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악마 게르베 (7)
여신의 용사, 메이너드 바이스만.
게르베는 그와의 첫 대면을 선명히 기억한다.
[최종 보스치고는 평범하네.]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를 가진 그는 게르베의 본신을 마주하고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도발적인 언동으로 게르베의 신경을 긁어 댔다.
[하찮은 필멸자 따위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말임에도 게르베를 크게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여신이 축복을 내린 존재라 해도 결국 인간일 뿐이다. 마신을 눈앞에 둔, 반신(半神)이나 다름없는 최고위 악마와 격의 차이는 논할 것도 없다. 그러니 게르베는 자신이 인간에게 당할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악마는 결국 인간 용사에게 팔 하나를 내주며 패배했다. 메이너드의 힘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그런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
때문에 게르베는 지난 실패를 절치부심하며 힘을 비축했다.
처음부터 전면전을 펼쳤던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은밀히 인간계에 침투해 여신과 정면 대결을 피하며 조심스레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여신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이에 대륙을 모두 장악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
크라젠 요크를 앞세운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내면의 욕망을 자극한 것만으로 그는 악마의 수족이 되길 자초했다. 그렇게 인간을 앞세워 제국의 힘을 약화시키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남부 대륙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만 해도 성공을 확신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놈의 후손이 있었을 줄이야.’
실패한 건에는 모두 그가 관여됐다. 그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고, 더 면밀히 대응했어야 했다.
이제 와서 후회해야 소용없는 일.
게르베는 거칠게 숨을 뱉으며 과거 한 번 패배했던 용사의 후손을 응시했다.
강하다.
단 한 번 맞붙은 것으로 느꼈다. 어떤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의 용사보다 한층 더.
아직 미약한 여신의 힘을 생각하면 패배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이대로 힘 대 힘으로 맞붙는다면 피해가 극심할 것은 자명했다.
판단을 마친 게르베가 내뿜던 살기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네놈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구나. 아니, 그년의 알량한 혀끝에 놀아나고 있으니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해야 할까. 설마 용사였던 네 선조가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 모르는 것이냐?”
흡사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낮고 거친 음성이 레오의 귀를 파고들었다.
메이너드 바이스만.
게르베의 말대로 그의 최후는 좋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계를 구한 영웅이자 여신의 용사라며 그를 찬양하던 수많은 이들은 싸움이 끝나자 서서히 태도를 바꾸었다. 특히 여신이 스스로 봉인석이 되어 성력이 사라져 감에 따라 그 태세 변화는 더욱 극심해졌다.
악마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권력자들은 다시금 제 이득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대륙은 여신과 악마가 함께 사라진 지 불과 십수 년 만에 또다시 분열되었다. 종국에는 그들의 영웅마저 해하고 말았다.
결국 메이너드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어야 할 여신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이계에서 불러 온 용사를 보호하는 데도 실패했다.
[레오,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돼요!]
“닥쳐라.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누구더냐? 용사라며 추켜세워 이용해 먹고 쓸모가 다하면 버리는 것이 네년의 방식 아니냐!”
[…메이너드를 지키지 못한 것은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그것만은 알아주세요!]
여신 아메리아는 필사적으로 호소했다.
레오는 지금 인간계를 지킬 유일한 희망이다. 그가 마음을 돌리면 모든 것이 끝이다.
하지만 그 절실한 마음과 달리 여신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기만 했다.
“더러운 속내를 들키니 발광을 하는구나. 보아라, 인간이여, 저 추한 모습이야말로 너희들이 여신이라 섬기며 추앙하는 존재의 본질이다. 황금빛으로 치장한 껍데기를 한 꺼풀 들추어내니 악마인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은가?”
[레오, 아니에요…! 레오…!]
게르베는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흘리며 마기를 흩뿌렸다.
검붉은 안개처럼 실체화된 마기가 공간을 짓눌렀다. 여신은 그 짙은 마기에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겨워 했다.
“레오 바이스만, 특별한 인간이여, 그대도 알고 있겠지. 인간은 어리석다. 그렇기에 언제나 실패를 반복하지.”
급격하게 마기가 짙어졌다.
폭발하듯 밀려든 마기는 팽팽한 균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레오의 공간까지 잠식해 갔다.
‘밀리면 끝이다…!’
레오는 이를 악물고 오러를 개방하며 버텨 냈다.
게르베가 발산하는 마기에는 그의 의지와 힘이 서려 있다. 잠시라도 틈을 내준다면 순식간에 신체와 정신이 오염되고 말 것이다.
사방에서 옥죄는 마기를 필사적으로 밀어냈지만 보유한 영혼까지 소모해 가며 내뿜는 마기에 당해 내는 것은 무리였다.
“쓰임이 다하면 그대는 버려지겠지. 여신은 또다시 그대를 지키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와 함께한다면 다를 것이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가지는 것은 물론, 나 또한 모든 힘을 다해 그대의 욕망을 이루어 줄 테니.”
게르베의 미소와 함께 검붉은 안개로 실체화 된 마기가 레오의 신체를 구속하듯 에워쌌다.
폭풍처럼 덮쳐 오는 마기에 레오는 쉽사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믿어도 좋다. 내게는 그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힘이 있으니.”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앞은 보이지 않았고 다른 감각도 둔했다. 순간이 영원 같은 시간 감각 속에서 선명한 악마의 음성은 마치 구원처럼 달콤했다.
[레오… 레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제발…!]
성자의 방울 안쪽에서 여신의 간절한 음성이 웅웅 울렸다.
용사를 타락시키려는 악마의 속삭임, 그 심마(心魔)를 이겨 내는 것 또한 용사의 자질이다.
하지만 레오는 여신이 선택한 용사가 아니다. 여신조차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 그저 전대 용사의 기억을 일부 공유한 그의 후손일 뿐이다.
“…내 욕망을 이루어 주겠다고 했나.”
고통으로 일그러진 레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과도하게 순환하는 오러에 전신의 혈맥이 불타는 듯 아렸다. 급속도로 오러를 소모하고 있으나 체내에 침투하려는 마기를 막아 내는 데 급급할 뿐이다. 단전의 오러홀도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흐흐흐, 원한다면 이 대륙을 통째로 주겠다.”
“제법 호쾌하군.”
레오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팔을 꼼지락거렸다.
어떻게든 움직여야 한다. 전신을 눌러 오는 악마의 마기는 마치 수마(睡魔)와 같아서, 그저 모두 내맡기고 편안해지고 싶은 욕구만 들끓었다.
“인간계 자체에는 아무 흥미가 없으니까. 어떤가? 이런 제안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게르베의 목적은 열 번째 뿔을 얻고 마신이 되는 것.
인간계를 넘보는 것도, 영혼을 수확하는 것도 모두 그 수단에 불과했으니 거짓은 아니리라.
“내 욕망이라…. 그렇다면 순순히 목을 내놔라. 네놈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뿐이니.”
레오는 굽어지는 몸을 억지로 세우며 이를 악물었다.
검을 쥐지 않은 왼손이 드디어 가까운 옆구리 한쪽에 닿았다. 손바닥을 힘껏 누르자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고농도의 마나가 체내에 침투했다.
마나 회복제는 덱스에게만 준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차오르는 마나를 오러로 전환하여 그대로 공간으로 뿜어내기 시작했다.
“후…!”
눈앞을 채운 검붉은 안개가 다소 옅어지며 겨우 숨통이 트였다.
아직도 팔다리가 물먹은 솜처럼 무겁지만 아까보다 한결 나았다.
연달아 두 번째 마나 회복제도 사용했다. 단번에 오러를 뿜어내며 사방을 옥죈 마기를 강하게 밀어내자 전신의 감각도 회복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놈! 필멸자가 반신을 당해 낼 것 같으냐!”
거의 다 되었다 생각했는데…!
게르베는 노성을 터뜨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자그마치 수백의 영혼을 소모해 가며 쏟아 낸 마기였다. 그 힘으로도 찍어 누를 수 없다니,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여신의 힘인가? 아니면 제 힘을 숨긴 것인가?’
이유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마기로 치환할 수 있는 영혼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용사를 끝내지 않으면 당할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 그것이 게르베를 움직이게 했다.
손톱을 세운 게르베가 레오를 향해 쇄도했다.
[레오!]
옅어진 마기를 뚫고 들리는 여신의 목소리.
레오도 승부처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오러를 최대치로 방출하며 검을 들었다.
‘아메리아, 아껴 둔 성력 있으면 전부 내놔! 없어도 짜내!’
[믿을게요, 부디…!]
그 뜻에 응답하는 듯 성자의 방울이 빛을 발했다.
막대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느 때보다 밀도 높은 성력이 레오의 체내로 스몄다. 여신의 힘은 오러와 자연스럽게 섞이며 더 빠르게 마기를 태워 나갔다.
카강-!
레오의 머리를 노리던 게르베의 손아귀가 허공에서 멈췄다.
성력을 담은 돌풍의 검기에 막힌 것.
기습에 실패한 게르베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노옴-!”
“나불나불! 일일이 시끄럽다!”
몸의 자유를 완전히 되찾은 레오가 악마의 앞으로 뛰어 올랐다.
동시에 마기를 몰아낸 공간에서 뭉쳐진 바람의 창 여럿이 엄호하듯 게르베의 팔다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잔재주를!”
게르베는 코웃음을 치며 팔을 휘둘렀다. 바람의 창 일부가 게르베에게 적중하였으나 겉가죽을 찢는 수준에 그쳤다.
그 사이 악마의 코앞에 다다른 레오가 검을 뻗었다.
검을 감싸며 휘몰아치던 돌풍의 칼날이 쏘아지듯 전방으로 쏟아졌다. 돌풍의 칼날이 공간을 찢어발기는 파열음과 함께 게르베를 향했다.
단번에 오러를 쏟아 내는, 폭풍(爆風)이라 이름 붙인 기술.
“어찌 인간이 이 정도의 힘을…!”
눈앞에서 폭발적으로 밀려드는 예기.
게르베도 이번만큼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즉시 공간을 장악하던 마기 일부를 체내로 돌리며 신체 강화에 사용했다.
“으윽….”
검 끝으로 폭풍을 쏟아 낸 레오가 휘청거렸다.
뭉텅이로 오러가 빠져나가자 강한 탈력감이 밀려온 것.
세 번째 회복제를 찔러 넣으며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았다.
“…보여 줄 것은 이게 끝이냐.”
폭풍이 휘몰아친 자리에 게르베는 여전히 버티고 서 있었다.
전신이 상처투성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한 것은 겉가죽뿐이다. 방어를 위해 또다시 다량의 영혼을 소모했으나 레오에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반드시 약점은 있을 거야…!’
레오는 초조함을 드러내는 대신, 성력이 스민 눈동자로 더욱 세밀하게 악마의 몸을 훑었다.
악마를 이루는 에너지의 흐름이 마치 크고 작은 혈관처럼 복잡하게 투영되었으나 약점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마신을 앞두고 있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처럼, 뜯어볼수록 놈은 하나의 완성된 존재에 가까웠다.
카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손을 뻗는 게르베.
레오는 무거운 팔을 들어 겨우 그 손을 막아 냈다.
오러는 회복되고 있지만 전신 혈맥의 고통은 한층 배가된 상태다. 당장이라도 쓰러져 눈을 감고 싶지만 지금 검을 놓을 수는 없었다.
우우웅-!
정신없이 부딪히는 와중,
레오는 가슴팍에서 작은 울림을 느꼈다.
물리적인 진동을 느낄 겨를은 없다. 오히려 정신적인 공명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아메리아, 너야?’
[제가 아니에요. 악마와 부딪힐 때마다 붉은 돌이 공명하고 있어요.]
붉은 돌? 메퀸토가 남긴 루비인가.
악마가 인간계에 나타나면 알려 줄 것이라고 했던 그 물건이다.
그것이 왜…?
카가각-!
레오의 검과 게르베의 검붉은 손아귀가 다시 한번 교차했다.
우우우웅-!
그럴 때마다 루비의 공명이 강해졌다.
마치 의지를 가지고 말을 거는 것처럼 느낄 정도였다. 게르베와 가까울수록 더욱 그랬다.
‘…밑져야 본전이지!’
어쩌면 메퀸토 영감의 숨겨 둔 안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레오는 거리가 벌어진 틈에 품속의 루비를 꺼내어 주저 없이 게르베에게 던졌다.
게르베는 반사적으로 팔을 휘둘러 그것을 쳐 냈다.
아니, 쳐 내려 했지만 악마의 팔에 닿은 루비는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흡!”
게르베의 미간이 움찔했다.
일순 뒤틀린 마기.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금방 기운을 정돈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틈.
하지만 레오의 오러안에 훤히 드러났다.
완벽에 가깝게 하나로 연결되던 게르베의 기운에 순간적으로 마디마디 이음새가 나타난 것이.
‘보였다!’
레오의 검은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검 끝에서 피어난 예기가 직선으로 쏘아진다. 전광석화 같은 다발의 찌르기가 게르베의 몸통을 꿰뚫었다.
“커허…!’
이어 성력을 머금은 검기가 다시 한번 날카롭게 허공을 갈랐다.
게르베의 비명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바람 소리로 끝맺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마신을 염원하던 악마, 게르베의 목이 떨어졌다.
* * *
“…얼마나 기절해 있던 거지?”
귓전을 울리는 천둥 같은 소음과 진동.
인상을 잔뜩 구긴 채 덱스가 눈을 떴다.
희고 붉은 빛 줄기가 유성우처럼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지상을 폭격하는 마법의 빛 무리였다.
그제야 마탑 마법사들의 참전이 떠올랐다.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바닥을 집자 누군가 깔아 놓은 듯한 부드러운 천이 손끝에 닿았다.
“정신이 들었나? 그리 길지 않았다.”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창백한 얼굴의 사내가 보였다.
몬젤이라고 했던가?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보고 있자니 괜히 웃음이 났다.
“레오에게 가야 해.”
쉬이이익-!
허공을 수놓은 마법의 빛줄기가 점차 잦아들고 있다.
마탑 마법사들의 참전으로 요새 방어에 성공했지만, 이는 반쪽짜리 승리다. 원흉인 악마를 멸하지 못하면 또다시 마물의 진군이 반복될 것이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덱스가 남쪽 지평선에 솟은 성채를 바라보았다.
필시 레오는 저곳에서 악마를 상대하고 있으리라.
어느새 마법 폭격이 멈추었고.
데르파와 유리아 등 마법사들을 위시한 무리가 말을 달려 요새 남문을 빠져나왔다.
방향은 불길한 검붉은 안개가 흩어지고 있는 후작의 성채.
그 곳에서 그들은 목이 잘린 악마의 시신과 쓰러진 레오를 발견해 냈다.
인간의 승리였다.
회귀 용병은 아카데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