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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22화 (22/201)

<22화>

평가전 (1)

남만혁이 딥다크마인드를 포획하기 하루 전.

“그레이스, 괜찮아?”

마가렛의 걱정에 고개를 떨어트리는 그레이스 멜론.

“으응.”

그녀는 일주일 전부터 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양호 선생님은 뭐래?”

“재활에 성공한 전례가 있기는 하대. 근데 그 사람이 다시 특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10년 뒤라고 하셨어.”

멜론은 지금 특성 망각 현상이라 불리는 증상을 겪고 있다.

이는 복수의 특성을 보유한 이가 아주 낮은 확률로 겪는 희귀현상이며 사실상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는 판정이 내려져 있다.

아카데미 측에서는 일단 이번 학기는 퀸을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정된 상황.

“그 교수에게 한 번 가 봐.”

“누구?”

“마운틴 교수.”

“아.”

세모 입을 만들며 달가워하지 않는 멜론의 모습에 마가렛은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멜론, 네가 귀엽긴 하지만 애처럼은 굴지 마. 그 녀석이 특별하다는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최근 1학년들 사이에서 남만혁에 대한 괴이한 소문이 돌고 있다.

주말마다 아카데미를 탈출한다던가, 사제품을 밀수해온다던가, 교감의 숨겨진 자식이라던가 하는 것들.

마지막 것을 제외하면 의외로 사실인 이 소문을 진심으로 믿는 학생은 없었으나 마가렛과 멜론을 비롯한 남만혁과 직접적인 접촉이 있었던 이들은 은연중에 그럴지도 모른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 줄까?”

“아냐, 혼자 갈게.”

마가렛은 결정을 내린 그레이스를 보며 내심 뿌듯해했다.

‘고민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구원받으니까.’

* * *

“특성이 안 써진다고?”

“응…, 그리고 이번 평가전에서 순위가 10등 이하로 떨어지면, 다음 학기에 퇴학이래.”

그레이스는 부모에게도 비밀로 했던 교감의 통보를 이 남자 앞에서 말하고 말았다.

“흐암, 으. 미안 밤을 새서. 그래서?”

자신의 인생 최대 걱정을 하품으로 받는 남만혁의 모습에 그레이스 멜론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말하지 말걸. 이 인간은 내 고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게 분명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과 함께 산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잠깐만. 그러니까 9등 이상으로 만들어 달라는 거잖아.”

“…그래.”

사실 멜론은 마가렛에게 부추김당하기 전부터 지형만을 활용해 자신의 특성을 무효화한 이 남자라면,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꿀꺽.

비장의 한 수라도 알려주는 걸까. 멜론은 뜸을 들이는 남만혁의 입에 시선을 모았다.

“망했네.”

“…왜?”

“너 때문에 강의 늦었다.”

하.

휘파람으로 백호를 나무 사이에서 불러낸 그는 그 위에 타고 있는 해골의 두개골에 천원을 물렸다. 그러곤 쏜살같이 산을 내려가는 남만혁.

“야--! 남만혁!”

그레이스 멜론이 그의 뒤통수에 그간의 스트레스와 원한을 담아 소리치자.

“점심 먹고 여기로 와. 그때 알려줄게.”

멜론은 어금니를 악물고 속으로 남만혁을 욕했다.

이 나쁜 놈아! 나도 데려가야지!

* * *

아슬아슬하게 데커드 교수가 들어오기 전에 교실 입성 성공.

오전 강의는 월말 평가전에 영향이 없는 수준으로 소프트하게 진행됐다.

크릉.

“어, 일식아. 고생했다.”

달각.

번퓨즈의 침입 이후 일식이와 백호의 존재가 아카데미에 드러났다. 나는 큰 파장이 있을 거로 생각하고 다른 산 깊숙이 백호를 숨겨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의외로 다들 덤덤하더라.

나중에 알아보니 온갖 특성 보유자들이 모이는 곳이라 호랑이 정도는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라고.

하기야 당장 나만 해도 저렇게 보아뱀이 사람을 휘감고 있어도 쟤 특성이겠지 하고 마니까.

그래서 아예 일식과 백호, 통칭 호식이 콤비를 자가용처럼 애용 중이다. 탈 때마다 천 원씩 내야 하는 게 좀 귀찮긴 하지만, 시간 절약과 안락함의 대가라 치면 나쁘지 않았다.

“집에 가자.”

일식이가 백호의 머리털을 잡아끌자 눈꼬리가 끌려 올라온 백호가 끄릉 대며 방향을 전환한다.

바람같이 달려 컨테이너가 있는 공터에 도착하자 부유가 없는 이상 나보다 빨리 올 수 없는 퀸이 먼저 와 있었다.

“너. 수업 안 들어갔냐?”

“그런 건 됐으니까 방법이나 알려줘.”

어휴 저 답순이.

퀸은 아카데미 시절의 이야기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특성 망각 현상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는 들은 바 없다.

하나 확실한 건, 잘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슈퍼히어로가 됐다는 것이다.

하등 쓸모없는 걱정으로 인생과 심력을 낭비하는 게 사람이라지만, 이건 진짜 무의미한 고민이었기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품이 나왔던 것이고.

음, 그 퀸이 저리 무기력한 걸 보고 있자니 좀 안쓰럽긴 하다. 빌런의 생존법 기초편 정도만 알려줄까.

“가르쳐줘.”

“그 전에. 복습부터 하자. 너 고스트핸드 교수에게 배운 거 읊어봐.”

“음…, 어떤 경우에도 정보 수집을 우선 하는 것과 필드 전체를 보는 법, 손기술 간파하기, 빠질 타이밍?”

“다 나왔네. 그거면 돼.”

정보 수집.

“상대가 누구인지부터 알아야지. 만약 스위프트라면 그의 가족과 성장환경 최근 겪는 트러블까지 싹 긁어모아서 감정을 자극할 만한 말을 미리 생각해두는 게 기본.”

퀸의 눈이 짜게 식었으나 반론은 하지 않았다. 이게 효과가 있다는 것 정도는 입학시험 때 내게 당해 봐서 아는 거겠지.

시야와 손기술.

“상대의 공격에는 반드시 전조가 있어. 자, 이렇게 주먹을 지를 때도 하체와 허리, 어깨가 움직이지? 특성도 마찬가지다. 가장 쉬운 건 상대의 눈을 주시하는 거고. 목표를 한 번은 보게 돼 있거든.”

근접전에서는 동체시력이 좋은 놈이 유리하다. 공격을 보는 건 물론이고 상대의 의사마저 미리 알아채니까.

퀸이 손을 든다.

“질문. 상대가 멀리서 공격하면?”

“정보 수집을 철저히 한 너는 그놈이 거리를 벌리는 이유를 알 테고. 무엇을 할지 안다면, 못 피할 리 없겠지? 만약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럼 미리 그에 대응할 방법을 준비해가야지.”

도주 타이밍.

“싸움의 최선은 일방적인 폭력. 차선은 히트 앤 런. 우리같이 무능력한 것들은 이 두 가지를 할 수 없는 상황이면 싸움을 걸면 안 돼. 참, 네 상대가 누구랬지?”

“스위프트.”

조져놨네.

순간 속도만 보면 교내 누구보다 빠른 놈인데다, 어린 게 벌써 자연체까지 쓴다. 사실상 미각성자에게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특성.

퀸의 특성이 온전하다 해도 싸움이 될지 의문인 상대다.

미래의 퀸 같으면 호쾌하게 웃으며 원펀치로 지구 반대편까지 날려버리겠지만, 지금의 녀석은.

“…역시 안 되겠지?”

저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에휴, 기다려봐. 하나씩 해보자.”

‘리쳇, 스위프트 정보 좀 모아봐.’

-예스, 파머.

곧 칩과 연동된 망막에 창 하나가 떴고 스위프트와 관련된 정보들이 일목요연하게 나열되었다.

[0세 각성, 생후 7일 된 아이에게 스위프트라는 히어로 명이자 이름을 붙인 부모.]

[스위프트, 복수 특성 각성! 신이 점지한 아기!]

[바람화와 염동력의 환상적인 시너지!]

….

….

….

[갓차일드 스위프트, 정부의 국내 아카데미 진학 권유를 거절하고 서히아로 향한 이유는? ‘더 강해지기 위해.’]

[입학시험에서 드러난 스위프트의 진면목! 그는 최강인가.]

스위프트는 미래에 꽤 활약하지만, 슈퍼히어로는 되지 못한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나와 퀸이 정점에 도달했을 무렵엔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었다.

“야, 스위프트의 특성이 뭔지는 알지?”

“바람화, 염동력.”

“그래. 그놈은 태어나면서부터 각성해서 우리랑은 숙련도 레벨이 달라.”

“그렇지….”

“그게 약점이다.”

“응?”

“특성에 너무 매몰돼 있다는 거지. 토너먼트 때도 보니까 마가렛에게 불의의 일격을 허용했잖아.”

“그렇긴 한데, 바로 바람화로 대응해서 충격을 완화했어. 데미지는 거의 없었을 거야.”

“스위프트의 대응이 중요한 게 아니야. 사실상 무능력자인 네가 놈에게 한 방 먹이는 게 핵심이지.”

“……!”

“아카데미의 평가전이라는 게 학생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는 거잖아. 그 목적에 부합되기만 한다면야 순위 방어를 못 할 것도 없어.”

학생의 성장.

서히아는 그것 하나를 위해 커리큘럼이 짜여지는 아카데미.

공개되지는 않지만, 입학했을 때의 스테이터스가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나 평가전에서 이 수치를 갱신하게 되는데, 그 차이만큼 순위가 오르내린다.

스위프트가 레벨 10이라 치면 12로 성장했을 때보다, 5에서 10으로 성장한 퀸이 점수가 높다.

즉.

“꼭 이길 필요는 없는 거네?”

“그렇지.”

표정이 밝아지는 퀸을 잠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좋아하기에는 아직 일러. 놈의 패턴과 열받게 할 욕을 연습해야지.”

“패턴은 좋은데 욕은 좀.”

“네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냐. 실전에서 안 쓰더라도 일단 외워. 자, 따라 해봐. ‘야 이 부모님이 천사 같은 자식아.’”

미간을 구기려다 고개를 기울이는 퀸.

“그건 욕이 아니지 않아?”

“근데 기분 나쁘지?”

“조금?”

“그럼 욕 맞아.”

물론 심한 것도 많이 알지만, 그걸 퀸에게 들려주고 싶진 않았다. …사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패드립이기도 하고.

“부, 부모님이 천사 같으셔!”

“그건 칭찬이잖아. 억양을-”

격장지계를 1시간이나 연습시켰으나 첫 대사와 그리 바뀐 건 없었다. 천성이 선해서 그런가, 가정 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가. 목소리 자체가 선하다.

“다음은 어떻게 한 방을 먹일 것이냐인데.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미인계.”

내가 상의를 훌렁 벗자 퀸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린다.

“상대가 어릴수록 지금처럼 이성의 나신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

“안 해!”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스위프트가 준비하기 전에 때려. 가능하면 시작 호각이 들리기 전이면 더 좋고.”

“반칙이잖아.”

“긴장해서 그랬다고 하면 돼.”

“…너는 정말.”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10위로 안 밀려날 자신 있어? A반이 물로 보이냐?”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젓는 퀸.

“호각을 불기 전까지는 상대의 몸에 주먹이 닿지만 않으면 되잖아. 달려가는 건 문제 없어. 중요한 건 타이밍.”

퀸을 토너먼트 때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무를 마주 보게 한 다음 입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늦어. 더 빨리. 그렇지, 이번에는 좋았어. 다시. 아니지. 발이 늦잖아.”

“하악, 훅.”

“됐다, 그만.”

시계를 보니 곧 오후 강의 시간이다.

“배운 대로만 해. 한 방 먹이고 튀어. 나라면 바로 항복하겠지만, 너는 끝까지 할 거 아냐. 최대한 맞지 말고.”

“…고마워.”

“뭐 이 정도로. 나 간다. 아,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이 주문을 한 번 외워봐.”

“주문?”

“부유, 내구, 가속. 유니버스 다이브.”

“유니버스 다이브?”

앞 세 개는 퀸이 나를 상대할 때 중얼거리던 제 특성들이고 유니버스 다이브는 내가 저건 감당 못 하겠다 싶은 녀석의 궁을 가져다 붙였다.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고, 다음 날 늦은 시간까지 평가전이 치러졌다.

나야 곽재우와 소구경같이 들이받는 놈들 기를 싹 죽여 놓고 집에 와서 쉬는 중이다.

탕, 탕탕.

컨테이너 문에 부닥치는 쇳소리에 급히 나가니 사람으로 보이는 실루엣 두 개가 공중에 떠 있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

“내려와서 노크할 것이지 어디서 돌을 던져. 건방지게.”

내 짜증이 고스란히 담긴 고함에 움찔하는 두 사람.

“내가 내려가자고 했잖아.”

“부유를 보여주고 싶다고 한 건 너다. 그레이스 멜론.”

멜론?

퓨즈가 장난치던 게 아니었나. 응? 퀸이 지금 날고 있다는 건.

“됐냐?”

“…응!”

좋단다. 어어,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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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귀한 슈퍼빌런은 히어로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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