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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21화 (21/201)

<21화>

1번 방의 딥다크마인드

“4명이요.”

“저는 5명 봤어요.”

“2명.”

퀸과 도수정이 말하는 명 수에는 고개를 끄덕이던 고스트핸드가 내 말에는 눈썹을 까닥인다.

“넌 왜 둘밖에 못 찾았지?”

“찾은 건 빌리라는 영감 하나뿐입니다.”

“그러면 왜 두 명이라고 했나.”

“나도 특성 썼으니까?”

“…그래. 다들 남겨온 칩이나 꺼내 봐라.”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주저하며 칩을 고스트핸드에게 내밀었다. 퀸이 하나, 도수정이 셋.

“잃었어요….”

“저도요.”

“잃는 게 당연한 거다. 호구가 왜 당하는지 이제 감이 좀 잡히나?”

“네….”

“그래도 칩이 남았을 때 그만둔 건 바른 선택이었다. 그런데 남만혁. 너는 칩을 다 잃었나?”

“잠시만요. 아, 저기 오네요.”

재산 대부분을 칩으로 교환해놨던 빌리가 환전소에서 내 계좌로 입금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내가 주문한 대로 칩 열 개만 들고 와 뚱한 얼굴로 건네는 빌리. 나는 그걸 고스트핸드에게 보였다.

“…약속대로 너는 시험과 관계없이 최고점을 주마. 단, 출석은 별개다. 꾸준히 나오도록.”

“넵.”

당구 요정과의 일전은 도박장 휴게실에서 벌어졌기에 깊숙한 곳에서 게임을 즐겼던 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시지?”

“나는 신경 쓰지 말어. 이놈 종이니께.”

“종?”

“그렇게 됐습니다.”

묘한 눈으로 나와 빌리를 쳐다보는 고스트핸드.

“수행원은 아카데미에 들일 수 없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는 미국으로 날아가 머신팩토리를 데려와야 하니.

“알겠습니다. 빌리, 약속한 대로 해주쇼. 가기 전에 번호 좀 찍어 주시고.”

홀로폰에 빌리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 여비를 이체한 뒤, 미리 불러둔 콜택시에 태워 공항으로 보냈다.

신속하게 진행된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고스트핸드는 어이가 없는지 고개를 내젓고는.

“호구가 돼보라고 데려왔더니 호구를 잡아 온 놈은 네가 처음이다.”

거, 칭찬을 너무 대놓고 하시네. 쑥스럽게.

* * *

죽음은 해방이다.

인간이라는 단어를 해부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나는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과 부닥치며 세상을 살아가야만 한다.

타인과의 교류는 종래에 고통만이 남는다.

상사의 핍박.

동기의 질투.

후배의 뒷담.

부모의 폭력.

아내의 의심.

자식의 원망.

나를 둘러싼 세상의 감정과 행동 그 모든 것들은 늘 우리를 괴롭게 한다.

자유로워질 방법은 하나뿐.

죽음.

그것만이 진정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축복받은 상태이다.

끄륵, 끅-

으으윽.

목에 걸린 밧줄의 압박이 경부를 조여온다. 숨이 막히고 안구가 돌출되며 앞이 검게 변해간다.

드디어 자유가 허락되려는 순간.

뚝.

밧줄이 끊어지고 바닥에 추레하게 나뒹굴고 말았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란 말인가.

이 밧줄을 만든 놈마저 나를 조종하려 드는구나.

“…어차피 죽을 목숨.”

하나 정도는 저승길에 데려가도 되겠지.

허름한 폐가에서 걸어 나온 남자는 핏발선 눈으로 철물점을 찾았다. 그는 타인이 만들어낸 웃음 가면을 얼굴에 걸고 태연히 철물점 주인에게 물었다.

“이 밧줄, 끊어져서요.”

“새 걸로 드릴…. 읍.”

여주인은 남자 목에 난 선명한 밧줄 자국에 매우 놀라 전화기를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것보다 밧줄 이거, 만든 사람 누군지 아세요?”

남자는 여주인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렸음을 직감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 잠시만요. 납품명세서에 있거든요. 찾, 찾았어요. 양산동 공장이네요. 박민철이라고.”

거기까지 들은 남자는 철물점에서 낫과 모종삽을 집어 들었다. 사색이 된 여주인이 무어라 하려다 곧 입을 다물고 남자가 건네는 돈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든다.

철물점의 문을 열고 나서던 남자가 작게 말했다.

“잘 참으셨어요. 그렇게 사시면 돼요.”

“흡-”

숨넘어가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온 남자는 오래된 포터에 시동을 걸었다.

들은 주소지로 가자, 번듯한 공장이 보였고 담벼락 안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박민철!”

박민철?

“예.”

“이리로 와보세요.”

옮기던 짐을 대충 던지고 주임에게 걸어간 박민철은 그에게 해고 통지를 들어야 했다.

“당신이 만든 물건들에 하자가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경고를 드렸었죠? 오늘까지는 일한 거로 해드릴 테니까. 정리해서 나가세요.”

박민철은 쌍욕을 허공에다 지껄이고는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옷가지를 들고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는 박민철의 뒤를 미행했다.

허름한 빌라의 지하로 내려가는 박민철.

문이 닫히고 귀를 기울이니 안에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압바! 일찍 왔네!”

“그래, 아람이 보려고 몰래 왔지.”

후우. 후.

망설일 것 없어. 저 아이들도 어차피 10년 뒤면 부모를 원망할 것이고 저 박민철도 나처럼 죽지 못해 살 거니까.

여기서 다 끝내주자. 그게 저들과 나를 위하는 길이야.

남자는 빌라 앞에 버려져 있던 상자에 낫과 모종삽을 넣고 잠시 택배원 대사를 떠올린 뒤 벨을 눌렀다.

“네~ 아람이네 집입니다.”

“택배 왔습니다. 공주님, 사인 좀 부탁해요.”

“지금 가요!”

“아람아 잠깐만, 요즘 시대에 무슨 사인입니까. 됐으니까 두고 가세요. 윗집이 주소 잘 못 적은 거 같으니까.”

“하하, 저도 그러고 싶은데. 사인 안 받아 가면 뭐라고 해서요. 간단하게 체크만 하면 되니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쯧, 아람아 잠깐만.”

“응!”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하지 말자. 문이 열리면 곧장 낫을 꺼내 목을 찌르는 거야.

다음에 놀란 애가 슬퍼지기 전에 끝내고 나도 죽으면. 그래, 깔끔하네.

문이 열렸다. 남자가 상자를 뜯고 낫을 쥐려던 때에.

“이거 제 택배네요.”

“예?”

뭐지? 이 어린놈은?

“우리 집으로 가시죠. 사인해드릴 테니까.”

“예? 아니…, 알겠습니다.”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놈부터 처리하기로 한 남자는 박민철이 ‘이상하네. 처음 보는데.’라며 문을 닫자마자 낫을 꺼내 어린놈의 목덜미를 내려쳤다.

덜걱.

“해, 해골?”

거구의 해골이 낫을 잡아 막았을 뿐만 아니라 남자의 몸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입 안에 넣어 뾰족한 송곳니로 다리와 팔을 씹는다.

끄아아악!

백골을 물들이는 붉은 피와 남자의 비명이 좁은 빌라를 울렸고 방금 문을 닫았던 박민철이 놀란 얼굴로 튀어나왔다.

“아, 괜찮습니다. 빌런 포획 작전 중이라서요. 운이 좋으셨습니다. 앞으로는 더 의심하세요.”

도도도.

아빠, 뭐야?

“아람아 나오지 마!”

소년과 눈빛을 교환한 박민철이 잽싸게 문을 닫아걸었다.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죄 없는 민철이도 데려갔냐.”

“끄으윽, 으아악!”

“애가 보는 앞에서 민철이를 그렇게 죽이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이 쓰레기 새X야.”

뉴스에선 민철이의 사지가 잘렸다고 했다. 그 뒤에 저 아람이라는 아이가 죽었고.

“나, 나는. 아무것도.”

“그래 안 했지. 근데 할 거잖아? 내가 조금만 늦었으면 지금쯤 벌어진 일이겠고.”

“아냐. 나는 바로 죽이고 나도 죽을 생각-”

“지랄 마. 너는 사람을 죽이는 순간 각성하고 살인에 미친 놈이 돼.”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순수하게-”

츠즉.

-로맨, 벙커 주변 정리됐어.

“여기도 끝났다. 지금 갈게.”

화물칸이 방수포로 덮인 포터가 도시를 벗어나 어느 야산의 지하 터널로 들어섰다.

“나다.”

시멘트로 막힌 것처럼 보였던 터널의 끝이 좌우로 열리자 넓은 공동과 번호가 새겨진 방들이 나왔고 소년은 그중 1번 방에 남자를 밀어 넣었다.

“네가 여길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맨정신으로 각성하거나. 평생 내 노예로 살 거나.”

“…나는 내 자유의지로 살아갈 것이다. 절대 타의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오냐.”

텅.

두꺼운 석문이 닫히자 공동은 조용해졌다.

“리쳇, 저거 포함해서 앞으로 벙커빌에 수감될 놈들에게 밥은 맛있는 거 넣어줘라. 자해는 절대 못 하게 막고.”

-그냥 굶기는 게 효과적이라는 통계가 있는데?

“그건 간수들이 통제하기 쉬우라고 그러는 거고. 내 경험상 뭐 하나 낙이 있어야 괴로운 게 버텨지더라. 어찌 됐건 아직 죄짓기 전이잖아.”

-목화밭 주인님이 그러시다면야.

그놈의 목화밭 드립은. 아무튼 이거로 몇 년 뒤에 벌어질 큰 사건 하나는 막은 셈이다.

“가만 보자, 지금 몇 시지?”

-5분 안에는 출발해야 시간이 맞을걸?

쓰읍. 희귀한 특성 하나 수집하겠다고 주말 싹 날렸네.

방금 1번 방에 처넣은 우중충한 놈은 딥다크마인드라 불리는 빌런이 된다.

특성은 정신 제어.

이놈은 사람의 네거티브한 감정을 자극하는 데 특화돼서 어느 등산동호회 30명 전원을 절벽에서 떨어트린 뒤 집단 자살로 위장했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정신 간섭은 역사상 클레오파트라나 유비 말고는 없다시피 해서 필사적으로 당시의 뉴스를 떠올렸다.

최초 희생자의 이름과 장소, 날짜를 기억해냈고. 그의 빌라 인근에서 잠복하고 있었던 것.

-로맨. 공지 올라왔어. 월요일에 월말 평가전 하겠다네?

“벌써 한 달이나 됐나.”

빌리를 부하로 들인 날로부터 삼 주가 흘렀다.

내 사유지가 된 산은 요새로 개조하기로 정하고 각종 자재를 외부에서 반입하고 있다.

다만, 교감이 묵인해줄 수 있는 규모가 생각보다 작아서 완공되는 데는 시일이 좀 걸릴 예정.

아, 그리고 퓨즈의 검사 결과가 나왔다. 큐링 힐이 말한 대로 조작계였다.

워터 컨트롤. 말 그대로 물을 다루는 능력. 특성 자체는 흔하고 대단치 않은데, 기존의 능력과 조합되자 괴물 같은 퍼포먼스가 나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번은 내게 당한 뒤로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든 모습이었는데, 얼마 전 면회 온 소민 누나를 만난 뒤로는 새사람이 된 것처럼 굴고 있다.

소민 누나는 태양이가 하도 내 해변에서 수련하고 싶다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왔었다며 내게 미안해했었다.

“정지. 신분증 제출해주십시오. 어, 만혁이냐?”

아카데미 동상문 앞에 차를 세우자 경비를 서던 히어로가 나를 알아본다.

“예, 아저씨. 이거 드세요.”

창문을 열고 양산의 명물인 호두땅콩빵 두 세트를 종이가방 채로 내밀었다.

“흐흐, 자식이. 이런 건 안 줘도 된다니까. 잘 먹으마. 오, 이번에는 양산에 다녀왔나 봐? 그래서, 면허증은?”

바로 내용물을 꺼내 입에 넣고 장난스레 묻는 경비원.

나 미성년인 거 알면서 이 양반이.

“AI드라이브 쓴다니까요.”

2047년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전국에 보급되고 이를 관리, 감독하는 AI가 개발됨에 따라 면허증의 필요성이 급감했다.

아직도 인공지능을 신뢰할 수 있냐 없냐로 갑론을박이 오가고 있지만, 남녀노소 불문하고 특별한 조건이나 자격제한 없이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미 국민 7할이 이용 중이다.

“나 때는 말이다. 스틱을 잡아야만 남자 취급을―”

핸들 대신 놓인 홀로보드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들며 자신의 과거사를 늘어놓는 경비.

이 사람은 다 좋은데, 좀 꼰대다.

“갑니다.”

“벌써?”

“저 학생이에요.”

내가 시계를 힐끔 보자 아쉬워하는 경비원.

“어쩔 수 없지. 가라. 참, 우리 오늘 못 본 거다?”

지금 시간대의 경비원들은 교감의 입김이 닿은 사람들이라 내 편의를 봐주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공식적인 허가가 떨어진 건 아니라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죠.”

-차는 내가 주차해놓을게.

‘부탁하자.’

내 산 초입에 들어서자 임시 컨테이너 주택 앞에 낯설지 않은 소녀가 서성이고 있었다.

“퀸?”

“…남만혁.”

“여기서 뭐 해. 10분 남았는데.”

나야 여기서 백호 타고 가면 금방이지만, …아. 쟤는 날아다니지 참. 태워달라고 해볼까.

“그.”

“빨리 말해. 시간 없어.”

컨테이너에 들어가 대충 옷을 갈아입으며 말하자 놀란 퀸이 홱 몸을 돌린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하길.

“도와줘.”

나는 상의를 입으며 창밖으로 고개만 내밀고.

“뭘?”

“잘 싸우는 법.”

그건 또 내가 전문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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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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