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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20화 (20/201)

<20화>

당구 요정 (2)

어떻게 생겨 먹은 지팡이인지. 가만히 둬도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졌다가 곧게 서는 것을 반복한다. 뒤집어 놓으면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양새.

내가 큐대를 잡고 수구를 겨누자.

“후, 후-”

노인이 지팡이에 입김을 불어대는 게 아닌가. 큐대를 거두고 영감을 노려보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야.”

“휘파람도 내 마음대로 못 부나?”

아, 그래?

나는 저지를 어깨에 걸치고 돌법봉을 꺼내 주문을 외웠다.

“시릴리 릴리. 샤랄라. 어, 일식아. 저 지팡이 좀 잡고 있을래?”

손뼈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식이.

“천 원 줄게.”

일식이가 양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잡자 바르르 떨리기는 해도 이전처럼 기울지는 않았다.

나는 그대로 브레이크 샷을 날렸고.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공이 사방으로 퍼진다.

“잠깐. 반칙이다.”

“네가, 입으로…, 바람 부는 건…, 괜찮고?”

분노와 조롱을 담아 반박하자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노인.

“휘파람이었다니까!”

덜그렁.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당구대 위를 구르던 7번 공이 구멍에 들어갔다.

나는 그대로 연속해서 공을 포켓에 때려 넣었고 마지막 9번 공을 스리쿠션으로 굴려 넣자.

저러다 쓰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붉어진 얼굴로 양손을 내밀며 기합을 터트리는 영감.

“흐아압!”

구멍에 들어가던 9번 공이 다시 튀어나온다.

와,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

“영감. 들어가는 걸 빼?”

“네놈도 특성 썼잖나.”

“나는 그쪽이 지팡이로 지랄염X 떨길래 방어한 것뿐이고.”

“그게 그거지. 나와! 내 차례니까.”

나인볼은 마지막 공을 넣는 사람이 이기는 심플한 룰. 영감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들어갈 9번 공을 보며 웃더니 한 손으로 큐대를 잡고 대충 수구를 쳤다.

폼은 저래도 수구는 정확히 9번 공에 닿았고 이대로라면 게임이 끝날 상황.

나는 옆 간식 테이블에 놓인 새우깡을 9번 공 위로 던짐과 동시에.

“미르토스.”

해변의 하늘 일부를 구현했다.

끼룩, 끼룩?

쐐애액.

새우깡을 향해 쇄도한 기러기가 9번 공을 낚아챈다.

그대로 해변 해제.

황당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노인.

“아무리 그래도 기러기는.”

“뭐?”

“…오케.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퉁, 퉁퉁.

기러기가 사라져 당구대에 떨어지는 9번 공.

내 차례다.

“일식아. 영감 팔 잡아. 천 원 줄게.”

달각.

“이익!”

그런데 9번 공의 위치가 좀 애매하다. 구석에 끼어 있어 저걸 빼내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맛세이로 간다.

내가 고각도로 큐대를 놓자.

“안돼! 300이하는 마쎄 금지다!”

“돼.”

콱!

당구대에 확실한 흔적을 남기며 공중으로 튀어 오른 수구는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내가 노렸던 자리에 안착해 9번 공을 밀었고 포켓을 향해 굴렀다.

“으아, 으아아!”

핏발선 눈으로 고함치며 9번 공을 노려보는 영감.

소용없다. 조작계, 특히 염력 쪽은 육체의 행동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일식이에게 속박된 이상, 도리가 없다.

텅, 텅텅.

나는 잘게 떨리는 지팡이를 치우고 그 아래에 있던 칩 두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좀 전부터 이쪽을 주시하던 환전원에게.

“짜장면 두 그릇 배달 좀 시켜주쇼. 이 영감이 살 거요.”

“내가 왜!”

버럭하는 영감.

나는 군말 없이 당구대 중앙에 내가 가진 칩 11개를 모조리 쌓았다.

“한 판 더 해야지?”

“…특성 없이?”

나야 좋지.

“콜.”

* * *

나인볼이라는 이 순한 게임에 사람의 목숨이 걸린 경우가 얼마나 될까.

“내 돈 전부와 내 남은 인생 10년을 건다. 너는 뭘 걸래?”

“할배, 돈이라고 해봐야 칩 하나잖아. 그리고 노인네 인생 10년 가지고 뭐 하라고.”

내가 타인의 삶이 필요하다면 그건 오직 그블린전을 위함이다. 본인에게는 소중할지 몰라도, 내게 있어 그의 10년은 하등 쓸모없다.

노인이 씩씩대며 내 멱살을 잡으려 다가오기에 말을 이었다.

“알았수다. 내가 또 오는 내기는 거절 안 하는지라. 보자, 판돈을 좀 올리자고. 나는 내 칩 모두와 남은 인생을 걸 테니까. 영감은 죽은 뒤의 삶까지 거쇼.”

영감의 언행에 담긴 도박에 대한 광기가 일순이나마 사그라드는 것이 보였다.

그럴 것이. 나는 대놓고 언데드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내 입에서 나온, 죽은 뒤. 라는 말이 진실로 그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안 거겠지.

이쯤에서 끝내도 나는 상관없다. 노인이 대단한 특성의 보유자라면, 납치를 해서라도 끌어들이겠지만.

‘염력이야 흔하지.’

조작계 절반이 염력이다. 단련의 정도에 따라 강약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유사한 퍼포먼스를 보인다.

숨을 길게 내쉰 영감은 지팡이를 소파 위로 던지더니 허리를 편다. 오, 1.8m는 되겠네. 의외로 키가 크다.

“특성은?”

“마음대로. 종이 특성도 못 써보고 졌다고 구시렁대는 건 나도 듣기 싫은지라.”

나의 비아냥에도 노인은 무표정으로 당구대만 내려다본다.

“하지.”

선을 정하기 위해 칩을 튕겼고 영감은 기합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며 염력을 부렸다.

“흐흐.”

앞면. 영감이 선이다.

참고로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비켜.”

괜히 나를 밀치며 수구 앞으로 간 노인은 브레이크 샷을 때렸다.

“제발, 하나만!”

말은 저리 간절하지만, 손가락은 피아노 치듯 허공을 두들기는 중이다.

그에 따라 공 다섯 개가 포켓에 떨어지기 직전, 해변 일부를 구현.

구멍 입구까지 차오른 물에 의해 둥실 떠오른 공들. 노인이 기를 쓰고 염력을 날려댔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와.”

넋이 빠진 노인을 옆으로 옮기고 큐대를 퉁겼다. 분명 경쾌한 소리가 나야 할 순간, 빗맞는 느낌과 함께 수구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뒤를 돌아보자 일식이에게 사지가 결박되어 있음에도 염력을 사용하는 노인이 보였다.

귀기가 도는 푸른 눈.

방금까지만 해도 적갈색 빛을 띠었던 눈이. 밝은 하늘색으로 반들거린다.

재각성의 전조.

‘나 참, 무슨 당구 치다가 재각성을 해.’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심 기대가 되어 괜히 아쉬운 소리를 뱉어봤다.

“할배, 이러기야?”

“어린 친구, 이 정도도 예상 못 했으면 판을 벌리질 말았어야지.”

일단 수구는 쳤으니 턴이 넘어가는 게 보편적인 규칙.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텅, 터텅.

구현해둔 물을 해제함으로써 다섯 개의 공이 들어간다.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고 이내 수구가 거칠게 당구대 위로 떨어졌다. 구석에 처박히는 것이, 또 영감이 염력질을 한 듯하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알다시피 인간은 각성하는 순간 재생 세포의 수명이 확 늘어난다.

그러므로 각성자의 외견이 여든을 넘긴 것처럼 보인다면, 180~200세 사이의 노괴.

게다가 방금 저 노인은 만 명 중 한 명이 겪는다는 재각성을 했다. 피부가 좋아지는 게 실시간으로 분간될 지경.

즉. 그블린전에 써먹을 수 있게 됐다.

“끄으읍!”

용을 쓰고 포켓에 들어간 공을 조작하려는 영감.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눈에 보여야 뭐라도 할 텐데 공은 구멍 아래에 형성해둔 내 물에 빠져 있거든.

으득.

음?

으드득!

당구대 전체가 바닥에서 뽑혀 천장에 처박힌다. 그 충격으로 내가 가둬둔 공들이 아래로 떨어졌고 이를 전부 제어하는 노인.

코피를 엄지로 닦으며 웃는 영감.

“크, 젊을 때 전쟁 생각나는구만.”

저 연배의 각성자가 전쟁이라하면 세계 3차대전을 말한다. 각성자가 현대 화기를 들고 적국의 도시를 폭격했던.

인류 최악의 전쟁.

어찌 됐건. 이래서는 끝이 없다.

‘이 방법은 안 쓰려고 했는데.’

“내 차례지?”

“공이 들어갔는데 어떻게 댁 차례야.”

“수구를 쳤는데 공이 전부 당구대 위에 있잖나!”

영감이 우기기에 못 이기는 척 그러라고 했더니 사악하게 웃으며 큐대를 쥔다.

애쓴다, 애써. 부질없는 것을.

수구를 때리자마자 일식이에게 삼천 원을 물려줬다.

녀석은 내 의도를 읽었고, 쾌속으로 굴러가는 수구를 손에 쥐더니 그대로 맨바닥에 던져버린다.

노인이 서둘러 염력을 쓰는 듯했으나 흑청색의 안광을 뿌리는 일식이에게 통할 리 없다. 저 상태의 일식이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을 흡수하니까.

내 차례가 됐고. 일식이는 고함을 쳐대는 노인을 속박해 내가 구현해둔 바닷속으로 다이빙.

그 사이 큐대를 놀려 정상적으로 공들을 포켓에 넣었고, 쫄딱 젖은 영감이 돌아왔을 땐 모든 게 끝나 있었다.

“…….”

수구만 굴러다니는 당구대를 한참 쳐다보다 나를 노려보는 노인.

“10년으로 봐줘.”

“안 돼.”

“다시는 도박 안 할게. 응?”

“안 돼. 돌아가, 안 바꿔줘.”

“크흑….”

노인의 패배로 내기 당구가 끝나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손뼉을 친다.

“드디어 올드 빌리가 끝장났어!”

“전국 사설 도박장을 돌아다닌다지?”

“가는 데마다 있더라고. 재수 없게.”

홀로폰의 시계를 들여다보니 6시 30분.

‘집합까지는 여유가 좀 있나.’

나는 마침 도착한 짜장면과 탕수육을 먹으며 물었다.

“영감, 이름은?”

“빌리. 몹쓸 놈아.”

“빌리. 너는 뭘 잘하지?”

“당구.”

“별로던데.”

“…….”

“딴 거는?”

“나는 조작계다. 사물을 움직이는 데 정통했지. 봤잖나.”

“그건 써먹을 데가 없으니까 묻지.”

저 나이쯤 되면 세상일에 달관해서 어떤 말을 듣던 그리 격노하지 않는다던데. 빌리는 예외인 듯, 노기를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고 있었다.

“씁, 인맥이 좀 있다.”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고른 뒤에 뱉은 말.

“인맥이라면 나도 적당히 있는데. 정, 재계 쪽은.”

“어린놈이 무슨.”

안 믿어도 상관없는지라 빌리의 의심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물었다.

“인맥 누구?”

“머신팩토리가 내 부X친구다. 어린 너는 모를 거다. 100년 전에 활동한 놈이니까. 그래도 알 놈은 다 알아. 교과서에도 실렸고.”

안다.

회귀 전 기준으로 그는 재각성을 마친 사람이었고 그블린이 침공했을 때 퀸의 세력에 가담한 인물이다.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하루에 십만 정의 플라스마 건을 찍어냈다고 들었다.

몇 세기를 앞선 오버테크놀로지로 일반인을 무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뭐…, 결과적으로 그런 무기가 있어도 주술을 머금은 그린의 피부와 속성 강화가 끝난 블루의 실드 뚫을 수 없었지만.

머신팩토리의 존재를 안 그블린이 그를 암살했고 이후 졸전을 거듭하다 인류가 멸망했다.

그의 존재가 그블린전의 승패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건 아니었으나 흐름을 바꿀 정도의 주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내가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작게나마 승률이 오를 터.

“아니면 해킹에 능한 친구도 있고. 그쪽 소개해줘?”

노인의 다른 인맥도 궁금해 듣고 있자니 머신팩토리만큼 능력을 갖춘 인물은 없었다.

“머신팩토리와 만나고 싶다.”

“음, 봄에는 미국에 있지. 언제 갈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찾아가고 싶지만, 아카데미 학생이라 운신이 자유롭지 않다.

“내가 왜 가. 오라고 해.”

“…어린 친구. 나야 내기에서 진데다 백 년을 이 꼬락서니로 살았으니 아무렇게나 말해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친구는 달라.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녀석이다.”

“알았으니까 데려와. 내가 만나 보고 판단할 테니까.”

“내 말은. 네놈이 직접 기어가서 머리를 조아리란 뜻이다!”

“됐고. 재각성 시켜준다고 해. 너처럼.”

광분하던 그가 잠시 침묵하더니.

“재각성? 내가? 그리고 보니 아까…. 아!”

혼잣말을 꿍얼거리던 그는 침을 꿀떡 삼키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려오마.”

그래. 수명 50년 늘려준다는 데 당장 텨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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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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