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2황자 크롬멜 (3)
“마르킨, 여기에서 본 것은 비밀로 해라.”
“물론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마르킨도 눈치가 없지 않다. 그동안 직접 가져다준 음식이 이 남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보통 사람일 리 없다. 무려 제국의 재상이 비밀리에 감금하고 손수 돌본 이가 아닌가.
까딱 잘못하면 바로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르킨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버렸다.
“…아비엘의 목소리가 아니구나. 너희는 누구냐?”
남자에게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워낙 작고 힘없는 음성이었기에 귀가 밝은 레오만이 명확히 들을 수 있을 정도.
레오는 몸을 굽혀 남자의 귀에 입을 가까이 했다.
“아비엘은 죽었다. 당신은 누구지?”
“…놈이 죽었구나, 이제야.”
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자신을 감금한 자가 죽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감금되었는지 모르나, 이제야 구출되었다는 안도감에 감정이 북받친 듯 했다.
잠시 흐느끼는 것 같던 남자의 마른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크롬멜 드메이르 폰 아슐렌. 제국의 황자다.”
이어진 대답에 레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말로 2황자였군.’
추측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왜 아비엘은 2황자를 감금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다면 지금 황궁에 있는 2황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황자의 안전부터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바이스만 남작입니다. 아비엘은 악마 숭배 혐의로 죽었습니다. 황자 전하, 일단 이곳을 나가시지요.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내 몸을 일으켜 주겠나.”
레오는 순순히 황자의 몸을 일으켜 앉혔다.
어찌나 앙상한지 뼈밖에 잡히지 않는 몸이다. 황자는 레오의 손이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렸다.
“상의를 벗겨 주게.”
더러운 상의를 잘라 냈다.
옷을 걷어 낸 황자의 몸을 보고, 레오는 침음을 흘렸다.
“이건….”
갈비뼈가 두드러질 정도로 마른 몸.
그 위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문양이 가득 그려져 있었기에.
“아비엘은 내 몸에 수많은 저주를 심었다. 이 저주들은 매순간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지.”
황자는 힘겹게 숨을 토한 후 말을 이었다.
“하루 중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아마 곧 의식을 잃겠지. 나를 살리려면 이것부터 해결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알아들었습니다.”
“맡기겠다. 내 목숨은 이제 남작에게 달렸으니….”
황자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더니 이윽고 힘겨운 숨소리만 남았다.
레오는 침대 시트로 의식을 잃은 황자의 몸을 둘둘 말아 안아 들었다. 더러운 시트였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자는 그릇인 것 같군요.]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는데 여신이 말을 건넸다.
‘그릇이라니, 무슨 말이지?’
[악마 게르베, 놈이 현신할 그릇이요. 제가 성자의 방울을 매개로 하여 인간계에 현신하는 것처럼, 놈 또한 적당한 매개가 있다면 훨씬 손쉽게 인간계에 나타날 수 있어요.]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게르베가 지금껏 숨을 죽인 것은 최대한 힘을 온존할 수 있는 그릇을 만들기 위함이었나.
[저 문양 하나하나에 저주가 실려 있어요. 남자의 몸은 저주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군요.]
여신이 성자의 방울을 활용하는 것처럼, 악마도 마기와 저주에 찌들수록 매개체로 사용하기 좋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황자의 목숨을 붙여 놓은 채 온갖 저주를 부여하는 것이 아비엘의 임무였을 터.
‘…그러면 황자가 죽는다면 어떻게 되지?’
계단을 오르던 레오의 발이 멈칫했다.
황자가 악마의 그릇이라면.
공들여 준비한 그릇이 사라지면 악마는 발목을 잡히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황자를 제거한다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황자의 몸은 온갖 저주가 덕지덕지 들러붙은 폭탄과 같아요. 섣불리 건드렸다가 단번에 저주가 해방되면 수습할 길이 없어요.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해주하는 것이 최선이에요.]
레오는 납득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계단을 밟아 올랐다.
이 자리에서 황자를 죽인다는 선택지로 고민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었다.
* * *
레오는 비밀리에 크롬멜을 황궁 한구석의 빈 성에 들이고 황제에게 기별을 전했다.
일반적인 제국의 신하였다면 불가능했을 일. 황제가 여신의 대리자인 레오에게 황족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었기에 가능했다.
“…믿을 수가 없다. 정말 이 남자가 내 아들 크롬멜이란 말인가?”
이윽고 도착한 황제는 침대에 앙상한 몸으로 누워 있는 황자를 보며 침음을 뱉었다.
친아들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황제는 이미 손을 떨며 황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폐하.”
“그렇다면 지금 황궁에 있는 그자는 무엇인가? 내 아들 행세를 하는 그놈은 도대체…!”
비쩍 마른 황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황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부들부들 목소리가 떨렸다.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아비엘과 지금까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황자 전하의 안위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전하의 몸에는 수많은 저주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부터 하나하나 해주해야 합니다.”
“저주라니…? 아아아…!”
그제야 황제는 이불을 들추어 아들의 몸을 확인했다.
상반신 가득 그려진 짙은 문양 하나하나가 저주라는 것을 깨닫고는 몸이 무너져 내렸다.
“폐하.”
레오는 황제의 몸을 부축하며 말을 이었다.
“워낙 급박한 사안이라 독단으로 결정한 것을 용서하소서. 테레사 사제와 상의해 이미 신전의 부교주 르프람을 불렀습니다. 그에게 해주를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일단 여신의 성력으로 저주의 진행을 막고 있지만 언제 급변할지 모른다.
엉킨 실타래를 풀 듯 복잡하게 쌓인 저주를 하나하나 해주해야 한다. 그리고 르프람은 신전의 사제 중에서도 가장 저주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하겠다. 공이 아니었다면 내 아들은 아직도 지하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테니.”
황제는 고통스럽게 숨을 토해 냈다.
황태자 책봉 이후 2황자의 움직임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등에 업고 혹시나 잘못된 선택을 하면 어쩌나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하지만 2황자는 오히려 조용한 행보를 보였고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2황자의 평소 성정을 생각하면 그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차라리 진탕 술에 취해 불손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러려니 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저 다행이라 여기며 납득했다. 그때 의심을 가졌다면 아들은 이토록 오랫동안 고통받지 않았으리라.
“황자궁으로 가야겠다.”
혼란과 자책에 물들어 있던 황제의 눈빛이 서서히 변했다.
“아들 행세를 하고 있는 그놈의 목을 베고 창자를 잘근잘근 씹을 것이다. 내 아들이 겪은 고통을 수십 수백 배로 갚아 주고야 말겠다. 함께 가겠는가?”
“물론입니다.”
그자가 인간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테니까.
레오는 마지막 말을 삼키며 거칠게 앞서 걷는 황제를 따라나섰다.
* * *
“폐하!”
2황자궁에 기별도 없이 황제가 도달하자 황자궁의 시종들이 바삐 움직였다.
“황자는 어디에 있는가!”
“기별을 전하러 갔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 내 직접 걸음할 테니!”
황제의 외침에 시종은 겁에 질려 떨며 답했다.
최근 몇 년간이나 직접 2황자궁을 찾은 적 없었던 황제가 갑자기 찾아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게다가 황제는 물론 그와 함께 온 남자도 어째서인지 검을 차고 있다.
그들에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기세에 시종은 불안함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께서는 지금 별채에 계십니다.”
답을 들은 황제와 레오는 곧바로 움직였다.
별채에 도달하자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황자의 모습이 보인다.
햇볕을 즐기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모습.
과거의 크롬멜이라면 절대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성큼성큼 들어서는 황제의 뒤에서 시종이 기척을 냈다.
그제야 황자의 눈이 책에서 떨어졌다.
“폐하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간략히 예를 보이며 차분히 물어 오는 황자.
당장이라도 불을 토해낼 듯 붉게 달아오른 황제의 얼굴과 대비되는 나긋한 목소리였다.
‘확실히 슈나이더와는 다른 이미지로군.’
나이는 어리지만 제 형에 비해 선이 굵은 얼굴이다.
2황자의 푸른 눈동자가 황제와 레오를 순서대로 향했다.
동시에 그를 응시하던 레오의 눈썹이 이내 일그러졌다.
‘역시 인간이 아니구나.’
오러안을 통해 바라보자 단전을 중심으로 전신에 퍼지는 에너지 흐름이 나타났다.
심장을 통해 피를 순환하는 생명체라면 보일 수 없는 형태. 오히려 핵을 가진 부정형 몬스터나 마물에 가깝다.
“이리로 앉으시겠습니까?”
자연스럽게 황제에게 자리를 권한다.
황자의 행세를 하는 그것은 아직 적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
레오는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날카롭게 감각을 세운 채 황제의 옆을 지켰다.
“모두 물러가라.”
황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황제가 명했다.
시종들이 모두 물러가자 햇볕이 잘 드는 별채에 세 사람만 남았다.
“네놈의 정체는 무엇이냐.”
마치 짐승의 울음과 같은 거친 음성.
황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상대는 곳곳에 눈과 귀가 있다는 황궁에서 5년이나 황자 행세를 한 존재다. 가짜에게 속았다는 분노도 컸지만 놈이 어떤 존재인지도 알고 싶은 욕망도 컸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묻는 황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순진무구한 눈망울과 표정이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하다.
그래서 더욱 이질적이다. 황제는 눈앞의 존재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며 또한 인간마저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스릉-!
황제는 결국 검을 뽑았다.
“네놈은 마물인가? 말하라, 어째서 내 아들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아아….”
황자의 얼굴이 조금 뒤틀렸다.
눈썹과 눈꼬리가 아래로 쳐지는가 하면, 입매는 기쁜 듯이 솟아오른다. 뒤늦게 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모두 감출 수 없었다.
[마기가 느껴지지 않아요. 마물은 아니에요.]
여신이 레오에게 알렸다.
인간도 아니고 마물도 아니다. 그렇고 요정이나 정령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몬스터인가?
“네놈은 무엇이냐 물었다!”
“아비엘은 죽었다. 놈이 감금하고 있던 황자 전하도 구출됐다. 다 끝났다는 말이다.”
반복되는 황제의 질문.
레오는 아비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황제의 곁에 나섰다. 놈이 갑작스럽게 공격하더라도 황제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비엘이 죽었다고? 정말인가? 정말로 아비엘이 죽어 버렸나?”
처음으로 놈이 제대로 반응했다. 하지만 황제의 물음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황자의 부드럽고 나긋한 음성으로 시작된 목소리는 말하는 동안 점점 변질되었다. 마지막에 들린 것은 마치 쇠가 갈라지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것은 이제부터 황자의 연기를 그만두겠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놈이 나를 능멸하는구나!”
황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푹.
황제의 검이 아직 황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의 가슴을 찔렀다.
치이이익-!
꿰뚫린 몸통에서는 붉은 피 대신 연기가 피어 올랐다.
“키이익-! 드디어 해방이야!”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인지 말하라. 아비엘이냐? 아니면 크라젠이더냐? 누가 네놈에게 황자의 행세를 하라 명했나!”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자유야!”
황제는 핏발 선 눈으로 다시 한번 놈을 다그쳤지만, 그것은 물음에 답할 생각도 없는지 제 할 말만 할 뿐이다.
황제는 으드득 이를 갈며 검을 더욱 깊게 쑤셔 넣었다.
“말하라 했다!”
스으윽-!
순간 놈의 신체가 일렁이는가 싶더니 옆으로 움직였다.
몸을 관통한 황제의 검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치 액체처럼 부드럽게 빠져나간다.
“…!”
황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완전히 잃은 질척한 진흙 덩어리 같았다.
놈이 입고 있었던 의복이 황제의 검에 걸려 있다가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이미티!”
레오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흉내쟁이 이미티.
2황자 크롬멜의 모습을 하고 황궁에 머물러 있던 몬스터의 정체였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