 만남을 가졌다.
“승산은 있겠는가?”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황제가 무겁게 입을 뗐다.
재상 아비엘과 켈시온 백작은 남부의 요크 후작이 중앙 대륙에 영향력을 보이는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 둘이 제거되었으니 후작이 가만있을 리 없다.
“승산은 고려할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승리해야 하는 싸움이지요.”
이는 단순히 대륙을 다투는 전쟁이 아니다.
여신 아메리아의 대리자 레오.
악마 게르베의 하수인 요크 후작.
백여 년 만에 재개된, 여신과 악마의 싸움이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