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오전 강의 (2)
여지없이 꽂히는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정의라는 것은 어차피 인간이 개인 또는 단체의 이득을 목적으로 부여한 개념에 불과합니다.”
“계속해보게.”
“하지만 이것도 히어로 사회가 도래한 이후로는 다 개소리가 됐습니다. 개인이 다수를 장악하는 일이 너무 쉬워졌죠. 예컨대 제가 지금 이곳에 있는 여러분을 모두 무참히 살해한다면, 정의의 저울 앞에서 헌신을 맹세한 히어로는 언제 도착할 것 같습니까?”
“아카데미 상주 히어로가 있으니 5분 내로 오겠지.”
“그렇습니다. 5분. 이동계 각성자가 돕는다 해도 1분은 걸립니다. 그리고 빌런은 그 시간이면 도망치고도 남죠. 아카데미를 습격할 정도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을 테니까요. 뭐, 멍청한 빌런이어서 일단 잡혔다 칩시다. 그래도 빌런에게 죽은 학생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피해자와 그의 가족은 과연 정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할까요?”
“이 친구는 피해자의 처지를 통해 우리가 정의의 필요성을 인지한다고 했지.”
“좋습니다. 그럼 빌런의 습격, 히어로의 수습, 정의의 필요성 인지. 이 사이클이 무한히 반복되었을 때도 정의가 존재합니까?”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정의일세. 뜻은 알겠네. 그래서 자네의 주장은 무엇인가?”
“‘히어로니 빌런이니 정의니. 그런 것에 얽매여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라.’가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블린 쳐들어오면 인간의 통속적인 관념들은 물먹은 습자지처럼 녹아버린다.
정의?
그게 밥 먹여줄 거 같아?
“일리는 있군. 다른 학생들도 저 친구의 말을 잘 기억해둬. 내 강의는 주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진행될 터인데, 거기에 매몰되지 말게. 닥친 일들을 하나씩 해내다 보면, 언제고 원하는 목적지 근처까지는 가기 마련이니. 자아, 두 사람 모두 고민의 여지를 제공하는 좋은 주장이었네. 하지만 내가 강의할 보편적인 정의는 꼭 알아야 해. 왜? 시험에 낼 거니까! 7페이지 펼치게.”
아.
진지한 얼굴로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학생들은 교수의 마지막 한마디에 현실로 끌려와야 했다.
* * *
“개소리빌런 말은 잘하더라.”
“아빠가 빌런은 원래 혀 놀림이 대단하댔어.”
“야, 쉿. 개빌 지나간다.”
다 들린다. 이것들아.
개빌이라니. 뭐 이딴 별명이 붙어.
오전은 반 단위로 같은 강의를 듣는지라 이동 경로가 겹친다.
쿡쿡.
바로 옆에서 입을 가리고 웃는 트레이시. 내가 쳐다보자 헛기침하며 괜히 딴청을 부린다.
“참. 다음 강의 준비했어?”
“준비할 게 뭐 있다고.”
“아, 너는 구현계였지.”
다음 강의는 특성 체육. 학생의 특성 개발에 주력하는 강의로 지금의 서히아를 존재케 한 과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학년, 안 뛰어?”
거대화한 마가렛과 흡사한 체격. 황색의 피부. 그와 대비되는 은색 머리칼.
히어로 텅스텐카우, 나이 36세, 특기 뿔 박기.
아침에 교수진들 좀 알아봤다.
“너는 뭔데 걷냐?”
찰랑거리는 금목걸이가 내 콧잔등을 친다. 트레이시는 잽싸게 체육관 안으로 튀어 들어간다.
아니, 쟤도 늦었는데 왜 나만. …하, 애도 아니고 일일이 따지는 것도 우습다.
“생각 중이었습니다.”
“무슨 생각? 대답 잘해라.”
“내 특성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까.”
“네 특성이 뭔데.”
해변을 잠깐 구현했다 취소하자 카우의 눈이 흔들린다.
“구현계? 그럼 네가 그놈이로군. 이번만 봐주마. 들어가.”
안으로 들어서자 1, 2, 3이라는 숫자가 쓰인 넓은 네모 칸이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개빌 교수, 여기!”
트레이시가 이상한 별명으로 나를 부르자 그 소리를 들은 몇몇 아이들이 자기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들썩이는 어깨.
곽재우, 버추얼박스, 도수정 너희 기억했다.
“학년별로 모였나 보네.”
“응. 따로 강의하나 봐.”
“그렇겠지. 수준이 다를 테니.”
칸으로 나누긴 했지만, 같은 공간에 두는 이유도 짐작이 간다.
보고 배우라 이거지.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나야 좋다.
“1학년 집중!”
“윽!”
카우가 종이를 말아 만든 몽둥이를 한 손에 들고 고함치자 귀가 먹먹하다. 엄청난 성량에 멀리 떨어진 다른 학년의 학생들도 이쪽을 쳐다본다.
그들의 표정은 훈련병을 보는 예비군처럼 진실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네놈들이 생각하는 그딴 건 없다!”
“예?”
“아카데미의 비전으로 특성 숙련도가 급상승하는 기적 같은 일은 없다는 말이다.”
어….
“히어로의 근간은 체력! 대인전과 구조작전 하다못해 훈련을 위해서라도 체력은 필수! 봐라, 내 단단한 바디를!”
보디빌더 대회에서나 볼법한 자세를 취하는 카우 교수.
불안하다.
“일단, 달려라!”
종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가장 앞에 있던 소구경의 등을 후려친다. 커다란 소리에 비해 충격은 별로 없었는지, 몸이 흔들리진 않는다.
카우보이모자를 고쳐 쓴 소구경이 달려 나가자 학생들이 우르르 따라붙는다.
“좋아. 하나, 둘. 하나. 너희는 뭐냐.”
가만히 있는 나와 트레이시를 노려보는 카우. 트레이시는 내 눈치를 보더니 행렬의 꽁무니에 후다닥 따라붙었다.
“너는?”
“교수님. 저래서는 훈련이 제대로 안 됩니다.”
“지금 내 교육에 불만이 있다는 건가?”
“예.”
우지직.
종이 몽둥이가 단번에 구겨진다.
“제게 동생이 있는데, 최근 국가대표를 노리고 훈련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훈련을 도왔었지요.”
“네가 어떻-, 아!”
카우 교관과 내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해도 되겠습니까?”
“훗, 1번 큐브 전체를 부탁하마.”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 작은 목소리로 슬롯 명을 읊조렸다.
‘미르토스 해변.’
푸욱.
“헉!”
“꺅-”
“이건.”
“개빌!”
모래사장에 발이 빠진 1학년들이 이쪽을 노려본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덤덤하게 흘려 넘기고 해변 의자와 코코넛 주스를 카우에게 건네며 비틀거렸다.
“으윽.”
“왜 그러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무리한 듯해서.”
“이 의자에는 네가 앉아라. 쉬어도 좋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눕겠습니다.”
“…누우라고는 안 했지만, 알았다.”
카우 교수는 달리는 학생들 옆에서 구령을 붙였고 나는 그 모습을 편안히 관람하며 주스를 마셨다.
아이들의 원망 어린 눈길이 끊임없이 내게 닿는다.
뭐, 어쩔 건데.
낄낄.
신입생의 체력이라는 것이 특성의 힘을 빌리지 않는 이상 다 고만고만했기에 딱히 눈이 가지 않았다.
하여. 선글라스를 끼고 2, 3학년을 살폈다. 과연 선배들이라고 해야 하나. 다른 교수 지도 아래 우리와 비슷한 체력 훈련을 함에도 각자의 특성을 활용하는 걸 기본으로 한다.
“후욱, 후우…. 그만! 모래사장 구현도 해제해라.”
“예, 교수님.”
나는 빠릿빠릿하게 의자를 접어 정리하고 해변을 해제한 뒤, 트레이시 옆에 가서 섰다.
녀석의 뾰족한 눈이 나를 흘겨봤으나 슬쩍 코코넛 주스를 건네자 사그라든다.
“지금부터 특성 훈련에 들어갈 텐데. 주의사항이 있다. 절대 사람에게 사용하지 말 것. 광범위일 경우 내게 미리 보고할 것. 이해 못 한 멍청한 놈 있나?”
“없습니다!”
어느새 군기가 바짝 든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외치자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인 교수가 근처의 홀로보드를 조작한다.
그러자 1번 칸에 다수의 투명한 정육면체가 생겨났고 각 면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저 안에서 특성을 사용해라. 내가 여기서 지도하마. 너는 들어가지 말고 방금처럼 최대한 넓게 해변을 유지하도록. 이름이?”
“남만혁입니다.”
홀로보드에서 내 이름을 찾아 체크하고 옆에 ‘구현계’라고 적는 카우. 그러자 내 것으로 추정되는 정육면체 하나가 사라졌다.
“시작!”
30여 개의 방에서 온갖 특성들이 발현된다. 나는 하나하나 지켜보며 잠재력이 높아 보이는 특성을 눈에 담아뒀다.
‘생각보다 없네.’
초반에 A반의 애들과 엮이는 바람에 눈이 너무 높아진 걸까.
훈련 안 하고 뭐 하냐는 교수의 독촉에 어쩔 수 없이 해변을 최대범위로 구현. 그러자 2, 3학년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해변 의자에 누웠고 선글라스 너머로 보니 다른 학년의 교관 둘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솔직히 예상 밖이긴 하다.
2학년은 그렇다 쳐도 3학년 쪽까지 닿을 줄이야.
확실히 집 뒷마당에서 훈련하는 것보다는 성장 속도가 빠르다.
이대로만 가면 졸업하기 전에 전성기 시절의 구현력을 달성할지도.
‘슬슬 대형 어종도 잡히겠어. 낚싯대를 좀 구해 놓을까.’
카우 교수는 정육면체 방과 연결된 마이크를 잡고 학생 하나하나에 자신의 노하우와 단련 방법을 전수했다.
솔직히 전투 지망 히어로를 제외하면 본인에게 맡기는 방식의 조언이라 큰 영양가는 없어 보였다.
“팔을 늘릴 때 회전을 줘. 그렇지.”
“플라스틱화? 무기를 만들어 봐라.”
“탐색계는 그 방에서 탈출하는 걸 목표로 하도록.”
“어떤 상황이든 침착함을 유지하는 게 우선이다. 실패해도 집중력을 잃지 마라.”
특히 F반의 경우 곽재우와 소구경에게만 가르침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방치나 마찬가지.
탓할 생각은 아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교수라도 모든 특성을 연구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1학년은 체력 중심인 듯하고. 그쪽 전문가를 고용했겠지.
카우는 자신이 가진 지식 선에서 최대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교수님.”
“음?”
“F반 애들이 대충하는 게 보여서요. 잔소리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약 올리면 열받아서라도 열심히 할 겁니다.”
카우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내게 마이크의 조작법을 알려줬다.
먼저 도수정의 방과 연결하고.
“야, 나 같으면 방 전체를 단절시켰겠다.”
“…개빌? 말했잖아. 나는 손에 쥔 것만 할 수 있어.”
“네가 스스로 한계를 정한 건 아니고?”
“…아냐.”
멈칫하는 도수정은 이내 부정을 내놓는다.
“그럼 평생 손안에 든 것만 단절시켜서 살던가. 그런데 그래도 괜찮겠냐? 아카데미에 겨우 그거 하려고 왔어?”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떠들어.”
“몰라.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너무 뻔히 보이잖아.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은 F반의 도수정. 야, 너. 아버지한테 안 미안하냐?”
택시 기사의 연봉은 많지 않다. 경제적으로 부유할 리 없다. 그런데 딸이 서히아에 왔다는 건. 빚져서 보낸 거라고 봐야지.
그 부담을 도수정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다.
“이, 이-”
투명한 벽을 내려치며 나를 노려보는 도수정.
“됐네. 잘하면서 성질은.”
주먹이 닿은 부위의 벽이 점차 희미해지며 구멍이 뚫렸다.
“익, 어? 이게 왜….”
특성도 신체 일부처럼 감정을 자극하면 격정적으로 반응한다. 특히 사춘기에는 더 심하다.
수십 년 뒤에 알려지지만, 이때가 각성자의 잠재력을 늘릴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아버지 언급해서 미안하다. 근데 열심히 하자. 장학금 쥐여 드려야지.”
입술을 꿈틀대며 뭐라 하기에 나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끄고 다음 방으로 옮겼다.
곽재우.
“분신사바 분신사바…, 조상님 제게 임하시어….”
“너 뭐하냐.”
“조, 조상님?”
조상은 무슨.
…잠깐. 이거 잘하면.
“네 이놈!”
“허억.”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죄송합니다!”
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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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