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번퓨즈 (2)
-알립니다. 현재 뒷산에 화재가 발생했으므로 통행에 주의를…
화재라는 단어가 귀에 꽂힌 그레이스 멜론은 강의가 한참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을 열고 부유로 날아올랐다.
“그레이스! 위험해!”
“미안, 구해야 해.”
혹시 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메이든가의 사람들처럼.
마가렛의 만류를 무시한 멜론은 자신의 부유 능력과 내구라면 화마에서도 잠시나마 버틸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산으로 향했다.
이동하던 중 화재를 진압 중인 소방관을 발견. 그들에게 구조가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려는데, 익숙한 뒷모습의 사내가 보였다.
“남만혁?”
“퀸? 네가 여긴 왜. 아, 또 히어로병 도졌구만? 아직 학생이니까 까불지 말고 돌아, …아니지. 나 좀 태워줘라.”
저는 이 소년이 싫습니다. 멋대로 퀸이라 부르는 건 상관없지만, 자기도 학생이면서 까불지 말라니요. 어이가 없네요.
“내가 왜.”
“자자, 정색하지 말고. 옛날처럼 해보자고.”
그러면서 제 어깨를 잡는 남만혁의 행동은 어째서인지 몹시 익숙해 보였습니다.
짜증을 담에 그의 손을 쳐내려는데.
“방화범 잡아야 하니까, 도와줘라. 내 집 태운 놈 얼굴 좀 보게.”
…하아.
“꽉 잡아.”
“오!”
토너먼트에서 그와 대련한 뒤로 부유의 숙련도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물론 부모님이 물려주신 트레이닝스톤의 영향이겠죠.
아무튼 이 뻔뻔한 너구리 같은 남자를 골려주기 위해 최대 속도로 수직 상승했는데, 그는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처럼 환호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또 제 등 위에서 서핑 자세를 잡는군요.
…언젠가는 떨어트리고 말겠어요.
쾅!
“저기다. 내려가자.”
“후웁.”
갑자기 긴장이 몰려옵니다. 빌런과 싸우는 걸까요.
“너는 가만히 있어. 오빠가 하는 거 잘 보라고.”
누가 오빠라는 건지!
반박하고 싶었지만, 빌런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자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화염 확산!”
방금 하늘에서 본 커다란 폭발이 코앞에서 다시 재현됩니다.
직감했습니다. 저 폭발은 저의 내구로 버틸 수 없습니다. 이대로 죽는…걸까요.
“에이, X앙.”
중요한 행사에 가기 전, 구두에 진흙이 묻은 아버지께서 저리 가벼운 욕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남자는 저 불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그가 제 몸을 덮고 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우리 위로 물이 엄청난 양의 쏟아져 내렸어요.
증기가 저희를 날려 보냈고 그러는 동안 남만혁은 제 머리를 꽉 끌어안았습니다.
…심장이 너무 날뛰네요. 그에게 들린다면 너무 수치스러울 것 같습니다.
바닥을 한참 구르고 사위가 조용해지자 그는 저를 일으켜 세우고 이리 말했습니다.
“여기 있다가 조용해지면 돌아가.”
“그, 방화범은요?”
“저런 건 내 일이니까. 내가 처리해야지.”
그러고는 어깨를 툭 치며 수증기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구르면서 바닥에 머리를 세게 부딪친 걸까요. 그의 뒷모습이, 조금.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
으아앙.
“울지 말래도.”
간이 수술실이 갖춰진 구급차에서 나온 퓨즈가 큐링 힐과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울어 젖히는 바람에 다음을 기약하고 일단 매점으로 데려왔다.
입에 뭐라도 넣으면 조용해지겠지.
읍.
만하장사 소시지를 까서 넣어주자 그제야 울음이 멎었다.
행복한 얼굴로 몇 번 우물거리던 퓨즈가 또 울상이 되기에.
“또 왜 울려고 그러냐.”
“너 때문에 워터파크 못 가잖아!”
“워터파크?”
“물놀이하고 싶었단 말야.”
난 또 뭐라고.
“그런 건 원 없이 하게 해 줄 테니까 그만 울어.”
“진짜?”
“그래.”
“히히.”
외견상 퓨즈는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13세에 불과하다.
내가 알기로 12세가 되기 전에 크게 한 번 다치고 정신연령이 퇴행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기에게 총을 들려준 것처럼 특성을 마구잡이로 난사하고 다니는데, 다행히 파괴적인 능력은 아니어서 그 자체로 큰 피해는 없었다.
문제는 퓨즈의 엄청난 기동력을 이용해 테러를 일으켰던 번.
‘그놈도 완전 쓰레기는 아니었지.’
짧게 대화를 나눠보니 아직은 사람의 목숨을 무겁게 여기는 게 느껴졌다. 그게 동료 한정이라 해도, 가망은 있다.
이 바닥에는 동료를 소모품으로 여기는 놈들도 널렸으니.
막 소시지가 다섯 개째 퓨즈의 입에 들어가는 때에 우리 주변을 사람들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히어로.
그들 중 대표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무전기에다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이?”
그가 팔꿈치로 내 팔을 툭 친다.
“오늘 만난 사이. 친해질 예정이고. 헌팅이라면 딴 사람 알아봐.”
뒤에서 큭큭 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은 빌런이다.”
“그쪽도 빌런 아닌가. 나 지금 팔 아픈데.”
팔꿈치에 맞은 자리를 쓱쓱 비비자 중년 히어로가 눈썹을 들썩였다.
“자기를 번이라 밝힌 방화범을 안으로 들여보낸 년이 있다. 누굴까?”
소시지를 씹는 퓨즈의 눈알이 거세게 흔들린다.
“어허, 히어로 양반. 거, 생사람 잡지 맙시다. 이 친구는 피해자라고 피해자.”
“잠깐, 너 근데 우리 아카데미 학생 아니냐?”
“어.”
뭐.
“…됐다, 잡아라.”
“악! 왜, 왜! 나는 아무 잘못 없단 말야!”
손목에 두꺼운 수갑이 채여 남자 둘에게 끌려가는 퓨즈. 녀석의 간절한 눈이 내게 닿는다.
측.
“아카데미에 불법 침입한 이인조 포획 완료. 작전 종료. 다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소방팀 파이팅!
-한잔할 사람?
퓨즈가 매점을 벗어나기 직전. 내가 중년 히어로의 손목을 잡았다.
“음?”
“선배, 그러지 말고 3시간만 주십쇼.”
내 갑작스러운 존대에 그가 픽 웃는다.
“내가 왜.”
“저 친구 생체연령 스캔하면 나올 텐데, 13살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한 이유가 뭔지 압니까?”
“떡잎부터 노란 놈들의 사정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
“물놀이가 하고 싶어서. 태어나서 고무대야에 물 받고 장구 치는 것도 못 해 봤대.”
“관심 없다.”
“이봐, 당신. 히어로잖아. 미래의 빌런이 될 수도 있는 아이를 봤으면, 잘 달래서 바른길로 인도해야 정상 아니야? 만약 나중에 쟤가 슈퍼빌런이 되면? 그럼 그거 당신 책임이야. 쟤가 앞으로 죽이는 모든 사람은 당신이 죽이는 거라고. 감당할 수 있겠어? 자식에게 안 부끄럽겠냐고.”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무어라 하려 하기에 내가 재차 말을 이었다.
“억지인 거 알아. 근데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많이도 아냐. 딱 3시간. 그거면 돼. 와서 감시해도 좋고.”
입을 닫은 중년 히어로가 주변 동료들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한 시간.”
“오케이.”
나는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주변이 뻥 뚫려 있어 풍경이 훌륭하다. 탄내가 좀 나기는 하지만, 이 정도야 지중해의 바닷냄새로 덮을 수 있다.
옥상의 구조물과 경계를 눈에 담은 뒤, 집중.
“그리스 미르토스 해변.”
끼룩-
“와아아!”
U자 형태의 해변. 풀과 비슷하면서도 바다의 파도를 즐길 수 있는 구조로 구현하자 퓨즈가 해맑게 웃으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어느 히어로가 ‘엇!’ 하며 나서려 하기에 내가 수심이 얕으니 괜찮다고 하자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인다.
“들어가실 분?”
화재 현장에서 뛰어다녔으니 물에 들어가서 세수 정도만 해도 개운할 테지.
“업무 중에 놀 생각하는 멍청이는 내 팀에 없다.”
아, 네. 멍청이스쿼드 대장님. 댁 말고는 다 바짓단 걷고 있었거든.
“그러시던지.”
손바닥으로 물을 때리며 깔깔대는 퓨즈의 모습에 히어로들의 표정이 점차 느슨하게 변했다.
30분쯤 지나자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퓨즈.
“왜?”
“혼자는 별로야. 같이 놀자.”
그렇겠지.
보관함에 넣어둔 고무보트를 꺼내 수면 위에 띄우자 좋아하며 올라와 방방 뛴다. 그러다 빠지고 올라오고를 반복하며 물을 먹었고.
“콜록, 윽…. 나 또 피나.”
손에 묻은 피를 펼쳐 보이며 나를 바라보는 퓨즈.
‘큐링 힐이 완전히 치료한 거 아니었나?’
나는 곧장 해변 구현을 취소하고 히어로들이 따라오든 말든 퓨즈를 큐링 힐이 있는 곳에 데려갔다.
“웬 바다? 구현계라고요? 미쳤습니까? 상처에 소금물 뿌리면 안 된다는 거 몰라?”
다 나은 줄 알았지….
하여튼 안색이 급변한 큐링 힐이 퓨즈를 구급차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자 나를 바라보던 히어로들의 눈이 짜게 식었다.
“기어코 물에 빠트려서는.”
퓨즈가 뛸 때 장난으로 보트를 밀긴 했다.
“저 어린애가 얼마나 놀랐을까.”
“큰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흠!”
멍청이스쿼드 단원들이 퓨즈를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중년 히어로가 헛기침을 한다.
“…하하, 저만한 딸이 있어서.”
“저는 조카가 중학생이라.”
“조용.”
“넵.”
얼마 후, 모두의 우려를 산 퓨즈가 걸어서 나오자 몇몇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일주일은 요양해야 하고. 어디 갇히더라도 밥은 꼭 챙겨 먹이세요. 보호자. 아시겠습니까.”
“예. 들으셨죠? 우리 애 좀 잘 챙겨주세요.”
“…그걸 왜 내게 말하나.”
중년 히어로가 답하기에.
“퓨즈 감시, 그쪽이 할 거 아닌가?”
입술을 꿈틀거리는 것이 그런 생각이었던 건 맞나 보다.
“남만혁 학생. 잠깐 이리로.”
큐링 힐이 구급차에 달린 홀로보드에서 뭔갈 보던 중 굳은 얼굴로 나를 부른다.
“저 아이 말입니다. …특성이 하나 더 개화한 거 같습니다.”
“예?”
퓨즈가 복수 특성이었단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확실한 건 검사를 더 해봐야 알겠지만, 조작계 같습니다. 일주일 뒤에 꼭 검사받아보세요.”
“고맙습니다. 큐링 힐 선생님. 역시 최고의 힐러시네요.”
“으핫, 크음. 아닙니다.”
퓨즈가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오니 중년 히어로가 내게 손목의 홀로와치 보이며.
“시간 됐다.”
“예, 데려가세요. 참 퓨즈야.”
“응?”
“너 특성 하나 더 각성했을 수도 있대. 조작계라는데?”
“정말? 와아! 아까 물에서 놀 때 약간 느낌 이상했었는데. 그때였나 봐!”
“대단하네. 나는 하난데.”
“히히.”
내 영혼 없는 칭찬에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는 퓨즈.
이야 순수하다 순수해. 내 동생 나라가 퓨즈 반만 닮았어도 여한이 없겠네.
“데려가쇼.”
“…형은 길지 않을 거다.”
“당연하지. 쟤가 뭘 했다고.”
물론 시켜서 한 것도 죄다. 죄에 대한 개념이 없어도 죄를 지었다면 그건 죄다.
그러나 사연을 듣고 정상참작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아직도 판사가 사람인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 *
서히아는 교장의 화려한 외교 덕에 반쯤 치외법권으로 인정되고 있다. 학생 간 폭행이나 살인에 준하는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내부의 사건을 외부에 알릴 의무가 없다.
금일 재판의 판사를 맡은 교감, 프리실라 루드라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번. 서울 히어로 아카데미에 무단 침입 및 방화를 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인정합니다. 하지만 재판장님. 퓨즈는 아닙니다.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제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저도 전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당사자의 의견이 궁금하군요. 퓨즈, 할 말 있습니까?”
“저는…”
* * *
나는 오늘 하루만 기숙사 옥상에서 자는 걸 허락받았다.
그냥 방 하나 주면 될 텐데. 교장 놈. 언젠가 기회가 되면 머리털을 다시 자라게 한 다음 뽑아버리겠어.
두두두.
교감! 믿고 있었다고 젠장!
보급품 상자를 열자 이번에도 쪽지가 가장 위에 있어 꺼내 읽었다.
“…어? 아니, 나는 왜?”
[추 팀장에게서 남만혁 학생의 호소를 전달받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죄가 가볍더라도 벌은 받아야 합니다.]
[번은 방화. 퓨즈는 침입죄를 물어 각각 삼림관리 3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남만혁 학생이 그들의 의식주를 제공하고 빌런이 되지 않도록 잘 교화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매주 10그루 이상의 나무를 그들과 함께 심으세요.]
[반에서 ‘교수’라 불리는 남만혁 학생이라면 잘 해낼 거라 믿습니다.]
분노하며 습관적으로 쪽지를 뒤집었을 때. 나는 심장이 싸늘하게 변하는 느낌을 받았다.
[참, 퓨즈가 재판장에서 당신을 아빠라 칭하더군요.]
[제가 생각하는 그런 플레이는 아니겠지요?]
아니다, 이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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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