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악마 게르베 (5)
쿠과과과광-!
요크 후작의 성에서 가장 높은 탑이 무너져 내렸다.
그 앞에 돌풍의 오러를 갈무리하는 레오가 서 있었다.
“잔챙이들까지 일일이 상대할 필요는 없지.”
마물 무리를 뛰어넘어 돌입한 후작의 성은 고요했다.
인간의 기척은 이미 남아 있지 않고 마기만이 가득한 성.
게르베로 추정되는 강력한 마기를 제외하면 모두 잡스러운 수준이었기에, 레오는 탑을 단번에 무너트리는 것을 택했다.
“네놈이로구나, 더러운 년을 달고 온 놈이.”
크게 피어 오른 흙먼지 뒤에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여전히 요크 후작의 껍데기를 쓴 악마 게르베.
[게르베여, 마신이 되고자 하는 너의 갈망은 절대로 이루지 못하리라. 네놈과의 질긴 악연을 오늘 끝내고 말 것이니.]
“내가 할 말이군. 이번에야말로 네년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 주마.”
분노에 찬 아메리아의 음성에 게르베는 비릿한 조소로 답했다.
여신과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와중, 레오는 조용히 게르베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놈인가.’
악마 게르베.
이 세계에 마물을 불러낸 원흉.
회귀 전에도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켈시온 백작과 요크 후작도 결국 이 악마의 손발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붉은 이리 용병대의 진짜 원수는 켈시온 백작이 아니라 이 악마일 것이다.
그런 악마를 마주한 기분은 생각보다 덤덤했다.
여신과 악마가 얼마나 오래 싸워 왔는지 잘 모른다. 악마를 없애고 인간계를 지키겠다는 특별한 대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평온한 삶을 원했고, 소중한 어머니와 동생을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것을 위협한다면 상대가 뭐라 해도 배제할 것이다.
“그릇도 없이 어떻게 현신했나 했더니, 요크 후작의 몸을 빼앗은 거였나.”
레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게르베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붉은 이리 용병대의 최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은 회귀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비록 함정이지만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한 그들의 마지막 눈빛 하나하나가 다시금 떠올랐다.
지난 생에서는 이미 그렇게 끝난 일.
이번 생에서는 결코 반복되게 하지 않으리라.
검을 치켜들었다.
오러에 성력을 더하자 황금빛 돌풍이 검을 휘감으며 타오른다.
넘실거리는 황금빛이 중천에 떠오른 태양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한 빛을 뿜었다.
“그놈과 같은 기운이군.”
성력의 기운에 게르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과거에 마주쳤던 용사도 비슷한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번만큼 시간은 여신의 편이 아니다. 저 정도 성력이라면 지금 가진 마기로도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완전히 지워 주마.”
레오는 저도 모르게 으드득 어금니를 갈았다.
게르베를 직접 마주해서인지 메이너드 바이스만의 기억이 새롭게 머릿속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백여 년 전 그가 어떻게 악마와 싸웠는지, 놈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우우웅-!
성력을 담은 오러가 주위 공간을 밀도 있게 채워 나갔다.
레오의 오러가 게르베가 내뿜은 짙은 마기를 잡아먹으며 공간을 장악했다.
“…!”
게르베는 흠칫 놀랐다.
여신의 성력은 과거보다 못했으나, 지금 보이는 힘은 그렇지 않다. 눈앞의 용사는 과거의 용사를 뛰어넘는 힘으로 부족한 성력을 메우고 있었다.
뒤늦게 마기를 방출했으나 이미 잠식된 공간을 다시 빼앗아 오는 것은 무리였다.
‘이 자리에서 제거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게르베의 본능이 그렇게 외쳤다.
판단을 마치자마자 스스로 차원문을 닫았다.
이미 영혼의 수확은 멈춘 상태다. 남부 대륙에 더 이상 살아 있는 인간이 없으며, 마물은 카마르 요새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 그렇다면 차원문 유지에 힘을 소모할 이유가 없다.
전력으로 상대할 생각으로 마기를 개방했다.
찌직-!
게르베의 몸집이 부풀어 오르며 두르고 있던 옷이 찢겨 나갔다.
드러난 긴 팔과 다리는 흡사 지옥의 불길이 생각나는 검붉은색이었다. 오돌토돌한 피부는 흡사 도마뱀의 그것 같았으며, 강인해 보이는 단단한 손아귀는 인간의 것보다 배 이상 커졌다. 그 손끝에는 검고 날카로운 손톱이 흑요석처럼 반짝였다.
머리에는 아홉 개의 뿔이 솟았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둥그렇게 솟아 마치 관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네놈의 본모습이냐? 과연 추악하군.”
먼저 움직인 쪽은 레오였다.
성력이 섞인 검풍이 날카롭게 게르베를 파고들었다.
신장만 따지면 두 배 가까이 커진 상대였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더 큰 상대와 싸우는 것은 충분히 익숙했으니까.
“카아아악-! 사지를 찢어 주마!”
게르베는 레오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더니 오히려 마기를 두른 손톱으로 검풍을 찢어발기며 마주 달려들었다.
파직-!
레오의 검이 게르베의 손아귀에 가로막히며 불꽃이 튀었다.
튕긴 검을 재빨리 회수한 레오는 다시 한번 도약하며 회전력을 더했다.
오러로 장악한 공간 내부의 공기가 바람이 되어 레오의 회전을 가속시켰다.
휘리릭- 캉-!
눈 깜짝할 사이의 반격이었으나 또다시 가로막혔다.
연이은 검격을 막아 낸 게르베가 반격을 시도했다. 채찍처럼 휘두른 양팔이 레오의 좌우에서 각각 날아들었다.
‘품으로 뛰어들 것을 노리고 있군.’
안쪽으로 접근하느냐, 뒤로 물러나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공격.
메이너드의 기억을 품은 레오는 게르베의 유인에 속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었다.
“…!”
악마의 왼쪽으로 돌아 접근하다가 왼팔의 공격을 머리 위로 흘려 내며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게르베의 눈동자가 커졌다.
캉-!
레오는 게르베의 빈 옆구리를 그대로 강타했다.
강한 충격음과 함께 게르베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섰지만 검에 당한 자리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성력이 부족해요. 이대로는 놈에게 상처를 내기 힘들어요.]
여신은 울분이 섞인 음성을 내며 자신의 부족함을 자책했다.
게르베는 마기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 그것을 뚫어 내려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한 성력이 필요했다.
‘설마 그것도 모르고 덤볐을까 봐.’
오히려 레오는 덤덤했다.
회심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게르베를 응시할 뿐이다.
게르베가 여신에 비해 오랜 준비 기간을 가졌다지만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현신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러안을 통해서 그대로 나타났다.
‘슈니, 지금!’
어느덧 생각만으로 교감할 수 있게 된 슈니.
여태껏 기운을 감추고 탑의 잔해 뒤에 숨어 있던 슈니가 게르베의 뒤에서 달려들었다.
“뭣!”
등 뒤의 기척에 게르베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레오가 달려들었다.
황금빛 오러 소드가 노리는 곳은 오러안에 비치는 마기 갑옷의 헐거운 부위였다.
“이런 같잖은 짓을!”
다소 놀랐을 뿐 그 정도로 당할 게르베가 아니었다.
성가신 존재는 하나면 족했다. 슈니부터 없앨 생각으로 팔을 뻗었으나 이미 잽싸게 거리를 벌린 후였다.
“하아앗-!”
그사이 정면에서 다시 한번 레오의 회전 참격이 쇄도했다.
방금 전과 크게 다를 것 없는 공격.
게르베는 코웃음을 치며 왼팔을 내밀었다. 손아귀에 두른 마기로 충분히 튕겨 낼 정도의 위력이었으니까.
“…!”
순간, 전신에 정체 모를 섬뜩함이 훑고 지나갔다.
마치 포식자의 눈을 마주친 피식자의 감정. 그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게르베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몸놀림이었다.
서걱-!
동시에 게르베의 왼팔이 허공을 날았다.
“으윽…!”
게르베는 사라진 팔꿈치 아래를 부여잡으며 신음했다.
혼란스러웠다.
‘방금 공격은 뭐였지?’
분명 검격이었으나 검은 닿지 않았다.
또한 하나의 검격도 아니었다. 마치 사방에서 동시에 몇 개의 검이 날아든 듯했다.
“운이 좋았네. 목을 지켰으니 말이야.”
“…꽤 장난질을 치는군.”
한 팔을 내준 게르베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뒤늦게 방금 공격을 간파했다. 그것은 검도, 마법도 아니었다. 대기 중의 오러 그 자체를 예리한 칼날로 만들어 공격한 것이다.
백 년 전 용사도, 그 수백 년 전의 용사와 상대하면서도 겪은 적 없는 기술.
인간으로서 이 정도 경지에 달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 어떻게 한 거죠?]
‘너까지 놀라기야?’
놀란 것은 게르베뿐만이 아닌 모양.
성력으로도 상처 내지 못한 게르베의 몸을 베는 데 성공했으니, 여신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말했잖아. 저놈의 현신도 불완전하다고.’
그 말처럼 게르베의 악마화는 완전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인간계 현신까지는 성공적이었으나 제 몸을 완전히 구현하기 위해 필요한 영혼이 충분하지 않았다.
차원문을 성장시키는 데 소모한 양이 아니었다면 더욱 완벽한 몸을 구성할 수 있었으리라.
전신에 강한 마기를 둘렀다 하나 군데군데 약한 부분이 있었고, 레오는 오러안으로 그것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결국 잔재주일 뿐. 네놈이야 말로 이 기회를 놓친 것을 통탄해야 할 것 이다.”
게르베는 입가를 실룩이며 조소했다.
그 사이 잘린 왼팔의 단면이 불룩해지더니 쑥 솟아난다. 순식간이 잘린 팔이 새로 자라난 것.
“글쎄, 누구 말이 맞는지 한번 볼까?”
“일개 필멸자의 오만이 하늘에 닿는구나. 그 또한 너의 어리석음이니 스스로를 탓하거라.”
레오는 악마에게 검 끝을 향했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놈은 팔 하나를 재생한 만큼 힘을 소모했다. 동료들이 카미르 요새만 잘 틀어막고 있다면 악마도 더 이상 영혼으로부터 힘을 얻지 못할 터.
“어리석은 건 네놈 아닌가? 한 팔을 내주고도 배운 게 없다면 그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
“뭣이?”
레오는 옆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이었다.
“그 왼팔, 메이너드에게도 한번 내주지 않았던가?”
게르베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 * *
악마 마법사 몰로눔은 소멸했지만 놈의 마법에 의한 여파는 남았다.
솟아오른 대지로 성벽의 장점을 잃은 요새의 인원들은 여전히 남은 마물을 상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파이어 월!”
덱스가 기진맥진한 몸으로 다시 한번 화염의 장벽을 세웠다.
서클의 마력이 대량으로 빠져나간다. 단번에 마력이 빨려나간 탈력감에 저절로 허리가 꺾였다. 울컥 토사물이 밀려왔다.
우웩-!
그 와중에도 덱스는 생각했다.
요새의 병사들이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언덕 아래에서 진격해 오는 마물과 소모전만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동서남의 각 방향에서 클라인, 무무카, 패트릭이 분전하고 있지만 그들 혼자서 넓은 지역을 막아 낼 수는 없다.
오직 자신의 마법만이 광범위한 지역에 장애물을 만들어 마물의 진격을 늦출 수 있었다.
“이러다 진짜 뒈지게 생겼네.”
퉤-!
입안에 남은 토사물을 뱉어 냈다.
누군가 내장을 헤집은 듯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는 빙빙 돈다. 몇 번이나 토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독한 술을 진탕 마신 다음날의 지독한 숙취가 몇 배로 몰려오는 느낌이다.
절대 쓰고 싶지 않았던 마나 회복제를 벌써 세 번이나 주입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하나.
과거 테스트를 할 때도 연속 세 번까지가 한계였다. 네 번째는 말 그대로 만약의 만약을 위한 것이었으나 이걸 써도 될지 자신은 없었다.
“괜찮은가?”
“누구…?”
“캐링턴의 삼… 아니 몬젤이다. 부축해 주겠다.”
덱스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팔을 뻗었다.
눈앞이 흐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세 번째 마나 회복제를 주입한 후부터 대량의 마나를 소비하는 마법을 쓸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다.
마력이 바닥났으니 이제 이것도 끝이겠지-라고 애써 위로했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다.
“2차 방어선은 아직인가?”
“…아직까지 별다른 소식은 없다.”
동서남쪽의 성벽이 뚫렸을 때를 대비하여 북벽을 활용하자는 2차 방어선 작전이 있었다.
다만 말 그대로 작전만 존재했을 뿐, 실질적인 준비까지 할 시간은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2차 방어선을 준비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이를 위해 일천 가량의 병사가 빠졌다. 델리오 자작이 이끄는 메르윈군과 군소 영주들의 군대였다.
지금 요새에 남은 것은 제국군을 비롯하여 바이스만, 반다이트, 베니에르의 연합군과 군소 영주 중 유일하게 남은 케링턴의 군대뿐이다.
“…설마 그들이 도망가진 않았겠지?”
“그, 그럴 리 없다. 아군을 버리고 도망치다니 어찌 그런 명예롭지 못한 행동을…!”
몬젤의 눈동자가 슬쩍 떨렸다. 그 또한 내심 걱정하고 있던 참이다.
지금 이곳에 남은 이들의 희망은 2차 방어선뿐이다. 그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더 버티지 못하고 자멸할지 모른다.
“남쪽에서 또 다른 무리가 몰려옵니다!”
어느 병사의 외침에 요새 모두의 시선이 지평선을 향했다.
“맙소사! 저것들이 모두 마물이라고?”
“신이시여, 정녕 저희를 버리시는 겁니까…!”
여지껏 용감히 마물을 막아 내던 병사들이 탄식했다.
지금껏 카미르 요새에서 상대하던 무리보다 몇 배는 될 듯한 숫자가 지평선 너머를 새까맣게 물들이며 진격해 오고 있었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