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악마 게르베 (3)
과거 레오가 흑마법사의 물건을 처분하려 들렀던 잡화점의 딸 미스티.
처음 봤을 때부터 똑 부러지는 인상이었지만 그녀의 진짜 재능을 발견한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사용하고 남은 포렌티아 두 개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레오는 지나가는 말로 미스티에게 물은 적이 있다.
“고도로 농축된 마나의 영약이 있다면 그걸로 뭘 할래?”
“고민할 것도 없이 비싸게 팔아야죠. 기사는 마법사든 서로 사겠다고 난리일 텐데요.”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한 미스티.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런데 그 영약에는 제약이 있어. 한 번 영약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또다시 같은 효과를 얻을 수가 없다는 거지.”
“그릇을 넓히는 것은 단 한 번이라는 뜻인가요?”
“맞아. 그러니 다른 사용법도 찾아보고 싶은 거야.”
포렌티아의 한계였다.
오직 단 한 번, 그것도 성장기가 끝나기 전에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영약.
물론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당시 레오는 덱스, 무무카, 클라인, 패트릭 외에 아직 자기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가 없었다.
그럴 바에야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낫다 생각했다.
“고도로 농축된 마나라…. 마나 회복제를 만들면 어때요? 소모된 오러나 마력을 빠른 속도로 채워 주는 회복제요.”
“회복제?”
“지금 개발된 것들은 까놓고 말해서 회복제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잖아요. 오히려 회복 보조제에 가깝죠.”
맞는 말이었다.
소모한 오러와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대기 중의 마나를 흡수해야 한다.
초급 기사나 마법사는 하루 정도면 충분하지만, 수준이 높아질수록 완전 회복에 걸리는 시간은 늘어난다. 시중의 회복제이라 부르는 것들은 모두 그 마나 흡수 효율을 높여 회복 시간을 줄여 주는 기능을 할 뿐이었다.
“마나가 농축된 재료가 있다면 그 자체를 회복제로 쓸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가치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쌀 테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쓸 수 있다면 수요가 있을지도 몰라요. 어쨌든 목숨은 하나잖아요.”
“하하핫! 딸아이의 허무맹랑한 이야기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창고에서 나오던 카도르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먹자마자 오러와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회복제라니, 모험가에게는 꿈만 같은 이야기다. 말 그대로 여벌의 목숨 아닌가.
“물어보니까 대답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론적으로 안 될 이유가 없잖아? 아빠는 알지도 못하면서!”
“가능하면 왜 지금껏 없었을까? 세상에 없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란다.”
“그러니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니까?”
레오는 말다툼을 벌이는 부녀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회귀 전, 포렌티아에 대한 가공법이 알려진 후에도 그것을 회복제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아이디어를 가진 이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격의 포렌티아를 굳이 새로운 연구에 소모하려는 이는 없었다.
“카도르 씨 그리고 미스티.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 후, 레오는 두 사람을 바이스만령으로 초빙해 포렌티아를 재료로 한 회복제 개발에 착수시켰다.
당연히 비밀리에 이루어진 작업.
“이걸 실험용으로 써도 된다고요?”
뿌리를 손톱만큼 잘라 먹어 본 미스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 또한 마력을 가진 초급 마법사였으니 포렌티아의 가치를 모를 수 없었다.
“다 써도 상관없어. 필요하면 또 구해다 줄 테니까.”
연구는 빠르게 진행됐다.
미스티는 두 달 만에 포렌티아가 가진 마나를 추출하는 법을 개발해 냈다.
추출된 마나를 다시 정제하고 희석하여 적절한 용량을 찾아내는 데 다시 한 달이 걸렸다.
“꼭 먹어야 할 필요는 없는 거죠?”
“그래, 더 간편한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제시해 줘.”
급박한 전투 중에도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회복제.
그것이 레오가 준 과제였다.
수없이 많은 실험이 반복됐고, 실험 대상은 주로 레오와 덱스였다.
그렇게 최종 결정된 것은 몸에 붙이는 패치 타입.
충격을 가하면 패치에 내장된 작은 바늘이 피부를 찔러 가공한 농축 마나를 직접 주입하는 방식이다.
“으… 난 이거 별로야….”
왼쪽 가슴에 붙인 패치를 바라보며 덱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바늘이 찌르는 따끔한 아픔도 싫었고 심장 가까운 곳에 마나가 직접 주입되는 감각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음료 타입이 낫지 않아?”
“이 자식이 아주 배가 불렀지…. 언제 주머니 뒤져서 뚜껑 따고 마실래? 그러다 뒈진다니까?”
“으으으….”
덱스는 더 불평하지 못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효율만큼은 이 방식이 최고였으니까.
마시는 것과 몸에 주입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효과가 빠를지는 두 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그저 실제 사용할 기회가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 * *
“벌써 문을 키울 정도의 영혼이 모였나.”
실시간으로 포식되는 영혼의 맛을 느끼며, 게르베는 만족스럽게 되뇌었다.
성에 모인 가신과 그들 병력의 영혼을 흡수하는데 걸린 시간은 만 이틀에 불과했다. 다들 한데 모여 있었기에 아주 빠르고 수월했다.
이것으로 차원문을 한 단계 키운다면 남부 대륙의 모든 영혼을 모두 흡수하는 데는 보름이면 충분할 듯했다.
“차원문을 중급으로 성장시켜야겠군. 이 대륙에서 중급 악마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은 아마 손에 꼽을 테니.”
중급 차원문은 최대 뿔 여섯의 악마 한 개체를 배출할 수 있다.
성력을 배제한다면 인간들이 소드 마스터라 부르는 수준이 아니고서야 뿔 여섯의 악마를 대적할 수 없다.
과거 그러한 소드 마스터는 대륙 전체에서 한두 명 나올까 말까였으니, 이 정도 전력이면 카마르 요새라는 관문을 넘어 중부 대륙에 진출하는 데 충분하리라 여겼다.
사아아아-!
게르베는 그간 포식한 영혼을 소모했다.
수천의 영혼이 사용했으나 이 대륙을 빠르게 장악하기 위한 투자라 생각하면 아까울 것 없다. 오히려 미적거리다가 여신이라도 깨어나면 더욱 발목을 잡힐 것이다.
동시에 성 바깥 차원문을 이루는 마기가 더욱 짙어졌다.
게르베의 의지로 하급 차원문이 중급으로 성장한 것이다.
차원문을 통과하는 마물의 수가 한층 늘었다. 그 속에는 뿔 하나를 가진 악마도 심심치 않게 섞였다.
크륵! 크륵!
여태껏 차원문을 나와 제 갈 길로만 움직이던 마물들이 처음으로 한쪽으로 비켜서며 길을 텄다.
이어서 전신에 검은 불꽃을 로브처럼 두르고 긴 지팡이를 든 악마가 차원문을 빠져 나왔다.
“크크큭, 인간계의 냄새… 참으로 오랜만이 아닌가.”
게르베의 수하이자 뿔 여섯을 가진 악마 몰로눔.
과거 게르베와 함께 가장 위협적이었던 악마 마법사가 다시금 인간계에 몸을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게르베 님의 왕국을 완성하리라.”
잿빛 해골은 붉은 안광을 뿜어냈다.
검은 불꽃으로 감싼 뼈 밖에 없는 그의 몸이 스르르 떠올랐다. 떼 지어 진군하는 마물을 발아래에 두고 북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카마르 요새의 방향으로.
몰로눔은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빠른 속도로 허공을 이동했다.
얼마 안가 요새의 성벽을 기어오르며 고전하는 마물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스윽-!
몰로눔이 검은 로브 속에서 팔을 펼쳤다.
두두두두두-!
지면이 울리는가 싶더니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새의 모든 병사들이 느낄 정도로 큰 진동이었다.
“놈들이 올라온다!”
“아니야! 땅이 움직이고 있어!”
병사들이 외침이 사방에서 울렸다.
성벽 아래 마물들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자세히 보니 놈들이 디딘 지면이 언덕처럼 불쑥 솟아오르며 성벽과 높이를 줄이고 있었다.
“마법사다.”
덱스는 마법에 의한 현상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곧 허공에 부유한 채 요새를 바라보는 검은 로브의 악마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내게는 아직 무리야.’
요새 전체를 커버하는 광역 마법.
덱스에게는 아직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적 마법사는 최소 5서클 이상, 어쩌면 6서클 수준으로 어쨌든 자신보다 윗줄이었다.
“젠장! 이제 다 끝났어. 우리는 여기서 죽는 거야!”
몇몇 병사들은 허망한 얼굴로 다가오는 마물을 바라보았다.
몰로눔의 마법 덕분에 성벽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마물은 그저 성벽 위까지 이어지는 언덕을 달려 올라오면 되었다.
제국 연합군으로서는 성벽이라는 커다란 방어적 이점을 잃어버린 상황.
“당황하지 마라! 성벽에 기대지 않아도 놈들을 막아 낼 수 있다!”
패트릭은 지휘를 포기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놈들이 성벽을 넘었을 경우도 대비했다. 지금쯤 다른 지휘관들이 북벽 앞에서 2차 방어선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였지만.
“내가 시간을 끌어 볼게.”
덱스가 앞으로 나섰다.
밀려오는 마물도 저지해야 하고, 적 마법사의 주의도 끌어야 한다. 지금 요새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유일했다.
“파이어 월!”
덱스는 성벽을 두르는 불의 벽을 일으켰다.
동서남벽을 모두 완벽하게 두르기에는 부족했으나 마물의 진군을 어느 정도 방해할 정도는 충분했다.
“마법사가 있었나?”
광역 마법에 몰로눔도 고개를 갸웃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이 정도 수준의 마법사는 과거에도 열 명 이상은 있었다. 당연히 그중 적수라고 할 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어서 몰로눔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염의 창 하나를 발견했다.
“흐음, 조잡한 수준이군.”
평범한 플레임 스피어.
화력도, 속도도 특출 날 것 없는 수준이다.
몰로눔은 심드렁한 기색으로 실드를 둘렀다.
이 정도는 피할 것도 없었으니까.
“익스플로전.”
콰광-!
동시에 몰로눔의 발아래 마력진이 발광하며 폭발이 일었다. 측면에 실드를 두른 순간 정확히 일어난 일이었다.
좁은 좌표에 집중한 폭발이었음에도 꽤 멀리 떨어진 성벽 위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근처에서 폭발에 휘말린 마물은 재도 남기지 못하고 증발했으며, 방사형으로 일어난 충격파에 당한 마물은 전신이 찢겼다.
쉬이이익-!
덱스의 마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연이어 십수 개의 바람 칼날이 아직도 완전히 흩어지지 않은 화염 속에 날아가 박혔다.
이윽고 서서히 화염이 잦아들었다.
폭발 중심으로부터 반경 십 수 미터에 생긴 공터가 드러났다.
“…해치웠나?”
반대편 성벽에 있던 줄리앙이 되뇌었다.
이 정도 강력한 마법은 덱스뿐이다. 이중 삼중으로 적을 옭아매는 공격 또한 그렇다.
플레임 스피어를 피하지 않은 순간부터 덱스가 준비한 덫에 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흐흐흐…!”
허공에서 기괴한 웃음이 울렸다.
흡사 짐승의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말도 안 돼!”
이 정도 화력에도 무사하다니.
줄리앙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나.”
반면 덱스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마력을 있는 대로 쏟아 부은 익스플로전이었다. 단일 개체 상대 마법 중 가장 강한 화력을 퍼부었는데도 적은 건재했다.
심장 부근의 서클이 허전하다. 금방이라도 마력 탈진에 빠질 것만 같았다.
“인간 마법사여, 아쉽지만 이것이 너의 전력일 테지. 작은 즐거움을 주었으니 답례를 하지 않을 수 없군.”
몰로눔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긴 했다만 거기까지다.
그는 게르베의 수하 중에서도 가장 강한 마법 저항력을 자랑했다. 적어도 인간 마법사에게 마법으로 밀린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즐거웠다는 말도 진심이었다.
“빈껍데기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번 받아 보거라.”
몰로눔의 머리 위에 검은 원이 생겨나는 듯하더니 회전하며 원뿔 형태를 만들었다.
원뿔은 회전을 거듭하며 점차 거대해졌다. 이내 여느 공성 병기만한 크기까지 자랐다.
“하… 어쩔 수 없나.”
텅 비어 버린 심장의 마력 서클.
덱스는 슬쩍 인상을 찡그리며 스스로 왼쪽 가슴을 후려쳤다.
쭈우욱-!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마나가 주입된다.
텅 비었던 마력 고리에 금방 마나가 들어차며 세차게 회전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