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2황자 크롬멜 (2)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레오의 생각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한 채, 마르킨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정해진 위치의 책 세 권을 차례로 뽑으면 책장이 움직이며 비밀 공간이 나타난다. 하지만 강제로 통로를 열려 하면 침입자로 간주하고 저주가 활성화된다.
어느 날 마르킨을 서재로 부른 아비엘이 직접 알려 준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방법을 밝힌다면 내가 아비엘과 공범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대로 서재를 나서면 뭔가 단서가 나올 때까지 다른 이들과 함께 의심받을 것이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레오가 서재를 빠져나가려는 듯하자 더욱 조급해졌다.
입술을 물던 마르킨은 결국 레오를 불러 세웠다.
“남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으며 레오가 무심하게 물었다.
“할 말이 있나?”
“서재로 들어가셨다고 생각한 주인님이 가끔 다른 곳에서 나타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확실하지 않아 말씀드리기 주저되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이 방이 수상합니다!”
마르킨의 눈동자가 부르르 흔들렸다.
열심히 짜낸 거짓말치고는 허술하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정도였기에.
레오는 그 표정을 못 본 척하며 물었다.
“그 말은 이 방에 비밀 공간이나 통로가 연결되었다는 뜻이냐?”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구나.”
뚜벅, 뚜벅.
서재를 휘 둘러 걸은 레오가 이내 책장 앞으로 다가갔다.
“병사들이 모든 벽과 바닥을 확인했다. 남은 곳은 이 책장뿐. 나도 여기가 의심스러웠다. 꼭 이 뒤편에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스릉.
책장을 통째로 베어 내겠다는 듯 레오가 검을 빼 들었다.
그 광경에 마르킨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냥 부수면 분명 저주가 내려질 텐데…!’
마르킨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남작을 말리지 않으면 저주가 발동될 것이다.
어떤 저주일지는 모르나 책장을 부순 당사자를 포함해 서재 전체 인원이 휘말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남작을 말리면 자신이 관련자임을 실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차라리 혼자 죽자.’
마르킨은 결심했다.
소드 마스터인 바이스만 남작은 제국에서도 분명 귀한 몸이다. 황제 폐하의 신임도 듬뿍 받고 있겠지. 그런 인물이 저주에 걸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다고 해도 자신이 악마 숭배자를 도운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저택의 다른 이들 고초를 겪을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마르킨의 몸은 이미 레오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남작님, 이 책장을 부수면 저주가 나타날 겁니다. 제가 무사히 여는 법을 알고 있으니 제게 맡겨 주십시오!”
레오는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로 마르킨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흑마법사를 비롯한 여러 악마 숭배자를 상대했다. 저주 정도는 이미 예상한 범위다. 애당초 여신의 성력이 있기에 웬만한 저주는 통하지도 않겠지만.
“너는 지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의 비밀을 아는 것은 저 하나뿐입니다. 제가 주인님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습니다. 잘못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도중에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시종들은 아무것도 모르니 부디 제 목숨만 취해 주소서!”
울면서 머리를 조아리는 마르킨.
레오는 그의 앞에 몸을 굽히며 물었다.
“…왜 지금 실토한 거지?”
궁금했다. 이자가 여느 흑마법사 같은 놈이었다면 저주가 발동되도록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막아선 거지? 그것도 자신의 죄를 실토하면서까지.
‘…설마 내가 저주에 걸리는 것이 걱정되어서?’
레오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이유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어지는 마르킨의 말에 레오의 표정이 더욱 이상하게 변했다.
“남작님은 제국의 보물 아니십니까…. 제가 못 배운 놈이지만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정도는 압니다. 그런 분에 저주에 당하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 가는 마르킨.
이제 살 길이 없다고 체념했는지 모든 걸 내려놓은 목소리였다.
‘이놈, 지금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요? 제게 사실과 거짓을 판독하는 능력은 없지만 적어도 이 남자는 진심으로 느껴져요.]
어라? 이러면 족칠 수가 없는데?
아비엘의 하수인으로 악독한 짓을 도맡아 하는 녀석이 아닌가도 생각했다. 얕은 수를 쓰는 것이 보여 어떻게 하나 지켜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죄를 실토한다고?
고개를 좌우로 까닥 움직인 레오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가 아는 방법으로 통로를 열어 보아라.”
“예엣!”
마르킨이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소매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닦고 서재 한쪽에 쌓인 책을 몇 권 들었다. 그 책들을 책장에 다시 꽂더니 어떤 순서로 다시 뽑아낸다.
덜컹- 구구구궁-.
그러자 작은 진동음과 함께 책장이 스르르 옆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법한 크기의 통로가 나타났다.
“비밀 통로다!”
병사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힘들게 저택을 수색한 끝에 드디어 비밀 공간을 발견한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혹여 저주가 있을지 모르니.”
레오의 말에 병사들은 긴장한 얼굴로 제자리를 지켰다.
저주가 발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오러안으로 알고 있다. 그저 마르킨을 더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킨, 네가 들어가라.”
“예.”
마르킨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작은 등불을 준비하더니 곧바로 통로 입구로 걸어 들어간다.
‘함정으로 이끌려는 꿍꿍이가 있는 것도 아닌 건가?’
레오는 고개를 갸웃하며 마르킨의 뒤를 따랐다.
혹여 뒤통수를 치려는 의도인가 해서 떠봤는데 그런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아까 마르킨의 눈물이 거짓이 아니라는 쪽에 더욱 무게추가 실리게 된다.
[좀 믿어 보시는 건 어때요?]
‘시끄러워, 사람을 믿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책장 뒤로 이어진 비밀 통로는 곧바로 아래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을 조금 내려가자 레오의 눈에 뭔가 보였다.
‘마도구인가.’
오러안에 보이는 마력 장치.
저것이 그 저주 발동 마도구일지도 모르겠다.
만약 마르킨이 뒤통수를 치려했다면 저 마도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는데, 마르킨은 마도구의 존재도 모르는 듯 터벅터벅 내려갈 뿐이었다.
계단은 깊었다.
오른쪽으로 몇 번이나 꺾어지며 줄곧 아래로 향하는 계단.
아비엘의 서재는 저택 3층이었으나 지금 내려온 거리를 이미 지하에 진입했다고 봐도 충분했다.
“남작님, 이제 계단이 끝나갑니다.”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예, 정확히 말씀드리면 계단이 끝나는 이곳까지만 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각종 도구를 여기까지 나르곤 했으니까요.”
계단 옆에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곳에 아비엘에 요구한 것들을 가져다 놓았던 모양.
“이 안쪽으로는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함부로 들어오면 저주를 내리겠다고 하시면서요….”
“그렇군. 이제 내가 앞장서겠다.”
“저, 정말이십니까?”
앞장서겠다는 말에 놀라는 마르킨.
그에 레오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설마 내가 너를 저주받이로 쓴다고 생각했나? 그럴 일은 없다.”
직선으로 이어진 통로는 아까보다 넓었다.
검을 꺼낸 레오는 오러 소드의 푸른빛에 의지해 앞으로 걸어 나갔고, 그 뒤를 마르킨이 따랐다.
직선 통로를 중심으로 양옆에서 군데군데 공간이 나타났다. 각각의 공간은 하나의 작은 방과 같았다.
제단이 놓인 공간.
각종 흑마법 재료와 서적이 놓인 공간.
또는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당장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였기에, 레오는 빠르게 통로를 가로질렀다. 통로 끝을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에.
‘뭔가 있다. 사람인가?’
통로의 끝에 무언가 있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통로 끝, 레오는 오러안에 비치는 존재가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꼭 사람처럼 보이는 에너지의 흐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미약하게 이어지는 그것의 정체가 사람이라면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타다닥-!
통로 끝으로 향하는 레오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2황자 크롬멜 드메이르 폰 아슐렌.
그는 한때 1황자 슈나이더와 황태자의 자리를 다투었다.
후작파의 지지에 힘입어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낸 크롬멜이었지만, 5년 전 슈나이더에게 밀려 황태자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럼에도 후작파는 여전히 그를 황태자로 추대한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크롬멜은 황태자 슈나이더와 대비되는 점이 많았다.
당장 성격부터 판이했다. 매사 신중하고 상대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슈나이더와 달리, 크롬멜은 행동력이 강하고 대담하다는 평을 받았다.
물론 거기에는 신중함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포함했다. 실제로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그의 성정을 염려하는 이들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때를 기점으로 2황자는 변했다.
자신감을 과시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황자 슈나이더가 황태자에 책봉된 충격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2황자의 변화는 긍정적인 평가를 낳았다. 자신의 단점을 보완한 모습을 보이며 여전히 후작파의 중심이 되어 준 것이다. 이후 그는 황궁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세간에서 말하는 2황자의 근황이었다.
“남작님, 시체가 있습니다!”
마르킨의 놀란 목소리가 어두운 통로를 울렸다.
통로 끝 녹슨 철창.
안쪽에 놓인 더러운 침대에 비쩍 마른 젊은 남자가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시체가 아니다. 아직 살아 있어.”
“그, 그렇습니까?”
쌔액쌔액-.
미약한 숨소리와 얕게 남자의 가슴이 들썩인다.
겨우 숨이 붙어 있는 상태다. 사실 시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서걱-.
레오의 오러 소드가 부드럽게 철창을 베었다.
침대 옆에는 비쩍 마른 빵 조각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물 잔이 존재했고, 안쪽 구석에는 용변을 보는 용도인지 구린내가 나는 항아리가 놓여 있다.
말 그대로 지하 감옥이었다.
‘이 문양은?’
레오는 남자의 옷소매를 주목했다.
같은 옷을 입고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는지, 손목이 훤히 보일 정도로 옷소매가 짧다. 그 낡고 더러운 소매 끝에 새겨진 것은 분명히 황가의 문양이었다.
‘설마…!’
레오는 직감했다.
아비엘의 지하 감옥에 감금된 이 남자가 2황자 크롬멜일지 모른다고.
5년 전 황태자 책봉 이후.
2황자의 성격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제국에 파다했다.
수많은 소문이 돌았다. 황태자 경쟁에서 밀려난 2황자가 충격을 받아 변했다는 설부터, 진짜 2황자는 죽었고 후작파가 대역을 세웠다는 이야기까지… 그 종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연히 태반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됐고, 당시 레오도 깊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가짜 황자설이 정말일지도 모르겠군.’
레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