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115화 (115/127)

115. 2황자 크롬멜 (4)

[내 말에 복종하라. 종속의 계약을 받아들여라. 따르지 않으면 네 육신은 사라지고 정신은 영영 고통받으리라.]

오늘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서워.’

어두운 통에 갇힌 이미티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남자는 통에 갇힌 이미티에게 종속의 계약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고, 이미티는 계속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이래도 나를 따르지 않을 셈이냐? 이대로 땅 속에 묻히고 싶으냐?]

매일 남자는 속삭였다.

때로는 무섭게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달래기도 했지만 내용은 같았다.

계약을 맺고 자신의 종이 되라는 것. 당연히 받아들이기 싫었다.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어느 날, 숲에서 인간에게 사로잡혔다.

숲의 포식자 중 하나인 회색 늑대의 형태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실수로 인간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이미티는 본래 통각에 둔감하다. 핵만 다치지 않으면 되었기에 뾰족한 창에 찔린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땅속 깊은 구멍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함정을 찾아와 이미티를 발견한 인간은 크게 놀라 돌아가더니 며칠 후 다른 인간들과 함께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통에 갇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몬스터지? 슬라임은 아닌 것 같은데.]

[이 숲에서 20년 가까이 사냥을 했지만 이런 놈은 본 적이 없어. 자작님께 바치면 포상을 주시겠지.]

사냥꾼의 손에서 브뤼쉬 자작에게.

브뤼시 자작에게서 켈시온 백작에게.

그리고 아비엘의 손에 도달한 것이다.

‘배고파….’

몇 개월이나 답답한 통에 갇혀 있었다.

통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먹을 것을 받았는데, 스프나 옥수수 같은 때도 있었고 동물의 피를 넣어 준 적도 많았다.

[마지막이다. 또다시 거부한다면 그대로 굶겨 죽이겠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남자의 말에 이미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리적 고통에 둔감하다지만 죽음을 거부하는 것은 본능이다.

지난 번에도 굶겨 죽이겠다며 한동안 먹을 것을 주지 않은 적이 있다. 제발 먹을 것을 달라며 빌었지만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힘이 없어 더 이상 목소리도 나오지 않을 때쯤 남자가 다시 계약을 들먹였다. 이미 까무룩 정신을 잃어 가던 차였다. 당황한 남자가 부랴부랴 음식을 넣어 주고, 본능적으로 그것을 흡수하고 나서야 겨우 목숨을 건졌다.

너무도 무서웠다. 또다시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게….”

결국 이미티는 아비엘이 제안한 종속의 계약을 받아들였다.

* * *

인간은 아직 몬스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진 고블린처럼 발에 채는 놈들이 아니면, 그들의 생활이나 습성에 대해 아직 파악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이미티도 베일에 싸인 몬스터 중 하나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대상을 흉내 낼 수 있다는 것.

의태(擬態)를 한다는 점에서 미믹이나 도플갱어와 닮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셋 다 차이점이 있다.

미믹은 빛을 싫어하고 수면 시간이 길다. 평소 수면 상태에 있다가 자극을 받으면 활동성을 보인다.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보물 상자 등으로 위장하여 인간이나 고블린 등을 꾀어내어 공격한다. 의태가 가능한 몬스터 중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도플갱어는 몬스터 중에서도 지능이 높은 편이다. 그만큼 어느 무리에 섞이면 발견하기 쉽지 않다.

대상의 겉모습을 정교하게 따라할 수 있지만 본래 체구를 크게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른 수준으로 자란 도플갱어가 아이로 의태하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미티는 활동성이 높으며 크기 변화도 비교적 자유롭다. 본체가 슬라임처럼 부정형이기 때문에 그 밀도를 조정하여 몸을 키우거나 줄일 수 있다.

의태 수준도 높아 겉모습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흉내 낸다. 하지만 지능은 어린 아이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으며 겁이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플갱어가 지능이 뛰어나 찾아내기 어렵다면, 이미티는 겁이 많아 홀로 생활하기 때문이라는 차이가 있다.

“폐하, 그것은 이미티라는 몬스터로 추측됩니다. 의태가 정교하고 흉내도 잘 내지만, 지능이 낮아 보통 인간의 사회에는 섞이지 않는다 알려져 있습니다.”

황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그 눈은 여전히 부정형으로 꾸물거리는 몬스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으음….”

괴로운 탄식이 흘렀다.

자그마치 5년이나 아들 행세를 한 몬스터이다. 당연히 쉽게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정말 복수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아비엘이 죽었어. 나는 자유야. 이제 숲에 돌아가도 돼?”

검자루를 쥔 황제의 손이 스르르 풀어진다.

레오의 말대로라면 이미티는 본래 인간 사회에 섞이지 않는 몬스터다. 이 녀석도 결국 아비엘에게 강요당해 인간 사회에 끌려 나와 황자 행세를 했다는 말이다.

아비엘의 죽음에 기뻐하며 몸을 출렁이는 놈을 보니 황제의 불같던 분노도 한풀 사그라들었다.

“…너도 아비엘에게 이용당한 것이냐?”

“아비엘은 나빠. 나에게 이상한 짓을 했어. 도망치려고 생각하면 온몸이 찌릿찌릿해서 움직일 수가 없어. 그래서 도망칠 수 없었어.”

“종속의 계약이군.”

이미티는 처음으로 황제의 물음에 제대로 답했다.

중속의 계약은 흑마법사들이 몬스터를 부릴 때 쓰는 방법 중 하나다. 계약에 필요한 재료와 도구가 비싸서 잘 쓰이지는 않지만 제국의 재상인 아비엘이라면 부담이 없었겠지.

“딱 10년만 흉내를 내면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어. 하지만 아비엘이 죽었으니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돼!”

다시 한번 크게 몸을 일렁이며 기쁜 감정을 드러내는 이미티.

레오의 오러안에는 이미티의 몸속에 핵이 흘러 다니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황제의 검은 전혀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핵이 보이는 레오는 마음만 먹으면 이미티의 목숨을 취할 수 있다.

‘굳이 죽여야 할까.’

그럼에도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미티는 그저 살고 싶어 아비엘의 명령을 따랐다.

게다가 자그마치 5년이나 황자를 연기했다. 살려 두면 분명 쓸모가 많을 테지.

레오는 아까보다 한층 흥분을 가라앉힌 듯한 황제의 기색을 살폈다.

그의 착잡한 눈빛을 보니 지금이라면 어느 정도 설득이 먹힐 것도 같았다.

“폐하의 말씀대로 이 몬스터는 아비엘의 계약으로 이곳에 묶여 있었던 듯합니다. 황자 전하의 행세를 한 것은 용서의 여지없는 중죄이나, 죽이기보다는 다른 쓸모로 죄를 갚게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황제는 말이 없었다.

“나를 죽일 거야? 너희는 나쁜 사람이야?”

이미티가 고개를 갸웃하는 듯 몸을 흔든다.

방금 전 황제의 검에 찔렸으면서도 그렇게 묻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허탈했다.

이미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검을 거두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한 내가 누구를 탓한다는 말인가. 조금 쉬고 싶다. 나머지는 공에게 맡기도록 하지.”

터덜터덜.

황제는 힘없는 걸음으로 황자궁을 떠났다.

레오는 그런 황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이미티에게 향했다.

“이름을 가지고 있나?”

“내 이름은 크롬멜 드메이르 폰 아슐렌이야.”

“아니, 그 이름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어린아이 정도의 지능이라더니 대략 감이 오기 시작했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서는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단 황자의 몸으로 돌아와 주지 않겠나? 지금 상태로는 어디를 보고 이야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그래, 좋아.”

지금 레오가 대화하고 있는 대상은 검은 진흙 같은 부정형의 몬스터였다.

황제가 떠났으니 언제 시종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쓸데없는 오해를 만들지 않기 위해 황자의 모습을 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면 무슨 이름을 말하는 거지?”

“…일단 옷부터 좀 입는 게 좋겠다.”

레오는 황자의 모습으로 변신한 이미티에게 옷가지부터 던져 주었다.

황제에게 찔린 후 옷을 버리며 형태를 바꾼 탓에 지금 다시 돌아온 모습은 알몸이었다.

알몸의 황자와 단 둘이 있는 상황이라니, 이 장면을 시종에게 들켰다가는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른다. 그런 소문의 주인공이 될 바에야 차라리 황자를 찌르고 역적이 되리라.

다행히 이미티가 옷을 입는 동안 별채 근처에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네 본체는 따로 이름이 없나 보구나.”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렇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름이란 상호간의 관계가 있기에 필요한 것. 회색 늑대였을 때는 그렇게 불렸고, 황궁에서는 2황자 크롬멜이었다.

이미티 본체로는 누군가와 교류할 기회도 이유도 없었으니 이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것이 당연했다.

“미티라고 부를게. 어때?”

“그게 내 새로운 이름이야?”

미티. 미티.

녀석은 몇 번 되뇌더니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미티. 넌 숲으로 돌아가고 싶어?”

“맞아, 숲으로 돌아갈래. 여기는 갑갑해.”

미티라는 이름에 영향을 받았는지 이제 황자의 말투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상을 흉내 내는 것은 잘하지만 학습으로 이어지는 것과는 별개인 모양이다.

미티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다 보니 레오도 어느새 어린아이를 대하듯 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안 돼.”

“왜? 아비엘은 이제 없다고 했잖아. 나는 자유야. 누구도 내게 명령을 내릴 수 없어.”

화가 났는지 황자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근엄한 황자의 표정과 아이 같은 말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레오는 조금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고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너는 자유야. 그래서 나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을 하고 싶어.”

“부탁?”

“그래, 부탁. 네 도움이 필요해.”

“내가 필요해? 도움이 돼?”

황자의 입꼬리가 헤벌쭉 늘어진다. 방금 전 화난 표정은 어디에 갔는지 기쁨과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이다.

“당분간만 지금처럼 황자를 흉내 내며 지낼 수 있겠어?”

이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그러니 황자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대역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숲에 돌아가고 싶은데…? 여기는 갑갑해.”

“길게 부탁하지는 않을게. 딱 한 달만 어때?”

“우우음….”

“그 후에는 직접 숲에 데려다줄게. 약속할 테니까.”

“약속?”

“말한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이야. 자, 새끼손가락을 이렇게 해 봐.”

“이게 뭐야?”

“내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계약이야.”

미티가 눈을 반짝였다.

지키지 않으면 온몸이 찌릿찌릿하고 괴로워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 미티에게 계약이란 그런 것이었다.

“새로운 계약을 했어. 너는 약속을 지켜야만 해.”

새끼손가락을 건 미티는 가슴을 내밀며 웃었다.

레오에게 계약을 맺게 한 것이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거 참….’

부탁하는 입장은 이쪽인데, 대체 뭐가 만족스러운 거지?

히죽히죽 웃고 있는 미티를 보고 있자니, 레오는 어린애를 속여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미안해졌다.

물론 숲에 돌려보내 준다는 약속은 지킬 셈이다. 황제도 뒷일을 맡기겠다고 했으니 상관없을 테고.

“난 이제 돌아갈게. 이제 황자처럼 지내 줘. 알았지?”

“알았어! 계약은 중요하니까!”

레오가 황자궁을 떠나고 곧 시종이 들어왔다.

미티의 표정과 거동은 다시 완벽한 황자의 것으로 변해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