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악마 게르베 (1)
“루비가…?”
레오의 품속에서 붉은 빛이 일었다.
빛을 내며 진동하는 루비를 꺼내 들었다.
악마가 인간계에 현신했음을 알리는 마도구. 메퀸토가 남긴 물건이었다.
‘아무래도 한발 늦은 것 같군.’
[이 정도의 마기는…. 그놈이 확실해요.]
여신은 침통한 목소리를 답했다.
2황자라는 그릇을 빼돌렸음에도 결국 악마의 현신을 막지 못했다. 여신의 힘은 아직 미약하며 현신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야. 중요한 건 이제부터 끌려 다니면 안 된다는 거지.’
레오는 담담히 대꾸했다.
일찍부터 힘을 끌어모으고 있던 악마가 여신보다 먼저 현신에 성공한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후의 일이다.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흡수하여 성장하고 강해진다. 전쟁도 결국 영혼을 수확하기 위한 방법에 불과했지.’
켈시온은 전장에서 수확한 영혼으로 상위 악마의 힘을 빌렸다. 그것을 생각하면 현시점 이후에도 대량으로 영혼이 발생할 기회 자체를 주지 말아야 한다.
카마르 요새 공략처럼 적아(敵我)를 가리지 않고 사망자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한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레오는 즉시 회의를 소집했다.
“…과거 여신과 싸웠던 그 악마가 결국 다시 나타난 것이군요.”
여신의 신전을 오랫동안 후원한 마이어 가문의 테베스가 악마 게르베의 이름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레오는 악마가 인간의 영혼을 힘으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간략히 설명했다. 이것부터 이해시키지 못하면 앞으로의 일을 납득시킬 수 없기에.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적과 맞서 싸울 수 없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델리오 자작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영혼을 내줄수록 악마가 강해진다는 것은 이해했지만 그래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 병력을 가지고도 싸움을 피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카마르 요새를 빠르게 장악하고도 서둘러 진군하지 않았던 것, 요새 내부를 단속하고 정비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요.”
그 물음에 답한 사람은 클라인이었다.
클라인도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요새를 장악하고도 빠르게 진군하지 않는 레오의 결정이 의아했다. 하지만 이제야 그 의도가 손에 잡혔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델리오 자작님, 깨어난 악마가 영혼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방금 전까지 그 이야기를 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총사령관은 싸움을 피하자고….”
델리오 자작의 입이 굳은 듯 멈췄다.
그도 깨달은 것이다. 악마는 굳이 제군 연합군과 맞붙지 않아도 쉽게 영혼을 취할 수 있음을.
“…지금 남부의 병사들, 그리고 주민들이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까?”
“악마가 몸을 드러낸 이상 요크 후작 세력의 이용 가치는 끝났습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 했으니 악마에게 이제 후작의 세력은 한 끼 식사에 불과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 세력을 스스로 갉아먹는 짓 아닙니까? 제아무리 악마라 해도 병력 없이 맨몸으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잦아들던 델리오 자작의 말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그렇다면 총사령관은 무엇으로부터 이 요새를 지키고자 하는 겁니까?”
그제야 총사령관 레오가 이 카마르 요새를 공격이 아니라 방어의 거점으로 쓰고자 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과연 적은 누구란 말인가.
“이제부터 우리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레오는 세차게 흔들리는 델리오 자작의 눈을 바라보며 단언했다.
확신할 수 있다. 이미 몇 번이나 경험했던 것이기에.
“놈은 마계와 이어지는 차원문을 열 겁니다. 그리고 마물이 밀려 나오겠지요.”
덤덤히 이어지는 레오의 말에 델리오 자작을 비롯한 대다수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마계를 잇는 차원문 그리고 그곳에서 나타난 마물.
작년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사건을 모르는 귀족은 없으리라
“우리는 이 요새를 거점으로 마물을 막아 내야 합니다.”
회귀 전 북부에서 번진 마물의 공습이 이번에는 남부 대륙에서 시작되려 한다.
같은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반드시.”
레오의 눈동자에 결의가 깃들었다.
* * *
요크 후작의 성에 그의 가신들이 모여 들었다.
예고 없는 소집에 다들 의아한 얼굴이다. 특히 후작의 명령으로 출진을 앞두고 있던 그랜트 자작과 다리안 남작은 더욱 당황스러웠다.
“후작께서 왜 갑자기 소집을 명하신 걸까요?”
명확한 이유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와 같은 회의 공간에 모인 이들.
그럼에도 오늘따라 더욱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에 머리칼이 쭈뼛 서는 듯했다.
“다들 모였느냐.”
이윽고 등장한 요크 후작.
그의 모습에 가신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머리에 돋은 아홉 개의 뿔.
그것만으로도 지금껏 알던 요크 후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다.
“크라젠 요크는 기꺼이 내게 몸을 바쳤다. 참으로 충성스러운 종복이다.”
요크 후작의 입이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섬뜻한 미소였다. 후작의 껍데기를 쓴 악마는 이미 자신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시 한번 때가 왔노라. 그년의 방해가 있기 전에 인간계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나만의 왕국을 만들 터이니.”
가신들의 눈동자가 조용히, 그리고 바쁘게 움직였다.
요크 후작이 모시던 그 악마가 후작의 몸을 차지한 것이 분명하다. 후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 너희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위, 위대하신 분이시여! 뭐든 하명하십시오!”
다리안 남작이 가장 먼저 목소리를 냈다.
‘차라리 잘되었다.’
어차피 요크 후작에게 버림받았던 몸이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일지 모른다.
“다리안, 그것이 네 이름이었지.”
요크 후작의 기억까지 흡수한 게르베는 다리안을 내려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벌벌 떨고 있지만 욕망에 솔직한 눈동자다. 속내를 감추고 꿍꿍이를 가진 크라젠 요크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다리안 남작은 겁을 집어 먹은 얼굴로 발을 뗐다.
본능적인 두려움과 욕망이 혼재된 망설임 섞인 걸음.
그는 게르베의 발치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고개를 들라.”
얼굴을 든 다리안은 숨을 집어 삼켰다.
어느새 몸을 숙인 게르베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가까이서 게르베의 눈동자를 마주한 다리안은 그가 뿜어내는 강력한 마기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어떠냐, 다리안. 내가 만들어 갈 왕국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싶지 않으냐?”
“여, 영광… 감사합….”
“내 발에 입을 맞추어라. 그리하면 너 또한 나와 함께 영광의 길을 걸으리라.”
“아아…!”
다시 몸을 굽혀 게르베의 발치에 다가가는 다리안.
“흣…!”
작은 신음과 함께 다리안의 몸이 말라붙든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광경에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숨을 집어삼켰고, 이내 제자리에 주저앉아 덜덜 몸을 떨었다.
이윽고 껍데기만 남은 몸이 의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풀썩 무너졌다.
“염려할 것 없다. 너희에게도 같은 기회를 줄 것이니.”
게르베는 다시 한번 한가득 미소를 보였다.
그 얼굴에서 전혀 닮지 않은 요크 후작과 다리안 남작의 얼굴이 동시에 보이는 듯했다.
* * *
그날 밤.
요크 후작의 성 가까운 곳에 검은 차원문이 열렸다.
출진 준비를 마치고 인근에서 다리안 남작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다리안군의 막사 바로 옆이었다.
그르르륵-!
하급 차원문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악어처럼 긴 주둥이에 코끼리 같은 육중한 덩치를 가진 거대 도마뱀을 닮은 마물이었다. 그 머리에는 세 개의 뿔이 나 있었다.
그 뒤로 검은 마물들이 줄지어 몸을 드러냈다.
“괴물이다!”
“으아악! 도망쳐!”
막사 곳곳에서 병사들의 비명이 울렸다.
거대 도마뱀의 입질 한 번에 병사 서넛의 목숨이 사라졌다. 당초 특별한 경계도 없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있었기에 이들은 어둠에 섞인 기습적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게다가 뿔이 세 개인 하급 악마를 상대하려면 최소한 상급 기사 여러 명은 필요하다. 제대로 맞붙어도 전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습까지 당했으니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한밤중에 이게 무슨 소란이지?”
가까운 곳에 진을 치고 있던 그랜트 자작의 병사들도 눈을 떴다.
그들도 소란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들은 뭐야!”
“아아악!”
“괴물이다!”
다리안군을 휩쓴 마물을 이내 그랜트군을 공격했다.
마물은 이미 수백에 달했다. 어둠 속에 병사들의 비명 소리만 울렸다.
그 순간에도 마물은 꾸역꾸역 늘어만 갔다. 차원문을 중심으로 동심원 같은 검은 물결이 사방으로 일었고 모든 것을 삼켜 나갔다.
게르베는 빈 성에서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문을 키울 수 있겠구나.”
지금 연결한 하급 차원문은 최대 뿔 셋의 악마 한 개체가 나타날 수 있다.
뿔 셋 악마는 일반 병사에게 충분히 공포스러운 존재이지만 인간계의 상급 기사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여신의 대리자에게 대적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뜻이다.
영혼을 투자하여 문을 키울수록 더 상위 악마를 불러낼 수 있으니, 뿔 일곱 이상의 상급 악마를 수하로 거느리고 여신의 대리자에 맞서는 것이 게르베의 목표였다.
이윽고 동이 텄다.
마물들은 이미 요크 후작의 성 주변을 모두 먹어 치우며 사방으로 번져 갔다.
물론 북쪽으로 이동하여 카마르 요새를 향하는 마물도 있었다.
다시 제국 연합군이 주둔하고 있는 카마르 요새.
“뭔가 다가옵니다!”
망루 위의 병사가 외쳤다.
시야를 강화하니 성벽에 올라있던 클라인의 눈에도 접근하는 마물 무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녀석의 말이 맞았어. 마물이야.”
“레오는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던 걸까? 여신께서 알려 주셨을까?”
“흐음, 생각해 보면 그전에도 묘하게 그랬단 말이지.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고.”
클라인의 옆에서 패트릭과 줄리앙이 맞장구 쳤다.
이 요새를 거점으로 마물을 막아야 한다는 레오의 말은 이로써 현실화되었다. 몰랐다면 크게 당황했겠으나 미리 알고 준비했으니 저 마물 무리가 그리 두렵지 않다.
이제 레오의 작전이 들어맞기를 바랄 뿐이다.
“의문을 가지려 하면 끝도 없더군.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하게 됐지.”
“그 녀석이 말 한대로 되었으니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까? 분명히 잘될 거야.”
이번에는 무무카와 덱스였다.
성벽 위의 다섯은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 요새를 돌파 당하면 중부 대륙 전체가 위험하다. 그런 중대한 전투에서 아카데미의 동료들이 이렇게 모일 줄 몰랐다.
요새의 북벽을 기준으로 북쪽은 험한 바위산 지형이지만 남쪽은 개활지에 가깝다.
마물들은 별다른 장애물 없이 요새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요새 남벽은 클라인.
동벽은 무무카와 줄리앙.
서벽은 덱스와 패트릭이 중심이 되어 지키기로 했다.
“무운을 빈다.”
“레오 녀석에게 선물 하나는 주고 가야지.”
덱스가 지팡이를 들었다.
짧은 영창과 동시에 십수 개의 화구가 하늘에 둥실 떠올랐다.
“파이어 볼.”
퍼버버버버벙-!
마법사 한 명의 힘이라 상상할 수 없는 파이어 볼의 폭격.
개미떼처럼 가득했던 마물 무리에 듬성듬성 커다란 구멍이 났다. 일시적으로 마물의 군세가 혼란에 빠졌다.
그사이 가장 띠가 얇은 방향으로 화염 화살 하나가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그 방향을 따라 요새 아래에서 무엇인가 빠른 속도로 뛰쳐나갔다.
레오와 슈니였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