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선택과목 (2)
매저드 교수는 골드우드에게도 할 말이 없는지 물었고 머뭇거리던 녀석은 대뜸 눈물을 쏟으며 교수에게 매달렸다.
“크흐윽, 교수님!”
매저드는 놀라면서도 골드우드의 등을 두드리며 달랬다. 끅끅대던 녀석의 입에서 집안 이야기가 나왔다.
비교당하는 삶, 증명을 위한 입학. 한낱 해골조차 소멸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
쌓인 게 많았는지 아이처럼 펑펑 울던 녀석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슥 돌린다.
으이그. 사내자식이 눈물이나 짜고.
하여튼 꼴 보기 싫은 신파극을 계속 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대로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잠깐, 자네에게 과제를 하나 줌세.”
“과제라면?”
썩을. 골드우드가 교수에게 안기는 순간 튀었어야 했다.
“다음 강의까지 아무 해골에 스컬러를 부여 해서 오게나.”
-스컬러, 해골에 속성을 부여하는 보조 마법. 책에는 난이도가 높으니까 기초를 닦은 후에 시도하라네.
못하겠다고 해봐야 허허 웃으며 학점을 똥으로 주겠지. 교수들이 그렇잖은가.
점수가 절실하지는 않아도 진급할 정도는 받아둬야 하니, 어쩔 수 없나.
“알겠습니다.”
“기대함세. 자네는 가도 좋아.”
나는 곧장 다음 강의실로 이동했다.
드륵.
아직 강의 시작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는데도 두 사람이 와 있었다.
도수정과 그레이스 멜론.
“너!”
격하게 반응하는 도수정을 무시하고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멜론은 나를 힐끔 보곤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드륵.
강의실 앞문이 열렸고 도박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왔을 법한 선한 인상의 사내가 들어와 무뚝뚝한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본다.
“뭐 하러 왔나.”
비아냥과 한탄이 반씩 섞인 어투. 멜론과 도수정이 몸을 움츠린다.
“팔자 좀 고쳐보자.”
“뭐라?”
“한탕 해 먹고 유유자적 사는 게 제 꿈입니다.”
그블린을 싹 쓸고 여생 편안하게 보내는 게 목표니까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기회주의자로군.”
…도박 강의를 연 댁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나는 국가에서 지정한 도박 근절 홍보 대사를 10년째 연임하고 있다. 이 강의도 캠페인의 연장이지. 그러니 그딴 표정은 치워라.”
이런, 티가 많이 났나.
그는 교탁에 꽃무늬가 들어간 고급스러운 상자를 내려놓고는.
“너희 같은 학생을 뜯어고쳐 사람 만드는 게,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
정면의 홀로보드에 큼지막한 글씨를 썼다.
[도박판을 지배하는 법]
손바닥으로 쾅 내려치고는.
“간단하다. 애초에 도박판에 끼지 않으면 된다.”
“네?”
“도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동의하나?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설계를 해라.”
…예?
“호구를 판에 앉히기만 해도 네가 굳이 상대와 심리 게임을 해가며 애쓸 필요 없이 돈이 들어온다.”
이 교수, 도박 근절 홍보 대사라고 하지 않았나?
“설계를 하라는 게 아니라, 호구만큼은 피하라는 뜻이다! 최선은 정당한 노동으로 깨끗한 월급을 받는 거고.”
고스트핸드 교수의 말이 잠시 멈춘 사이, 도수정이 눈치를 보며 손을 들었다.
“뭐지?”
“만약 본의 아니게 도박판에 끼게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그럴 때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판을 엎고 튀어라.”
이건 정말 교수가 할 말이 아닌데.
“큼! 폭력적인 수단으로 너를 억압하고 있다면,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하는 게 좋겠지. 기술 몇 개 알려주마.”
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서 포커 카드와 화투패를 꺼냈다.
“보편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카드들이다. 룰렛이나 주사위 게임은…, 나중에 현장에 가면 알려주마.”
“네!”
바로 이런 걸 원했다.
“명심해라. 나는 기술의 파훼법을 알려주는 거지 써먹으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네!!”
멜론마저 도수정과 함께 합창한다. 의외네, 이런 데 관심이 있었나.
“잘 보도록.”
바닥에 카드 더미를 놓고 손바닥을 앞뒤로 뒤집었을 뿐인데 그의 손에는 스페이드A 네 장이 들려 있었다.
거기서 또 한 번 뒤집자 스트레이트 플러시, 그다음엔 백, 로열 순으로 카드가 바뀌었다.
“어….”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건가.
“교수님, 특성 쓰신 거죠?”
“아니.”
“에이, 카드 더미를 만지지도 않고 어떻게 이래요.”
“그게 호구와 설계자의 결정적인 차이다.”
교수가 소매를 걷자 손바닥 크기의 기계가 팔뚝 안쪽에 부착돼 있었다.
“이건 일주일 전에 나온 신형 카드 사출기다. 현장에서는 이미 사용되고 있다더군.”
입력해둔 동작대로 팔을 움직이면 해당 카드를 손으로 쏘는 기계였다.
이런 식으로 몇 개의 속임수 샘플을 보여주고 알아보는 법을 가르친 교수가 마침내 강의실 중앙에 있는 넓은 테이블에 앉았다.
“와라, 지금부터는 실전이다.”
처음 한두 판은 언제 속임수를 쓰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으나 리쳇의 도움을 받고부터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만혁이라고 했나. 너는 어디 가서 당하진 않겠군. 너희는 분발해라. 다음은 각성자가 타짜일 경우를 보여주마.”
그는 극히 평범하게 카드를 섞었다. 심지어 탁자에 설치된 셔플 기계에 카드를 맡기는 퍼포먼스까지 선보였는데, 막상 뒤집어 펼치자 색깔별로 정렬되어 있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내 특성이다. 보이지 않는 손.”
질문한 도수정의 앞머리가 당겨지고 코가 좌우로 흔들린다.
“으읏, 놔주세요.”
“교수님 같은 각성자랑 판에 앉으면 무조건 질 수밖에 없지 않나요?”
“그래, 아무리 뛰어난 타짜도 이 방면에 특화된 각성자는 이길 수 없다. 그러니까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도박장에 가지 말아야 해요.”
멜론이 정론을 말하고.
“각성자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판에 앉았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섞을 땐 죽으면 되죠.”
도수정이 나름의 각오를 다졌다면.
“그놈을 캐스팅하거나 호구로 앉힐 판을 짭니다.”
나는 순수한 욕망을 뱉었다.
“미친놈.”
강의 내내 유지되던 교수의 포커페이스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강의는 현장에서 하겠다는 고스트핸드 교수의 선언을 뒤로하고 F반으로 돌아오자 반장 추천이 한창이었다.
“나는 도수정을 추천한다.”
“동의.”
“나도.”
소구경이 추천하고 곽재우와 버추얼박스가 표를 보탠다.
저기서 흐뭇해하는 도수정 본인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4표가 몰린 상황.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긴 싫었기에 나도 도수정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자 도수정을 추천한 셋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아니, 왜.
그때 트레이시 그웬이 손을 들고는.
“저는 남만혁을 추천합니다. 이유는…, 학생인데 교수라서?”
와하하!
아이들의 웃음에 농담으로 여겼는지 데커드 교수는 홀로보드에 내 이름을 적진 않았다.
“진짠데요.”
“아, 미안해요.”
그제야 적히는 내 이름. 도수정이 얼굴을 오만상 구기며 자기 표에 내 이름을 쓴다. 그렇게 싫으면 다른 사람 적으면 되잖아. 쟤도 은근히 자존심 세네.
이로써 4 대 2.
“참, 저도 투표권 있는 거 아시죠? 저는 만혁 군에게 표를 행사하겠습니다.”
갑자기 데커드가 참전해 4:3.
전혀. 정말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반장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수정이!”
“고마워!”
히어로명처럼 푸른 머리칼의 소녀, 리얼블루가 도수정에게 안기며 표를 내자 블리딩블러드가 피로 만들어진 손으로 종이 한 장을 데커드에게 전달했다.
피로 범벅된 종이에는.
“도수정.”
도수정이 고맙다며 블리딩블러드의 창백한 손을 잡고 흔들자 녀석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너네 뭐하냐.
하여튼 이제 6:3.
기적처럼 내가 세 표 받는다 해도 무승부. 거기선 양보하는 그림으로 가면 나쁘지 않게 마무리되겠지.
“남만혁, 한 표요! 쟤가 반장이면 지루하진 않을 거 같아요.”
칸탄테.
“산장. 부럽다. 초대 부탁.”
마인 트래퍼.
“오염된 건 햇빛 아래 놔둬야 그나마 깨끗해지잖아요?”
클린에어.
다 좋은데 클린에어 너 그거 무슨 뜻이냐.
“데커드 교수님.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저는 산장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여러분은 도수정 학생이 반장이 되어도 괜찮은가요?”
몇몇이 아쉬워하며. 특히 클린에어가 몹시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데커드의 말에 긍정한다.
선거도 끝났겠다 산장에 가려고 교실을 나서는데. 트레이시가 다가왔다.
“내 특성이 네가 반장 해야 한다더라.”
“왜?”
“나야 모르지. 이 녀석은 가끔 답만 던져주고 추론은 나보고 시킬 때가 있거든.”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이며 기숙사로 가는 아이들과 합류하는 트레이시.
…그냥 하는 말이겠지.
* * *
30여 분의 등산 끝에 산장 도착.
“얘들아, 형 왔다.”
덜걱, 달그락.
장작을 쌓던 일식이와 땅을 고르던 두식이가 내 부름에 달려와 고개를 조아린다.
옳지. 너희는 예의가 바르구나. 내 동생 나라는 아무리 인사 좀 하라 해도 메로나가 없으면 볼만 부풀리는데 말이야.
저 둘이 아침에 공수해둔 물로 대충 씻자 하늘 저편에서 반가운 모터 소리가 들렸다.
두두두두.
왔다.
저 드론이 가져오는 보급품이 없었으면 산장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두식아, 인사해야지.”
덜걱.
드론은 삽을 들고 좌우로 흔드는 녀석의 모습을 한동안 지켜보다 돌아갔다.
“오늘은 뭐가 왔으려나.”
상자를 열자 편지가 먼저 보였다.
[제가 준 스톤은 잘 쓰고 있지요?]
스톤? …아, 내 법봉의 일부가 된 그거 말하나 보네.
편지는 뒷면에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그 트레이닝스톤은 귀한 것이니 분실하지 않도록 하세요.]
단련석이었어?
아시아에서는 단련석이라 불리는 이 물건은 품고 잠드는 것만으로도 특성 숙련도가 조금씩 오른다.
엄지손톱보다 큰 걸 본 적이 없어서 이게 단련석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 트리거가 단련석이어서 한 번에 슬롯이 열렸던 건가.’
모종의 시너지가 작용했나 보다.
나는 돌법봉을 꺼내 유심히 살폈다. 단련석은 맨손으로 잡고 좀 기다리면 온기가 올라오는데, 이건 돌처럼 마냥 차갑다.
‘효능이 다했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없는 건 없는 거다. 나는 미련을 버리고 상자에서 나온 음식과 옷가지들을 정리해 텐트에 넣었다.
낮에 사둔 삼겹살을 소금과 후추에 재워 놓고 어제 일식이와 함께 만든 의자에 앉았다.
“으음.”
분명 수평을 맞춘다고 맞췄는데 흔들의자가 돼버린 의자에 몸을 기대자 피로가 좀 풀리는 기분이다.
“리쳇, 스컬러 마법 부분 좀 읽어줘.”
-해골을 다루는 이들을 위한 세 번째 마법. ‘스컬러’는 내 오리지널 매직이다. 시작은 화이트 최종은 레드. 그 이상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대가 탐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네크로학파 스컬부 출신이면 발동식만 보고도 금세 따라 하겠지만. 이 몸이 마지막 계승자였으니 아마 아닐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부터 읽고 여기까지 이해한 그대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발동식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발동식을 외우는 도중, 매저드 교수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이 과제는 성공하라고 낸 과제가 아니다. 학생에게 지향점을 던져주고 향상심을 자극시킨 후, 절실한 마음으로 기초를 익히게끔 유도하는, 일종의 티칭 테크닉.
과연 고령의 교수답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신비롭게도, 내 낭만이 반응했다.
【‘뾰로롱☆마법소녀 블랙 위치’가 동일계통 주문에 흥미를 느낍니다.】
【주문, ‘스컬러’ 학습 중…. 완료.】
저지를 어깨에 얹고 블랙 위치를 부르자 내 입에서 주문이 튀어나왔다.
“시릴리 시리, 샤리라 랄라.”
돌법봉을 들고 요란하게 움직이는 나를 멀뚱히 보던 일식이의 두개골에 새까만 머리카락 한 가닥이 돋아났다.
“…이게 끝?”
휘오오.
세찬 봄바람이 일식이의 외로운 머리칼을 흔들었고, 어째 일식이의 안광도 흐물거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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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