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출진 (1)
남부 대륙, 요크 후작의 영주성.
크라젠 요크가 정기적으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는 날이었다.
영혼을 가득 담은 영혼석 십여 개가 제단에 올랐다. 이미 요크 후작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대다수의 남부 귀족들에게 상납받은 결과였다.
[그릇으로부터 공물이 들어오지 않는다.]
영혼을 바친 직후, 들려온 악마의 대답에 후작은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그 말대로이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지 말라.]
“당장 확인하겠나이다!”
악마에게 직접 영혼을 바치는 역할은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았다.
그릇을 만드는 아비엘과 중앙 대륙에서 후작파의 구심점이 되는 켈시온에게만 허락한 역할이었으나, 미덥지 못했던 켈시온은 죽어 버렸고 이제 친동생 아비엘만 남은 상황이다.
공물이 들어오지 않는다니, 아비엘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을지 모른다.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차질이 생겨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도래의 날을 망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부디 안심해 주시옵소서.”
한참을 엎드려 있던 후작은 더 이상 대답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몸을 일으켰다.
수년 동안 준비해 온 그릇이다.
조금만 있으면 결실을 볼 수 있을 터. 이제 와서 문제가 생겨서는 안될 일이었다.
후작은 즉시 아비엘과 연결되는 마도구를 집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기 연락의 날은 내일이지만 기다릴 여유는 없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했다.
“왜 응답이 없는 것인가?”
마도구 앞에서 후작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비엘이 즉각 연락을 받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늦은 밤이지만 황제를 배알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시간을 두고 몇 차례 더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여전히 응답할 기미는 없다.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불안함이 커졌다.
후작은 즉시 시종을 불러 들였다.
“지금 당장 메프람으로 출발하여 재상의 안위를 확인하라! 가장 말을 잘 타는 이를 보내라!”
마도구가 연결되지 않으니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자고 있던 한 부관을 깨웠다. 부관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곧바로 북쪽으로 말을 달려야 했다.
그리고 닷새 후.
아비엘의 안위를 확인하러 갔던 부관이 요크 후작의 영주성에 돌아왔다.
부관은 피곤에 찌든 얼굴로 후작의 앞에 나섰다. 편도 사흘 거리를 왕복 닷새 만에 도착했으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채찍질한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되었나!”
“곧바로 재상의 저택을 찾아갔으나 저택은 폐쇄된 상태였고 제국군 병사들이 저택을 감시하며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습니다. 후작님의 명을 받았다 알렸지만 그들은 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병사들의 눈을 피해 안쪽을 몇 시간이나 살폈지만 이미 저택은 텅 비어 버린 듯 시종 한 명 보지 못했습니다.”
부관은 후작의 눈치를 보며 보고를 마쳤다.
길게 이야기했으나 그 내용 중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제국군이 아비엘의 저택을 막고 있다는 말인가? 재상은? 아비엘은 무사한 것이냐?”
“그것이….”
부관은 말을 흐리며 마른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뜸들이지 말고 어서 말하라!”
“입에 담기 힘든 내용이나, 재상께서는 황제 폐하의 앞에서 스스로 마물로 변했기에 목이 베였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재상의 안위를 확인할 만한 단서를 찾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후작님!”
“아비엘이 마물로 변해? 목이 베여?”
후작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부관은 제대로 된 정보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것이 허무맹랑한 소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후작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마물로 변했다고? 어째서?’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비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마법사의 재능이 없어 주술과 저주만 겨우 배웠을 정도다.
그런 아비엘이 마물로 변했다는 것은 강제로 마기를 주입하는 마도구를 썼다는 것인데… 자신은 그런 마도구를 건넨 적이 없다.
‘설마…?’
한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
아비엘에게 건넨 마도구 중에는 악마 게르베가 직접 방호의 주술을 부여한 것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 삼키면 된다고 들어 그대로 전달했던 것. 어쩌면 그것이 아비엘을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비엘의 생사를 확인해라. 또한 2황자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있는지 긁어모아라.”
후작은 부르르 몸을 떨며 추가 명령을 내렸다.
아직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위대하신 분이 그런 주술을 부여하여 건넸을 리 없다. 어쩌면 아비엘도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얼마 후.
친동생 아비엘이 사망하고 그의 저택이 몰수되었다는 내용이 다시 한번 후작의 귀에 들어갔다.
“아비엘을 잃었다. 또한 도래의 날을 위해 준비하던 그릇마저 잃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후작은 침통한 얼굴로 어금니를 물었다.
그릇을 통해 악마를 온전히 불러내려 하던 계획이 망가졌다. 그렇다면 더 많은 영혼을 모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단기간에 많은 영혼을 수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전쟁이었다.
“이 시간부로 남부 대륙은 제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앞으로 나오라!”
독립 선언.
요크 후작이 휘하의 귀족들 앞에서 선언했다.
이는 곧 제국에 대한 반란이었으며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의미였으나, 이미 후작의 손발이 되어 있는 그들 중 반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남부 대륙의 독립 소식.
아슐렌 제국에는 진작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자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마는구나.”
황제는 나직이 되뇌었다.
제국을 통일한 직후, 남부 대륙을 요크 후작에게 맡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황제의 힘이 제국 전역에 닿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당장 중앙 대륙 곳곳에서 터지는 일을 수습하는 데 바빴으니까.
중앙 대륙이 안정화되는 사이 요크 후작도 남부 대륙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후작은 황제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구나.’
권력은 가족과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했거늘.
황제는 뒤늦게 쉬운 길을 선택한 과거의 판단을 후회했다.
“폐하,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저들이 먼저 명분을 만들어 주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새로운 재상, 베니에르 백작이 답했다.
그의 말대로 저들의 독립 선언은 제국에 대한 반기였다. 그간 후작파가 해 온 정치적인 힘겨루기와는 완전히 결이 다른 명백한 반란.
그들과 싸울 명분으로 충분했다.
“그대의 말이 맞다.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지. 또한 우리는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황제가 눈앞의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전에는 중앙 대륙뿐만 아니라 북부 대륙의 귀족들까지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다. 평소 무기 반입이 금지되는 것과 달리 모두 갑주를 입고 검을 차는 등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설 듯한 모습이었다.
“여신께서 남부의 악마 숭배자 세력을 궤멸할 것을 명하셨다! 바이스만 공, 여신의 대리자인 그대가 총사령관이 되어 남쪽으로 진군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레오가 앞으로 나서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옥좌에서 일어난 황제는 황금으로 치장된 검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 검은 황제를 대신해 제국군을 지휘한다는 상징이었다.
“제후들은 들으라! 황제의 이름으로 바이스만 공을 제국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니, 모두 그를 도와 성전(聖戰)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여신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천년 제국이여 영원하라!”
제국의 남부 원정.
그것은 요크 후작이 독립을 선언하기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수도에는 이미 이천 명의 제국군을 포함하여 중앙과 북부 각지의 제후들이 집결한 상태였다.
용병을 포함하여 전부 칠천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 반다이트, 메르윈, 베니에르 백작과 같은 중앙의 대영주뿐 아니라 멀리 북부의 귀족들까지 병사를 차출했기에 가능한 규모였다.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지만 각자의 세력을 가진 이들이 병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는 다시 한번 레오의 도움이 있었다.
[남부에서 악마가 깨어나려 하는구나. 놈이 깨어나면 인간계는 또다시 멸망의 위기를 맞을 것이다.]
몇 주 전 어전 회의에서 레오는 다시 한번 여신의 음성을 활용했다.
거기에 대영주들이 앞다투어 원정에 참여하니, 그 이하 군소 영주들도 이해타산을 따지며 간을 볼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출정은 세 시간 후 입니다. 모두 준비해 주십시오.”
황제가 사라진 어전.
레오의 말에 모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출병 준비를 위해 흩어졌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을 바이스만령에 데리고 가야겠어.’
레오도 빠른 발걸음으로 어전을 나섰다.
제국군의 출병 준비는 진작 모두 끝났다. 어머니와 동생이 눈에 밟혀 잠시 보고 올 생각이었다.
* * *
비슷한 시간.
바이스만의 병사들과 함께 수도에 도달한 덱스도 부모님을 만나러 집으로 향했다.
“엄마! 나 왔어!”
“아들? 어서 오렴!”
“아빠는 집에 없어?”
“아빠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매일 뭐가 그렇게 바쁜지…. 어서 들어와, 어서.”
덱스는 잔느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들어갔다.
수도에 온 것은 지난 개선식 이후 처음이니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도 했지만 한결 밝은 엄마의 표정을 보니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덱스가 왔단다! 이리 내려와 보렴!”
집 안으로 들어가며 잔느가 2층을 향해 외쳤다.
그 광경에 덱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방금 전 아빠가 집에 없다고 말해 놓고 누구를 부르는 거지?
“네-! 지금 내려가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곧 2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이어서 계단을 내려온 이를 보고 덱스는 입을 벌렸다.
“…샤를롯?”
“스승님! 오랜만이야!”
반갑게 달려와 안기는 샤를롯.
밝은 금발의 정수리가 덱스의 가슴께에 간신히 미친다.
습관적으로 그 정수리를 눌러보던 덱스는 문득 깨달았다.
“응? 너 키가 좀 큰 것 같다?”
“당연하지! 앞으로 더 클 거니까 두고 봐!”
샤를롯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자신만만한 포즈를 취해 보인다.
한 달 전 개선식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바이스만령에서 마법을 가르치던 몇 달 전과 비교하면 반 뼘 이상 훌쩍 자란 느낌이다.
“그건 그렇고 어쩐 일이야? 왜 우리 집에 있어?”
“지난번에 말했잖아, 아카데미 시험 때까지 신세를 좀 진다고.”
“아 맞다, 그랬던가.”
덱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본래 샤를롯의 집은 수도에 있었지만, 바이스만령으로 이주하면서 머물 곳이 없어져 버렸다.
과거 덱스와 레오가 샤를롯의 집에서 머무르며 시험을 준비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거 한 달 전 이야기 아니었어?”
“그랬는데 아카데미 입학시험이 미뤄졌거든. 그래서 지금 시험 일정이 다시 나오길 기다리고 있어.”
“시험이 미뤄졌구나, 전쟁 때문인가?”
덱스의 혼잣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남부와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각지의 영주들이 병사를 이끌고 수도에 집결하고 있으니 소문이 안 날래야 안 날수가 없었다.
“아들은 괜찮은 거니? 걱정이구나.”
“아마 금방 출병할 것 같아. 지금 레오가 황궁에 있거든.”
덱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일부러 밝게 말했다.
높은 확률로 출병이 오늘일 것 같다는 말은 들었지만, 걱정이 가득한 엄마 앞에서 차마 당장 출병한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다들 다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 내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놈은 아니니까.”
“맞아! 스승님은 엄청 강하니까!”
“마법 연습은 잘 하고 있어?”
전쟁 이야기가 길어질까 싶어 얼른 화제를 돌리는 덱스.
마법 이야기에 샤를롯이 눈을 빛냈다.
“스승님이 오랜만에 좀 봐줄래?”
“그럴까?”
덱스의 팔을 껴안다시피 하며 잡아끄는 샤를롯.
슬쩍 뒤를 돌아보더니 잔느와 의미심장하게 눈빛을 교환했다.
‘우리 아들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제가 꽉 잡을게요!’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