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출진 (2)
제국군의 진군이 시작했다.
제국군 이천. 그리고 켈시온이 사라지면서 제국의 3대 백작 가문이 된 베니에르, 메르윈, 반다이트의 병력이 약 이천에 달했다.
여기에 바이스만을 포함해 새로이 남작 위를 받은 브루델과 저메인도 합류했으며, 북부의 두 남작 가문 마이어와 캐링턴도 각기 일백오십과 일백의 병사를 이끌었다. 여기에 각 지역의 군소 영주들의 병력과 용병까지 더하면 도합 칠천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이었다.
“무리하게 행군을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세어 카마르 요새까지 이동하는데 나흘을 쓰겠습니다. 그리고 닷새째 아침에 요새 공략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첫 지휘관 회의에서 레오는 대략적인 구상을 밝혔다.
침공의 명분이 분명한 데다가 여신이 함께한다는 것에 병사들의 사기도 충분히 높다. 분초를 다툴 이유가 없는 만큼 병사의 체력을 온존시켜 첫 싸움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옳습니다. 첫 전투의 결과 또한 이후 향방에 영향이 클 것이니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저 또한 같은 의견입니다.”
반다이트군을 이끄는 클라인과 베니에르의 줄리앙도 레오의 계획에 동의했다.
메르윈 백작은 이번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봉신인 델리오 자작을 보냈다. 델리오 자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레오와 같은 뜻임을 보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총사령관께서는 카마르 요새 공략에 대해 생각해 둔 안이 있습니까?”
남부 대륙의 입구인 카마르 요새는 험준한 바위산 위에 자리해 있다.
높고 험한 지형을 십분 활용한 요새는 철옹성과 같은 방어로 유명했다. 특히 병력의 규모만 믿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가는 참패를 당하기 딱 좋았다.
레오에 대해 잘 모르는 델리오 자작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요새 공략에 임할지 궁금했다.
“카마르는 천혜의 방어 요새이니 정면 돌파는 가장 좋지 않은 수라고 봅니다.”
회귀 전 용병 시절, 카마르 요새 전투에 참여한 적 있다.
공교롭게도 공성과 수성 측을 모두 경험한 바 있는데 확실히 공성 측에는 악몽과 같은 요새였다.
오러 소드를 끌어내면 성문 공략이 한결 용이하겠지만 이제 겨우 남부 대륙의 입구일 뿐이다. 요크 후작의 꿍꿍이를 아직 모르는 이상 이쪽도 패를 아낄 필요가 있다.
“생각해 둔 바가 있긴 하나 여러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으니 내일 회의 때 다시 한번 논의합시다.”
“알겠습니다.”
레오는 다른 지휘관들의 생각을 듣겠다는 의중을 비추었다.
델리오 자작도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만히 수긍했다. 애초에 요새 공략에 대한 총사령관의 접근법이 궁금했을 뿐이다. 무리한 정면 공략에 대해 부정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 충분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마칩시다.”
지휘관들끼리 첫 인사를 겸한 자리였다. 레오는 본격적인 회의는 내일부터라는 뜻을 비치며 간단히 자리를 마무리 지었다.
회의가 끝나자 클라인이 반가운 얼굴로 레오에게 다가왔다.
“총사령관님, 어깨가 많이 무겁지 않으십니까?”
“이런, 이게 누구십니까? 제국의 방패 반다이트가의 젊은 사자가 아닙니까? 너무 오래간만이라 얼굴도 잊어버리겠습니다.”
클라인이 장난기 어린 말을 레오도 능글능글 웃으며 받아친다.
그간 줄곧 반다이트 영지를 지켰기에 몇 달 만의 만남이었다.
“하핫, 오랜만이다, 레오.”
“그러게 말이다. 근데 너 좀 달라진 것 같다?”
레오는 단숨에 클라인의 바뀐 점을 눈치챘다.
오러의 농도와 흐름이 이전보다 더욱 정순하다. 소드 마스터로서 한층 성장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달라지긴. 아직도 한참 멀었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너 정도면 충분히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으니까. 지금처럼만 하면 돼.”
“어휴,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거냐?”
클라인은 팔꿈치로 레오의 옆구리를 찍었다.
일찌감치 저만치 앞서 달려가는 녀석에게 들어 봐야 별로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래, 이번 전투 동안에는 잠깐 잊자. 마음이 급하면 될 것도 안 되겠지.’
클라인이 그간 수련에 집중하느라 반다이트령에서 두문불출했다.
매개체 없이 공간에 오러를 직접 운용하고 실체화하는 기술. 보르트의 소드 마스터 카바넬이 보였던 오러 운영법을 익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다.
과거에는 소드 마스터가 검술의 마지막 단계라 생각했다. 그런데 카바넬을 만났을 때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그 핏빛 안개 속에서 느꼈던 무력함을, 클라인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레오는 카바넬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였다. 공간에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여 카바넬을 제안한 것은 클라인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다.
“요새 공략은 어떻게 할 셈이야? 슬쩍 미리 이야기 좀 해줘 봐.”
그사이 줄리앙이 끼어들었다.
이번에 그는 여동생 세실 없이 단독으로 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내심 불안감은 있었지만 두 소드 마스터 친구들을 보니 든든하게 의지가 되었다.
“뭘 그렇게 보채냐? 내일 회의에서 이야기할 거야. 하루만 기다려.”
“궁금하게 진짜 이러기야?”
레오는 칭얼거리는 줄리앙을 슬쩍 밀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에는 아는 얼굴이 많았다.
“오랜만이야. 파블로, 니앙. 좀 늦었지만 축하한다.”
“아앗! 총사령관께서 친히 말을 걸어 주시다니!”
“…너희도 이럴 거야?”
“하핫, 장난이야. 이렇게 보니까 좋네.”
“그래, 네 덕분에 우리 둘 다 숙원을 풀었어. 정말 고맙다.”
파블로와 니앙이 레오에게 감사를 전했다.
켈시온 토벌의 공으로 두 사람은 정식 남작 위를 받았다. 그것은 아버지 대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가문의 숙원이었다.
레오가 아니었으면 얻기 힘든 공적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곁에 선이 굵은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몸통과 팔뚝에서 그가 무인이라는 것이 쉽게 추측됐다.
“처음 인사드립니다. 북부 마이어가의 테베스라고 합니다.”
북부의 마이어 가문.
레오는 이 남자가 패트릭의 형이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반갑습니다. 패트릭의 형님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동생을 거두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레오를 바라보는 테베스의 눈빛이 날카롭다. 세간의 평가와 별개로 직접 상대를 판단하고자 하는 눈빛이다.
불손함은 섞이지 않았다. 여신에 대한 믿음이 신실하기로 유명한 마이어 가문이었기에 여신의 대리자로 공표된 레오에게 불손한 마음을 먹을 리 없었으니까.
또한 동생에 대한 애정도 함께 느껴졌기에, 레오는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눈빛을 받아 넘겼다.
“그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레오의 말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었다.
헤르만 영지를 흡수하면서 바이스만 병력은 배로 늘었고 이때 패트릭의 존재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기사 개인의 완력으로는 무무카에 밀릴지 모르나 그의 지휘력만큼은 독보적이었으니까.
게다가 벌써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이다. 이미 패트릭은 어느 영지에서도 대우 받을 수 있는 실력에 도달해 있었다.
‘마이어 가문은 알고 있는 걸까? 패트릭이 소드 엑스퍼트 최상급에 달했다는 것을.’
겸양을 떠는 것인지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인지.
레오는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엄하게 지도해 주십시오. 제 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근성과 노력 하나만큼은 뛰어난 녀석이니 분명 대기만성할 겁니다.”
“제 기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패트릭에게는 다른 재능도 충만합니다.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여 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요. 그럼.”
레오는 능숙하게 미소를 유지하며 테베스와 인사를 마쳤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테베스가 패트릭을 아끼는 마음은 진심인 듯했다.
하긴 지금껏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패트릭은 실력이 늘지 않는 본인을 탓했지, 주변 사람에 대한 나쁜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는 얼굴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총사령관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북부 캐링턴가의 삼남, 몬젤이라 합니다!”
또 하나의 북부 귀족, 캐링턴 남작 가문.
레오가 다가가자 몬젤은 바짝 얼은 모습으로 인사말을 뱉었다.
캐링턴 남작가의 삼남 몬젤.
사실 레오는 그가 막사에 들어서는 순간 얼굴을 알아봤다. 예전보다 조금 키가 컸고 몸은 단단해 보였지만 어벙한 얼굴은 거의 그대로였다.
‘모르는 척인가, 아니면 못 알아본 건가?’
레오는 능숙한 미소로 몬젤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시험장에서 결투까지 한 사이다. 그게 겨우 일 년 전인데 정말로 못 알아본다고?
의아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부터 함께 싸워야 할 동료인데 굳이 안 좋은 기억을 들출 필요는 없을 테니까.
“북부의 캐링턴 가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악마를 숭배하는 무리를 함께 처단합시다.”
“예!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전력으로 임하겠습니다!”
레오가 악수를 청하자 몬젤은 영광이라는 듯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어수룩한 얼굴을 보니 도저히 모르는 척하는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몸은 전보다는 좀 나아진 모양이네.’
제법 완력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과거 팽팽 놀기만 하는 망나니에서 조금은 발전이 있었던 걸까.
그렇게 모두 해산하려는 찰나, 거대한 인영이 지휘부 막사에 들어섰다.
무무카였다.
“회의가 끝났다 들었습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무슨 일이야?”
“올빼미의 편제에 관해 드리고 싶은 말이….”
무무카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부리부리한 그의 시선이 레오의 곁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몬젤에게 닿았다.
“이게 누구신가! 그 고귀하신 도련님 아닌가?”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하는 무무카.
그 미소 사이로 삐죽 송곳니가 두드러졌다.
“…아? 흣!”
무무카와 눈을 마주친 몬젤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웨어울프는 그리 흔하지 않다. 레오는 그렇다 치고 무무카를 못 알아볼 리 없는 것이다.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몬젤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무무카에서 레오로 천천히 시선을 옮겨 갔다.
히죽.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레오.
…딸꾹!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몬젤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거, 거짓말….”
몬젤은 입을 헤 벌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낯익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카데미 시험장에서 만난 그 평민이다.
작년에 잔뜩 시비를 걸고 결투까지 했던 그가, 지금은 제국군의 총사령관이라고? 게다가 소드 마스터?
레오를 마주 보는 몬젤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다시 봐서 반갑군. 그때 준 검은 한동안 잘 썼다.”
“어, 으, 아….”
레오는 입만 벙긋거리는 몬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막사를 빠져나왔다.
무무카는 그런 몬젤의 귓가에 짧게 뭐라 속삭이고는 곧바로 레오를 따라나섰다.
어느덧 막사 안에는 일백 이하의 병력으로 참석한 이들만 남았다.
“캐링턴가의 몬젤 님이라 하셨지요?”
“총사령관과 구면이신 듯한데 말씀 좀 들려주십시오.”
“어떻게 친분을 쌓으신 겁니까?”
몬젤의 주변으로 남작가의 인물들이 몰려들었다.
까놓고 말해 캐링턴가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가문이다. 걸출한 기사나 마법사를 배출한 적도 없고, 중앙 정치에 입김이 강하지도 않다.
그런 가문의 삼남이 황제로부터 직접 제국군의 지휘권을 받은 총사령관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니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하하…!”
몬젤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저 이 자리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몰려든 이들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총사령관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취미나 뭐, 특별히 관심 가지시는 것이라든지…. 뭐든 좋으니 좀 알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보니 바이스만의 수인 기사와도 친분이 두터우신 듯한데….”
딸꾹!
누군가 무무카의 이야기를 꺼내자 잠시 멈췄던 딸꾹질이 다시 시작됐다.
“귓속말을 하던데 이후에 약속이라도 따로 잡으신 겝니까?”
무무카의 귓속말.
[그때 못한 결투가 내내 아쉽더군. 기대하고 있겠다.]
뒤늦게 귓속말의 내용을 이해했는지, 몬젤의 낯빛이 이번에는 흙색으로 변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