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당구 요정 (1)
나를 당황케 한 쪽지는 그것 말고도 한 장 더 있었다.
[남만혁 학생이 거주하던 산은 BM1107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금일 자정을 기준으로 ‘남 마운틴’으로 바뀌게 됩니다.]
[번과 퓨즈를 잘 교화할 시 지금부터 향후 30년간 남 마운틴을 남만혁 학생의 사유지로 인정하겠습니다.]
[하나 더. 외부의 물품을 들여오는 것도 묵인하겠습니다. 단, 아카데미 내부 시장을 교란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남만혁 학생이라면 잘 알 것이라 믿습니다.]
두 장짜리 편지는 그렇게 끝이 났다. 나는 종이를 붙잡고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확실하다.
“외부 물품 반입 허용.”
흐, 흐흐.
시장을 교란하지 말라는 사족이 뒤에 붙어 있으나 관계없다. 여기서 돈을 벌 것도 아니고.
본래 아카데미 소속 학생은 외부에서 일정 이상의 영치금, 아니 용돈을 못 받게 되어 있다.
전에 편의점에서 보니까 매달 인출 한도가 백만 원이더라.
확 저택을 지어버려?
아니면 그블린전을 대비해 산 전체를 거점화하는 것도 괜찮겠다.
뭐가 됐건. 산장이나 텐트 같은 허름한 먼지 구덩이는 이제 안녕이다.
‘묵인하겠다는 말이 좀 걸리긴 하는데.’
공개적으로 들통나면 봐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외부의 물품을 들키지 않고 내부로 들여오는 운송 수단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저 멀리 달을 등지고 날아가는 드론이 보였다.
‘저거다.’
커피마저 배달이 되는 한국이었기에 세계 그 어디보다 빠르게 드론 배송이 실현되었고, 이는 아카데미도 마찬가지.
밤늦은 시각임에도 하늘을 돌아다니는 드론의 숫자는 낮과 그리 다르지 않다.
‘리쳇이 돌아오면, 시작이다.’
* * *
다음날 점심시간.
“바다다!”
“퓨즈! …미안하다.”
“됐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빠지지 않게 네가 잘 지켜봐.”
“알겠다.”
번퓨즈가 남 마운틴…, 기니까 그냥 남산이라 하자. 아침에 번이 나무 묘목을 한가득 지고 올라왔었다.
“엑, 이게 뭐야. 아빠. 너무 얕아!”
와, 진짜 아빠라고 하네. 교감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장가도 못 간 사람한테 아빠가 뭐냐.”
“…아빠 아냐?”
엄청나게 상처받은 표정으로 올려다보기에 차마 거기에다 대고 그렇다고는 못하겠기에.
“삼촌은 안 되겠지? 아, 알았으니까 울지 좀 마라. 그리고 물이 얕은 건 네 상처 덧날까 봐 그런- 야야, 발만 담가 발만.”
“히히. 손 잡아조.”
으휴. 귀여워서 봐준다.
전에도 이 말 했던 거 같은데. 데자뷘가.
“나무는 내가 심겠다.”
교감이 요구한 일주일에 열 그루. 주말에 식이 형제가 삽질 좀 하면 금방 끝날 일이다.
“그건 내가 할 테니까. 너는 특성 훈련이나 해.”
“어째서? 나는…, 빌런이다.”
“야, 빌런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 어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녀석이 빌런 운운이야.”
나를 위아래로 훑는 번.
“너 눈 왜 그렇게 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고는 미니 펜 라이트를 부수더니 물에 손을 넣고 작은 폭발을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번. 재확산을 연습하는 모양.
저거 잘 쓰면 그블린 천인대 정도는 한 방에 와해시킬 수 있을 듯하다.
좋아, 너는 광역 딜러로 키워주마.
곧 오후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기에 구현을 해제하고 번에게 퓨즈를 맡겼다.
“아직 아픈 애니까. 뭐 시키지 말어.”
“그 정도는 안다. 텐트는 둘 다 써도 되나?”
“그래. 음식도 안에 있으니까, 배고프면 먹고. 좀 늦을지도 모르니까 기다리지 마.”
어제 고스트핸드 교수의 강의가 원래 현장실습이었는데, 화재 때문에 하루 밀렸다는 공지가 올라왔었다.
“알았다.”
둘만 놔두고 내려가려니 어째 불안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고, 그때마다 퓨즈가 손을 흔든다.
“아빠- 다녀와-!”
“오냐. 돈 많이 벌어올게.”
꺄학학.
좋단다.
* * *
“그 덩치 큰 스켈레톤이 두식이라 했었나? 잠시 불러보게.”
매저드 교수의 요구에 나는 마침 부활 쿨타임이 돌아온 두식이를 호출했다.
“샤릴리 샤랄라 시릴리 릴리.”
“으…, 마녀의 주문.”
옆에서 중얼거리며 귀를 막는 골드우드를 무시하고 돌법봉을 휘두르자 바닥에 수평으로 누운 검은 문이 나타났고 두식이가 엉금엉금 기어 올라왔다.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유황과 열기. 마치 지옥에서 동아줄을 잡고 간신히 나온 듯한 모습.
“두식아, 너 혼자 온천 갔다 왔냐?”
덜걱.
머리를 좌우로 급하게 흔드는 두식.
“희귀한 케이스구먼.”
매저드가 턱에 난 흰 수염을 쓸며 두식이를 세밀하게 관찰한다.
“남만혁 학생, 그거 아는가. 언데드가 유황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네.”
그냥 말하면 될 텐데 꼭 문답을 주고받으려 한다. 교수 특성인가.
“그게 어떤 경우입니까?”
“저쪽 세상 왕의 눈에 든 게지.”
왕.
왕이라하면 손가락을 긋는 것으로 가볍게 내 목을 날린. 그 블루의 왕이 떠오른다.
“교수님, 언데드의 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골드우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확실한 건, 유황 지대는 왕만 보유할 수 있다는 걸세. 우리는 그곳을 심계라 칭하며 마법사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위한 강의가 진행됐고 어느 순간 이게 네크로학파의 지식이라는 걸 알아챈 골드우드가 나를 노려봤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가볍게 흘려넘기고 교수의 가르침을 귀에 새겨 넣었다.
나와 관계가 없으면 모를까, 블랙 위치가 이쪽 전문인 이상 뭐라도 들어두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강의 후반부는 매저드 교수가 골드우드의 이중영창을 다듬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혁 학생.”
“예, 교수님.”
“어허, 스승님이라고 해야지.”
“…예, 스승님.”
“두식이를 잘 키워보거라. 내가 보기에 그는 특별한 스켈레톤이다.”
이미 언포스로 보고 골랐습니다. 잠재력 197의 미친 괴물이죠.
거기서 끝났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겠으나 매저드 교수의 말은 좀 더 이어졌다.
“왕의 자질이 있어. 자네의 언데드가 군을 이루면, 두식에게 맡겨 심계로 보내보게. 작은 영지 정도는 거뜬히 점령할 수 있을 것이야.”
“영지요?”
“쉿. 다른 학파의 사람이 들어선 안 될 정보일세. 네크로학파의 마지막 계승자인 데드레드스컬도 고민 끝에 내게 전한 이야기라네.”
강의실 구석으로 나를 끌고 가 조용히 사일런스 에어리어를 펼친 매저드.
“알겠는가. 100인 이상의 언데드를 보유하게. 그게 도전할 수 있는 최소 자격이야.”
“너무 많은데요.”
언데드 100마리가 쉽나.
지금 일식이와 두식이를 동시에 불러내면, 내 마나 총량의 절반이 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일종의 유지비인 셈.
일식이는 이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두식이는 돈을 받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를 매저드 교수에게 묻자 넘어온 세계가 달라서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고작 둘로도 이런데 백이라니.
내 마나 사정을 교수에게 전달하니 그는 미간을 좁히며.
“자네. 명상은 자주 하는가?”
“…아뇨.”
“당장 하게. 일어나서 한 시간, 자기 전에 한 시간. 이는 마법사의 기본이야. 스켈레톤의 마나 점유는 고정값이라네, 두 마리에 절반이면…. 허허.”
드물게 흥분한 교수는 내게서 재학 중에는 매일 명상을 하겠다는 마나의 맹세를 받고 나서야 다음 이야기를 이었다.
“먼저 데드레드스컬의 영지를 자네가 차지하게. 지구 출신 언데드가 그곳에 모여 있다 들었어. 다른 곳보다는 점령이나 협상이 수월할 걸세.”
어, 이거 혹시.
“지구 출신 언데드라면 히어로도 있습니까?”
“데드레드스컬이 죽은 지금 그걸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네.”
“그렇습니까.”
“이런, 벌써 다음 강의 시간이구먼. 가세. 다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
뜻밖의 정보를 얻었다.
‘심계라.’
* * *
“교수 1명, 학생 3명. 확인했습니다. 20시까지 귀환해주십시오.”
나와 도수정, 퀸은 고스트핸드를 따라 아카데미 밖으로 나왔다. 며칠 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는 의외로 별로였다.
‘하긴, 그간 산에 있었으니.’
택시 타고 30분. 우리는 버려진 것으로 보이는 5층 건물 앞에 왔다.
“지금 갈 곳은 사설 도박장이고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장소다. 관련 의뢰를 찾아보니 망하게 해달라는 피해자들의 절실한 요구가 있었다. 어디든 안 그러겠냐마는 여기는 특히 확률 조작이 심해.”
왜 그런 위험한 곳에 우리를 데려왔냐는 말을 눈으로 모조리 표현해낸 도수정에게 고스트핸드의 시선이 머문다.
“걱정하지 마라. 교수인 내가 너희 돈 쓰라고 하겠나.”
방긋.
“100만 원씩 주마. 안에서 칩으로 바꾸면 열 장이 될 거다. 10만 원이 기본 배팅이고, 음…. 게임 종류는 여럿 있으나 룰렛은 피할 것.”
“넵.”
“알겠습니다.”
“따도 됩니까?”
“너는 하여튼, 그래. 딸 수 있으면 따라. 오늘 과제는 하나다. 한 명 이상의 타짜를 찾을 것.”
“타짜라면 속임수를 쓰는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딜러나 손님, 심지어 칩 교환원이 만 원을 밑장 빼도 타짜라 친다.”
“그러면-”
“그만, 질문은 강의가 끝난 다음에 받겠다. 7시까지 여기에 다시 모이도록. 입장.”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장식 하나 없었으나 불쾌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향.’
공항 면세점이나 휴양지의 호텔에서 맡을 수 있는 그 특유의 샤이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사람의 심신을 풀어주는 그 향에 나는 되려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자~ 선수 입장~”
어이 씨 놀래라.
고스트핸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화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오글거리는 대사가 튀어나왔다.
“환전?”
금니를 보이며 웃는 환전 창구 안의 사내. 방금 들은 목소리와 같다. 선수 입장은 저 사람이 했나 보다.
고스트핸드가 칩으로 바꾸는 동안 도박장 내부를 둘러봤다.
유리문 너머로 슬롯부터 카드, 룰렛, 당구, …당구는 왜 있어.
아무튼 저기에 모인 사람이 아예 없는 거로 봐선, 당구대는 그냥 장식인 듯하다.
“받아라. 칩 열 개 그대로 가져오면 이번 학기는 무조건 A를 주마. 단, 다섯 게임 이상 참여할 것.”
도수정과 퀸의 눈빛이 바뀐다.
고스트핸드와 두 소녀는 각자 마음이 동하는 게임을 찾아 떠났고 나는 처음부터 계속 신경 쓰이던 당구대로 향했다.
다섯 게임 참여.
당구도 게임이긴 하지?
아니면 말고.
아무도 없는 당구대로 가 먼지 쌓인 테이블을 대충 후후 불어 털고 벽에 기대져 있는 큐대를 잡았다.
할 줄 아는 건 나인볼뿐이었기에 적당히 세팅하고 큐대를 퉁기자.
“어허! 누구 허락받고 당구대를 써!”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큐대를 반 자르고 두꺼운 부분에 당구공을 박은 희한한 지팡이를 짚고는 이리로 온다.
당구의 요정인가.
“할배가 여기 주인이쇼?”
“이놈 말본새가 흉악하구나!”
칩 하나를 당구대 위로 퉁겼다. 그러자 노인이 씨익 웃더니. 나와 같은 10만 원짜리 칩을 그 위에 놓는다.
“룰은?”
내기판이 된 이상 긴말은 필요 없었다.
“나 나인볼밖에 몰라.”
“나인볼 좋지. 선은 어떻게 정할 텨?”
“영감님이 늦게 왔으니 선공 양보하쇼.”
“그러지. 쳐 봐.”
나는 볼을 배치하기 위해 중앙에 올려진 칩을 치우려는데.
“어허. 그것도 필드에 포함해야지. 자, 하는 김에 이것도.”
칩 위에 자기가 들고 있던 당구공 지팡이를 아슬아슬하게 세워두는 노인.
“슛할 때 요거 넘어지면 지는 거다. 오케?”
이 영감…. 게임 재밌게 하네?
――――――――――
❖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