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악마 게르베 (4)
구우우우웅-!
검은 원뿔이 서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회전까지 더해진 원뿔은 그 자체로 거대 질량의 낙하물이 되어 요새를 덮쳐 왔다.
“그대로는 못 받아 내! 부숴야 해!”
덱스가 외쳤다.
배리어를 사용한다 해도 저 물리력은 온전히 막아 낼 자신이 없었다.
“하아아앗-!”
그 말에 클라인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산산이 조각내야 한다는 뜻을 알아들은 것.
클라인이 쏘아 낸 오러의 화염이 원뿔의 표면을 파고들어 심부에서 폭발했다.
쩌저저적-!
검은 원뿔에 수없이 많은 잔금이 일었다.
이윽고 그 균열이 벌어지며 거대 원뿔은 크고 작은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었다.
‘어차피 요새 전체를 방어할 수는 없어.’
덱스는 이를 악물었다.
산산이 조각났다 해도 그것들은 여전히 요새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배리어로 막을 수 있는 부분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낙하물에 요새가 파손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허공에서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팔 할가량 회복된 마력이 다섯 개의 고리에서 세차게 순환했다.
허공에 빠르게 수놓아진 마력진이 완성되자마자 뭉텅이로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 탈력감에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플레어(Flare)!”
금속조차 녹여 버리는 초고온의 화염, 또 하나의 5서클 마법이 덱스의 손에서 시연됐다.
원뿔의 첨단(尖端)에서 시작된 손바닥만 한 청백색 불꽃은 마치 종이를 태우듯 순식간에 번졌다.
빠르게 번진 불꽃이 그 거대한 몸체를 살라 먹었다. 불꽃이 지난 자리에는 회백색의 잿가루만 남아 허공에 흩어졌다.
순식간에 거대한 낙하물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허억, 헉-!”
덱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잡아 세웠다.
마력이 다시 바닥났다. 이렇게 단시간에 연속해서 마력을 소진해 보기는 처음이다.
한순간에 텅 비어 버린 마력 고리의 공회전은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만 만들어 냈다.
퍽.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가슴에 부착된 마나 회복 패치에 충격을 가했다.
기분 나쁜 감촉과 함께 다시 한번 마나가 몸속에 주입된다. 당장 심장의 고통은 가라앉았지만 쪼개질 듯한 두통이 더해졌다.
“쓰읍…!”
덱스는 여전히 인상을 펴지 못한 채 몸을 일으켰다.
마력은 회복되었을지 몰라도 정신적 피로감의 몇 배로 가중된다.
심장 주위에 붙인 총 네 개의 패치 중 겨우 두 개를 사용했는데 이 정도다. 웬만하면 나머지 패치는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레비테이션.
덱스는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악마의 공격을 받아 내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 이쪽에서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익스플로전으로 타격을 주지 못했다면 다른 방식을 쓰면 될 뿐이다.
철컥.
들고 있던 지팡이의 길이를 줄이자 익숙한 메이스가 되어 손에 잡혔다.
“별거 있나, 마법이 안 통하면 후드려 패는 거지.”
한편, 부유하는 덱스의 모습을 보면서 몰로눔은 뼈밖에 없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상대는 아무리 잘 보아도 5서클 수준이다. 마력 소모가 극심한 플레어를 저 정도 범위로 사용했다면 마력 탈진으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마나의 축복이라도 받은 모양인가? 그렇다 해도 부유 마법이라니, 영문을 모르겠군.’
마나에 대한 민감성이 높은 체질을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남들보다 수월하게 마나를 느끼고 흡수하는 만큼 마력 회복이 빠르다. 드문 케이스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귀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부유 마법에 대해서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부유 마법은 꽤 까다롭기에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이동하기까지 꽤 숙련이 필요하다. 저렇게 느릿하게 떠올라 봐야 맞추기 쉬운 표적에 불과하다.
“어린 마법사여,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몰로눔의 지팡이가 덱스를 향했다.
그의 목적은 한시라도 빨리 카마르 요새를 넘는 것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화르르륵-!
몰로눔의 지팡이가 검은 화염의 창을 연달아 뿌렸다.
잘못된 판단으로 표적지로 전락한 어린 마법사는 이를 절대로 피할 수 없으리라. 아마 막는 것도 급급할 터.
“아닛!”
그래서 덱스의 몸이 순식간에 쏘아져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몰로눔은 저도 모르게 쇳소리를 냈다.
쾅-!
허공에서 육중한 충격음이 울렸다.
덱스의 메이스가 악마 마법사의 배리어를 때린 소리였다.
쾅! 쾅! 쾅! 쾅!
덱스의 몽둥이질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허공을 유영하듯 빠르게 몰로눔의 주위를 돌며 사방을 두드렸다.
“네, 네놈은 마법사가 아니었나!”
몰로눔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메이스의 파괴력이나 능숙한 타격은 베테랑 전사를 상대하는 듯했다. 거리를 벌리려 해도 귀신같이 몸을 붙이니 쓸 수 있는 마법도 제한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허공에서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자유자재로 자세를 변화해 가면서도 혼자서만 땅을 디딘 듯 공격해 대니 정산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글쎄, 뭘 것 같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여유롭게 받아치는 덱스.
그 와중에도 팔은 쉬지 않는다. 몰로눔의 정신을 쏙 빼려는 듯 상하좌우 어지럽게 메이스를 두드려 댔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
일방적으로 공격을 퍼붓는 덱스였지만 머리는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부유 마법, 레비테이션은 기습적으로 거리를 좁히기 위한 포석이었다.
악마 마법사가 허공에서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덱스는 그가 부유 마법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추측했다.
레비테이션은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여 대상을 부유시킨다. 자신에게 쓰면 스스로 몸을 띄울 수 있지만 공중에서의 자세 제어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보통 고정된 자세로 이동하곤 한다.
하지만 덱스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일부러 다양한 자세로 실험하고 연습한 것.
쉽지 않은 길이지만 능숙해지기만 한다면 허공의 적과 근접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쾅! 쾅!
덱스의 일방적인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스트렝스와 헤이스트까지 중첩한 파괴력은 여느 상급 기사 못지않았다. 간간이 터지는 몰로눔의 마법 반격은 능숙히 막거나 흘린다.
“이이익!”
치고 빠지고 다시 치고 막아 내고.
몰로눔은 미꾸라지 같은 덱스의 몸놀림에 쉽사리 침착함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짜증과 조급함만 일었다.
뿔 여섯의 악마로 태어나 고고하게 적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거리를 허용한 경험도 거의 없을뿐더러, 비록 배리어 위라고는 하나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은 적도 단 한 번 없었다.
“뭣하면 전부 두르지 그래?”
“네놈이 감히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몰로눔은 타격이 발생하는 위치에만 배리어를 생성했다가 거두기를 반복했다.
이미 큰 마법을 한 번 썼기에 마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바빠 보여서 그렇지.”
“이놈이!”
쩌적-!
평점심을 잃은 몰로눔의 외침과 동시에 배리어가 갈라졌다.
그사이로 덱스의 거친 손이 비집고 들어왔다.
“으헉!”
덱스의 손아귀가 몰로눔의 검은 불꽃 로브를 움켜쥐었다.
로브는 극단적인 마법 저항력을 가진 보물이었지만 물리력에 대한 저항은 전혀 없다시피 했다.
“드디어 잡았다.”
멱살을 틀어쥐듯 로브를 강하게 당기자, 깊게 눌러 쓴 후드가 흘러내리며 잿빛 해골이 드러났다.
여섯 개의 뿔이 돋은 만질만질한 머리뼈.
그것을 향해 둔탁한 메이스가 날아들었다.
“아, 안 돼!”
“돼.”
와작-!
잿빛 두개골이 가벼운 파열음을 냈다.
머리를 잃은 악마 마법사의 몸이 덱스의 손아귀 아래 축 늘어졌다.
“후….”
덱스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다. 여유를 가장했지만 지금처럼 두뇌를 가혹하게 써 본 적이 없다.
보조 마법을 중첩한 상태에서 공중에 부유하며 빠른 방향 전환을 수없이 했다. 그 하나하나의 계산이 틀어졌다면 순식간에 거리를 내주고 주도권을 잃었을 것이다.
손안에 든 악마 마법사의 사체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검을 불꽃을 내뿜던 로브는 어느새 검고 낡은 평범한 천 쪼가리로 변해 있었다.
“아, 악마 마법사를 해치웠다!”
“이제 살았어!”
와아아아아-!
요새 전체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몰로눔이 거대한 원뿔로 공격할 때까지만 해도 요새의 이들은 이제 승산이 없다 여겼다. 하지만 바이스만의 마법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기어코 승리를 쟁취했다.
“흐음.”
정작 가장 기뻐해야 할 덱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애매했다.
‘이게 끝이라고?’
설계한 것이 모두 들어맞았다.
놈을 방심시키고 접근전에 끌어 들이는데 성공했으며 기어코 그 머리를 부수었다.
그런데 이 찝찝함은 무엇일까.
‘…검은 연기가 있었던가?’
표본은 많지 않으나 악마를 해치웠을 때는 항상 검은 연기가 나타났다.
방금 무무카가 뿔 셋 악마를 처리했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 악마 마법사는 그렇지 않았다.
“플레어.”
덱스는 다시 한번 초고온의 화염을 일으켰다.
손아귀에서 불탄 악마 마법사의 잿가루가 허공에 흩어졌다. 여전히 검은 연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낡은 로브는 그을린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마법 저항력이 엄청나다는 것.
익스플로전을 막아 낸 것도 이 로브의 덕이 컸을 것이다.
“플레어에도 불타지 않는다니,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이 아닌가?”
“가까이에서 좀 보고 싶군.”
마법에 조예가 있는 이들은 금방 로브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만큼 마법사라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보물이었다.
덱스의 눈도 로브에 고정되었다.
다만 그 시선은 욕심이나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찌이이익-!
“아아앗!”
“저 귀한 것을 어째서!”
덱스의 양손이 로브를 찢었다.
보물급 아티팩트가 반으로 갈라지는 광경에 욕심을 보이던 이들이 하나같이 비명을 질렀다.
사아아아-!
로브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났다.
연기는 금방 흩어지지 않고 허공에 머무르며 꿈틀거렸다. 그 형상이 꼭 뿔 달린 악마의 머리 같았다.
[새파랗게 어린 인간에게 당하다니, 원통하고 원통하구나!]
잿빛 해골은 더미(dummy).
몰로눔의 본체는 로브 안쪽에 보이지 않게 새겨진 마법진에 담겨 있었다.
소멸한 척 숨어 있다가 부활할 셈이었던 것.
수백 년간 몇 차례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몰로눔의 비장의 한 수였다.
[도대체 어찌 눈치챈 것이냐…! 아, 게르베 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검은 연기는 더 이상 형상을 유지하지 못했다.
흩어지는 연기를 바라보며 덱스는 후련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손맛이 별로였거든.”
뿔 여섯의 악마 마법사 몰로눔.
한때 인간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악마의 오른팔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 * *
“으읏…!”
같은 시각.
요크 후작의 성에 있던 게르베는 강한 충격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직접 주종의 계약을 맺은 상대가 소멸했을 때의 정신적 고통이다.
지금껏 줄곧 여유로웠던 게르베의 안색이 변했다.
“몰로눔이 당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뿔 여섯의 몰로눔은 게르베의 가장 믿음직한 부하였다.
이번에야말로 그를 한 단계 진화시켜 더욱 든든히 자신을 보좌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년이 수를 쓴 것이 분명하다…!”
여신 아메리아.
이미 백여 년 전 여신과 그녀의 용사에게 발목을 잡힌 바 있다. 또다시 그런 실패를 반복할 수 없다.
게르베의 시선이 저 멀리 카마르 요새 쪽으로 향했다.
저곳에 여신의 용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레오 바이스만.”
요크 후작의 기억이 여신의 용사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을 보여 주었다.
그 이름을 되뇌고 보니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얼마 안 가 과거 용사의 이름이 메이너드 바이스만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놈의 후손인가.”
그제야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영혼 수확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게르베의 얼굴이 뒤틀렸다.
콰앙-!
갑자기 일어난 굉음.
뒤이어 발밑이 크게 흔들렸다.
창밖으로 하늘과 땅이 기울어지고 있다.
아니,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